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기독교적 실천, 헌신 수행

Buddhastudy 2024. 12. 9. 20:01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소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박티 요가란

신에 대한 헌신하는 수행법을 의미하는 힌두교 용어입니다.

 

힌두교 용어를 가지고

왜 기독교 수행을 이야기하려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기독교의 전체적인 교의가

박해라고 할 수도 없고

분명 카르마 요가나 즈나나 요가의 요소도 많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은 카르마 요가에 해당하고,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지혜수행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다만 절대적인 신을 상정하는 종교에서

신을 향한 순복과 헌신은

다른 전통에 비해 특징적이므로

박티, 헌신 수행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전통은

기독교를 비롯한 유일신 신앙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례는

가장 극명한 박해의 사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유명한 바로 이 한마디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사실 기독교를 비롯한 유일신 신앙은

수행을 통한 인간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의 은총이나 구원은 명확하지만

사람이 뭔가를 해서 뭔가를 이루는 것은

특별하게 제시되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대표되는 행위적 덕목들로 보자면

수행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전통이

기독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수도원, 기도원 같은 신앙 행위의 소산들이 매우 분명하고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생각과

실행해야 할 행동의 지침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의 지침이라고 볼 수 있다면

수행이라고 불러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주 간명하고도 뚜렷하게

수행 체계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적 박티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은 주로 예수의 탄생과 행적,

그 뒤를 이은 사도들의 행적과 서신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몇 가지 교설과 명령을 제외하면

모두 서사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 사이에 간간이 수행의 지침이 될 만한 것들을 지목할 수는 있지만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교회가 정리한 내용을 보는 것이

성경을 직접 읽는 것보다 쉬울 정도로

경전 자체가 주는 선명함은 덜합니다.

 

그 핵심을 추려보면

크게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첫째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오

둘째는

이것이니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요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해석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져올 비밀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바로 앞에

더 가까이는 내 안에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행위는

바깥으로 신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내 안에 이미 임재한 하늘나라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시한 유일한 수행법입니다.

 

첫째 계명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둘째 계명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당연히 첫째 계명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내 인격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사랑을 강조하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이 쓴 편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는 우리 수준에서 사랑을 연상하지만

분명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을 유식학의 표현으로 되돌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분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남이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상태를 지칭하는

그 이름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임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는 헌신의 수행입니다.

 

헌신이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는 유치한 교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

우리들의 가여운 몸과 생각과 재물을 바라겠습니까?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직접 들어가라는 실천 요강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령을 따르라는 지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내 안에 있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

곧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예수는 직접 성령의 출처를 언급합니다.

 

하늘나라로 지칭되는 것은

나라가 아닙니다.

Government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스림, 통치이기도 합니다.

즉 성령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그 나라를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이며,

내가 사라진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박티, 헌신 수행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교회에 나가서 봉사활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살라는 것이지

내 몸을 누군가에게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선택할 것인지, 에고를 선택할 것인지를

모든 순간의 기준으로 놓으라는 의미이지

헌신 행위를 통해

구원이라는 결과를 기획하는 계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의 많은 내용은

헌신에 대한 오해로 오염돼 있는데

그것은 정치 조직으로서의 종교가 가져오는

아주 일반적인 사례에 해당합니다.

 

세상에 있는 어느 종교도

그런 경험을 역사적으로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조주의, 한편으로는 세속화와 부패를

모든 종교들이 경험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가르침 자체가 간결하다 보니

몇 번의 왜곡만으로도 본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이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는 깨달음 종교가 아닙니다.

아주 특수한 분파에서는

일부 하나님이 되어가는 길을 천명하고

헌신 수행을 관상 수행과 통합하기는 합니다만

기독교의 주류는

수행을 통한 변화에 초점을 둘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의 아들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적 수준의 교리와

죄를 대신 지고 사함을 받았다는 대속 신앙에 멈춰서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수행법을 정리하면서 종교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전통에서 명확하게 제시한 공부법을 알아야 한다면

현실적 종교의 한계도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통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현실의 기독교 교리가 제시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적 종교가 아닌 깨달음의 텍스트로 출연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기독교적 헌신 수행의 요체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의 우선에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그 나라를 찾으라는 성령의 뜻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알려주는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비밀을 통해

헌신 수행, 박티 요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그 나라의 후순위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은 하나님 안에 거해

나를 완전히 지우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보다 더 지극한 헌신을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