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깨어있는 나

Buddhastudy 2024. 12. 5. 19:18

 

 

출가자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귀가 솔깃합니다.

재가자 입장에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까요?

뭔가 한마디라도 얻어듣고 배우려는 탐구심일까요?

 

아무래도 겉모양과 분위기가 다르면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인가 이런 일화들이 가끔 생기고 전해집니다.

 

1970년대 후반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던 30대의 판사 3명이

인근의 통도사를 구경하러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는

당대의 선승이던 경봉 스님이 계셨고

판사 3명은 경봉선사를 한번 뵙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죠.

 

마침 경봉 스님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극락암측에서는 판사들이 면회 신청을 하니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노선사와 젊은 판사들이 마주 앉았습니다.

 

경봉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희들은 부산지법에서 왔습니다하고

판사 중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판사들은 인삿말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경봉 스님은 인사치레고 뭐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승이 재가자를

그것도 특별히 면담 신청을 해서 만나는데

차나 한 잔 하시게할 줄 알았나 봐요.

부산지법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경봉스님은 그 자리에서 방바닥에 누워버렸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10분이 지나도 침묵이요, 20분이 지나도 미동이 없으니

판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신문 칼럼에 있던 이 글을 보면

대충 상황이 그려지면서

판사들의 상태가 들어옵니다.

 

아마 선불교에 대한 이해나 경봉 스님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면담까지 신청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진지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출가자나 재가자를 가릴 것 없이

선승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닥쳐오는 상황이죠.

선 공부의 기본 형식만 이해하고 있다면

, 문답 시험이 떴구나하고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여기서 스님이 기분이 안 좋으신가? 몸이 많이 아프신가?” 하는 건

수능시험 교실에 못 들어온 겁니다.

 

잘못 대답한 것 같이 되어버렸고

스님은 들어누웠습니다.

형식적인 문제라면 바로 잡으면 될 일이고

내용이 문제라면 복귀해서 교훈을 찾으면 될 일입니다.

 

우선 그것이 선의 형식인 줄 몰랐으면

한 방 더 맞을 각오를 하고 물으면 됩니다.

 

만약 세 분의 판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것이 선문답이라는 걸 늦게나마 알아차렸다면

경봉 스님이 드러누운 것에 대해 한마디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저희가 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물어보신 듯하니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형식도 눈치를 못 채면

물어볼 방법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초심자들을 위해

선공부의 형식을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저 장면을 노 스님의 기행 정도로 여기면

아직 선 공부할 계기가 마련되지 않은 것이고

이 동영상을 보기까지 하면서도

영 뭔 말인지 모르면

처음부터 다시 복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말을 해야 드러누웠던 경봉 스님이 다시 앉기라도 할까요?

바윗돌이 넘어졌으니 일으키기가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가는 것이 따로 없는지라 잘못된 질문이어서

그냥 사는 곳을 말씀드렸는데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이름난 노 스님

어렵게 성사된 면회

판사라는 사회적 지위

인간적으로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생각의 벽을 쌓고 그 벽을 뚫고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곁에서 같이 들어눕든, 절을 하든

소리를 지르든, 방문을 열든

노 선사는 아마 꿈쩍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해합니다.

제가 선문답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시절에

도반들과의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했는데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선배가 있었습니다.

 

점심때에 모인 우리가 저녁에서야 들른 이 분을 만났는데

같이 타고 가던 차 안에서 갑자기 묻는 겁니다.

그래 너는 어디서 왔냐?”

. 봉천동에 삽니다.”

여기 온 놈은 누구냐?”

저는 우리끼리 쓰던 닉네임 법령을 모르는 줄 알고 섭섭하다는 듯

저는 형님 아이디를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송장이 말은 잘 주절주절거리는구만.

그 형님도 자리에 기대 드러누웠습니다.

 

저는 그런 황당한 질문을 처음 들어본지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나중에서야 선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기 위해 그 선배가

전혀 감도 없는 저에게 질문을 한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정도면 형식 밖과 안의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선공부의 형식을 이해하고 친숙해지는 모의고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형식을 알았으면, 그리고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나 도반이 있으면

그렇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성답을 화두로 삼아 집중할 수도 있고

여럿이 있을 때는 서로 깨어있어

돈오의 기회를 엿봐야 합니다.

 

수행자는 겸허하고 부지런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그 기초가 없으면 기회도 없습니다.

 

한 제자가 병환이 나서 누워 있는 스승에게

문병을 가서 물었다.

세상에 안 아픈 사람도 있습니까?”

물론 있지

어떤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람입니까?”

아이고 나 아파 죽겠네.”

스님

 

선공부를 말 주변의 문제이거나

상대에게 덤벼드는 기싸움의 술수로 여기는

짝퉁 상사선을 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새나갑니다.

에고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모든 상황을 매우 불편하게 여기고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에고의 본성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우왕좌왕 수습하려는 에고를

깨어서 바라보고, 수습을 포기하고, 똑바로 쳐다봐야 합니다.

이것 역시 선문답 형식의 범주입니다.

 

선문답을 위해서는 여기까지

즉 깨어있어 도망가지 않는 내가 꼭 필요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을 엄살 비명으로 알려주는 스님 앞에서

깨어있다면 늦게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단 놓쳤더라도 힘을 얻게 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명쾌한 대답입니다.”

 

그렇습니다.

누운 사람을 일으키는 방법은 의외로 쉽습니다.

 

혜봉 스님이 어느 날 만공 스님을 찾아와서

문 안에까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세 번 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만공스님은 광에 누워 있는 자세로 이 소리를 듣고

역시 세 번 곡성을 내어 회답하였다.

 

그러자 혜봉 스님이 방에 들어와

하하하고 크게 웃으니

스님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세 번 쳤다.

 

사흘씩 걸리지 않고도

박수 3번으로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