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Pleia]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인가? [뇌과학 실험으로 증명?]

Buddhastudy 2024. 8. 21. 20:01

 

 

자유의지란

인간으로서 삶을 사는 데 있어

스스로 의지를 내어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반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운명론혹은 숙명론결정론이 있습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

가야 할 길은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다는 이론이고,

결정론은 모든 것은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에 따라

현재의 상황이 결정된다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둘 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나

이것은 아주 제한된 인간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며

통찰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영혼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의식이 있습니다./

 

육체라는 의식에 집중하기 이전

즉 태어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영혼으로서

삶에 대해서 어떤 테마를 연구해 볼 것인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선택은 영혼으로서 가지는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 육체적 의식으로 집중하게 되면서

다시 말해 태어난 후로 내가 영혼의 차원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을 모두 잊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물질계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이기에

이 망각 역시 자유의지로 인해

스스로 선택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된 테마는 현재 제한되고

망각한 육체적 의식인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숙명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적 의식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험하는 태도와 방법은 자유이며

이것은 지금 내가 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학교에서 열리는 글짓기 대회에 비교를 해볼까요?

교실마다 각각 다른 글의 주제가 있고

우리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자유롭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테마를 결정하여

해당 교실에 입장할 수 있다고 가정을 해봅니다.

 

그러나 교실에 한 번 입장을 하게 되면

그 테마를 바꿀 수 없고

반드시 그 테마를 제목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 글을 쓸지는 나의 자유입니다.

산문이든, 시든, 소설이든,

어떠한 형식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지만

그 테마에 맞춰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테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내가 미리 정해둔 테마이지만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겪을 것인가

그리고 그 결론은 결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주제를 정할 때

촘촘하고 디테일하게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맥락에서 상당히 느슨한 상태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글짓기를 해야 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어떤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동굴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여기서 노래를 부르며 갈지, 뛰면서 갈지, 잠을 자고 나갈지 등등은

나의 자유의지라는 것이죠.

 

물론 신의 구조인 평행현실에는

이미 모든 것이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평행현실의 경우의 수는 무한히 있습니다.

평행현실은 신의 구조를 말하는 것일 뿐

한계, 한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평행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와 바둑을 둔다 할 때

어떤 경로로 어떤 형태로 두게 될지

그 경우의 수는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대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테마를 대하는 방법까지 전부 정해져 있다면

그 수많은 평행현실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길로만 정하기엔

신은 너무도 웅대하고 큰 존재입니다.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신은 수많은 버전의 평행현실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말하지 않는 이유는

관객들은 그 무대가 생기기까지의 과정과 감독, 배우들의 역할,

즉 연극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정해진 각본조차 없습니다.

육체적 의식만을 나로 보는 분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시각을 넓히게 되면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인생 테마를

전환된 의식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심리학자 리벳의 뇌 과학 실험으로

우리의 의지를 뇌가 수 초 전에 먼저 알고 결정한다고 하여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결론에 힘을 실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우리의 의식을 수신하고 반영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창조해 내는 기관이 아닙니다.

의지뿐만이 아니라 10초 후에 보게 될 사진도

이미 사진을 보기 7초 전에 뇌는 알고 있다는 실험도 있습니다.

 

육체적 자아가 경험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차적 딜레이가 있기에

우리는 아주 미미하게 과거에 살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상위자아나 나의 의식으로부터 오는 정보나 의지를

뇌가 수신하고 육체적 자아가 인식하는 메커니즘에서 오는

시차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 시차는 3차원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3차원적인 현상에서 본질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유물론적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뇌의 현상만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는 건

통찰에서 나온다 할 수 없습니다.

 

의식과 뇌의 협업으로 3차원의 경험이 가능해지게 되는 우리, 육체적 자아는

상위자아와 함께 한 팀이자 완전한 인격체이며

결코 몸과 뇌에 국한된 존재가 아닙니다.

 

한편으론 몸은 내가 아니다라며

제한적인 육체적 의식을 초월하거나 부정하여

더 큰 의식만을 나로 인정하려 들면서

다른 편으론 그 큰 의식의 작용을 배제하고

육체적 의식에만 갇힌 시각으로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둘 다 분리라는 관념에 의한 것이며

현상에 가려 실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나와 신성이 나는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 다른 관점, 다른 시각일 뿐

온전히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