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바가바드 기타
카르마 요가는
인도 말로 [행위 수행]입니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다하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업 수행이며
일어날 일의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집착이나 보상 심리를 가지지 않고
행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카르마의 요가를
유교로 풀어 이야기하려는 것을
좀 이상하게 느낄 분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종교 인구를 셈할 때
보통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같은 종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교 인구를 추정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유교를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절대 신을 모시지 않는 것이 이유라면
불교도 그렇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기본이라서 일본의 신도와 다를 바가 없는데,
종교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유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규범의 기초로
아주 오랫동안 질서의 토대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신앙체계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럽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의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중세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냥 당연하게 유교적으로 살아갑니다.
삼강오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생활의 규율입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종교에는
유교가 있습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를 안 지내고, 추도식을 한다고는 하지만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리는 양식은 다르지 않습니다.
장유유서의 서열과 남녀유별의 분리는
기독교가 오히려 더 장려하고 있죠.
불교는 아예 유교와 오랫동안 공존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불교는 유교에 매우 포용적입니다.
유교에 대한 종교적 품평을 하려는 것은
이번 동영상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렇게 서론을 길게 하는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유교적 실천 수행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교적인 관점으로는 이미 수행자들입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계율을 따르고 실천을 행해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게 무슨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죠.
그것은 마치
가나다라를 배우고, 덧셈과 뺄셈을 배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지침을 잘 행하면 칭찬을 받았고
그러지 못하면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 자체에 대해
뭔 수행을 한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까르마 수행의 의미는 그것과 비슷합니다.
깨달음 지도에서
유교를 끌어들여 수행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제 시도가
매우 난감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도대체 유교의 어떤 덕목을 수행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인의예지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경천애인?
그렇죠,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유교감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닙니다.
유교는 정치사상이기도 하며
수양을 통한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심신 단련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중용에서 제시된 수행법입니다.
공자의 정의에 따르면
중용이란
마음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항상
평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하늘의 명으로 받아들여 행하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데 그렇게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중용은 정성을 강조합니다.
조심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계신 공부의 자세는 엄청 어려워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언제나 정성을 다하는 태도라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 마음은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정성이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다해라
성실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해라
그것이 수행의 규범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이
우리가 생활의 도리로 여겨온 것들입니다.
중용은 물론
유교 철학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대목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한다.
하지만 그다음으로는
막바로 수행의 요체인 태도를 말합니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멀리할 수 없으니
만약 멀리해도 된다면 어찌 도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군자는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은밀하고 미세한 것일수록 더 잘 드러난다.
그래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삼간다.”
그리고 본격적인 실천론에서는
성이라는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를 강조합니다.
이 원리가 천지와 사람을 하나로 꿰뚫는 작동 원리
즉 카르마이자 법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실이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므로
모든 수행은 하늘의 도인 성실을
내가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성실함을 통해 명철해지는 것을 본성이라 한다.
명철함을 통해 성실해지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성실하면 명철해지고 명철하면 성실해진다.
배우고 깨닫는 일들이 모두 성실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중용은 강조합니다.
제가 보기에 카르마 요가를 이토록 강렬하게 표현한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역린>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바람에 유명하게 된 23절을
영화에 나온 대사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교가 바탕이 된 문화를 누리면서도
삼강오류를 넘어서 사서삼경의 제목만 들어본 경우가 많은데
영화에 나오는 대사 덕분에
중용이라는 경서의 핵심 수행론이 널리 전해졌으니
참 진기하고도 재미있는 경우입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의 카르마 요가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히 성인이 되기 위한 수행
즉 깨닫기 위한 공부입니다.
유교가 정치학이자 윤리학으로 사람들을
사회 체제로 포섭해 이끌어온 것이 수천 년이라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을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지만
중용에서 그것은 명백하게 깨달음 공부가 됩니다.
“成이란 天道이며
성하고자 하는 것은 人道이니
힘쓰지 않아도 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연히 도에 맞는 자는 성인이며
성하려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지키는 자이다.”
깨달은 이의 경지로서의 성은
선악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사라진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천명에 해당하는 성리를 체현하는 방법론이 바로
정성인 셈입니다.
흔히 카르마 요가라고 하면
우리말로는 [업 수행]이라고 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괴로운 운명을 삭이며
참아내는 행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카르마 요가의 여러 의미 중 그것도 있습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일어날 일에 대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카르마 요가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행위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유교 중에서도 중용은
그것을 [정성]이라고 말합니다.
행위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마음은
그것이 지극한 하늘의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함에서 우리는
중용의 정성이 단순한 노력의 자세가 아니라
연기적 세계와 우주적 질서에 대한
냉철한 이해이자 수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미처 그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유교적 덕목들은
어쩌면 고리타분하고, 어쩌면 친근하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혜롭게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카르마 요가라는 틀을 통해 옥석을 가려내
훌륭한 깨달음 공부의 수행법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능구能久라는 단어의 久는
지속을 의미한다
3개월만 꾸준히 하면
본질이 바뀐다.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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