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1952.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Buddhastudy 2023. 10. 16. 19:48

 

 

왜 세상은 하나가 살려면 하나가 죽어야 하지?’ 하는 문제의식이

결국 출가 동기가 되었는데요

나중에 깨달으신 연기법을 통해

그 의문이 어떻게 풀렸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런 약육강식을 합리화해 왔습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죽이는 것은 정당한 거다.

 

기독교 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해서

인간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관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인간의 권리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죽이고, 먹고 하는 거를 정당화한다.

 

그 당시에는 브라만이

노예 계층을 죽이고 지배하는 것,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

이런 것이 일상화, 합리화돼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관심이

약자를 어떻게 보호할 거냐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그 경쟁과 투쟁에서 승리할 거냐

이런 관점에 대부분 서 있었고

그 승리를 성공이라고 하는 이런 관점에 서 있었다.

 

부처님이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문제의식을 가졌다 하는 것은

한 소년으로서 왜 하나가 살려면 하나가 죽어야 할까?

그 새만 얘기 나오는 게 아니고

거기에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농부의 비참함이 바로 왕궁의 풍요함에 기반하고 있다, 하는 거고요.

두 번째, 그 농부의 편리함이 소의 고통 속에 있다, 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새의 삶이 본래의 죽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고

하나가 편리하기 위해서 하나가 고통스러워야 하고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불행해야 한다

하나가 부자로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이 빈곤해야 한다 하는

이 세 가지입니다.

 

그래서 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게 이제 문제의식이었다.

이렇게 보고요.

 

사문유관(부처님이 사문(四門)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를 체험한 일화)

다 그런 당시에 지배 질서 속에서

피지배계급도 다 노예를 하든, 오늘날 노동자를 하든, 농로를 하든

다 젊어서는 건강하면 다 밥 먹고 다 살지 않습니까?

잘 먹냐 못 먹냐의 차이만 있지.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늙거나 병들면 어떠냐?

노예라는 것은

병들면 갖다 버려버리고, 늙으면 갖다 버려버리고, 죽으면 그냥 갖다 버려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고통이죠.

 

그러니까 그러한 당시 사회의 약자층이 고통받는 것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합리화하는 그러한 것이

어릴 때의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으로 표현해질 수도 있고

또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직접 문제의식을 가졌을 수도 있고

그건 우리가 지금 확인할 수는 없죠.

 

어쨌든 이 부처님 일생이라는 이 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

현재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이것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이

정당화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일단 요점이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이제 부처님이 연기적 세계를 깨달았다.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연적으로 자연 생태계에서 먹고 먹히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것을 적자생존이니 뭐 약육강식이니 하는 그런 관점을 본 거는

개체가 개별적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근데 연기된 존재, 서로 연관된 존재라고 할 때는

존재를 그렇게 볼 수가 없다는 거죠.

 

예를 들면

하나의 생태 연못에 개구리가 살고 있는데

개구리의 먹이는 연못에 있는 물벌레예요.

개구리의 천적은 뱀이에요.

연못에 물벌레는 무한히 많아.

그런데 개구리의 큰 문제는 뱀이에요, .

뱀만 없다면 개구리는 번영을 고가할 수가 있다, 이거야.

뱀 때문에 개구리는 일정한 이상 번식을 못하고 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그래서 만약에 개구리가 사람한테 요청해서

도와달라고 해서 뱀을 다 잡아버려라.

그래서 개구리의 소원이 떨어졌다고 할 때

그러면 생태연못에 뱀이 사라지면

개구리는 급속도로 번성이 시작이 된다.

그것이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개구리에게 있어서는 천국일 겁니다.

 

그러나 개구리의 개체 수가 늘어나면

그 연못 속에 있는 물벌레는

개구리의 수가 적을 때는 무한 자원이었는데

개체 수가 늘어남으로써 유한자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체수가 점점 줄어서

어느 날 개구리가 먹을 것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개구리가 몰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것을 이 전체, 연기적으로 볼 때는

결국은 개구리가 생존에 있어서 필요한 거는

물벌레만 아니고, 뱀도 필요하다는 거예요.

뱀이 있으므로 해서 개구리의 개체 수가 일정하게 조정이 되고

개체 수가 일정하게 조정이 됨으로써

개구리는 지속 가능한 번식이 유지될 수가 있다.

이것이 오늘 말하는 연기적인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적자생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육강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연기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자연 생태계에 대해서는

그다음에 고뇌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연기법을 알면서.

 

동시에 연기법을 알면서 인간 세상에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과

브라만이 또는 왕이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동일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생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왕이라고 하는 존재가 종자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관념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의 우월성은 그 어디에도 없고

노예의 열등성도 그 어디에도 없고

다만 그렇게 정신적으로 세뇌된 것밖에 아니다.

라고 하는, 양반인이 상놈이라 하는 것이

다 형성되어진 존재다.

 

이걸 자각했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의 차별을 부처님께서는 뛰어넘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왕자지만은

왕족으로서의 어떤 기득권도 행사하지 않고 버리셨다 이거예요.

 

그래서 높은 계급이라는 데 대한 특별한 예우도 하지 않고

낮은 계급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차별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삶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고

사람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셨다.

 

여기서 자연 생태계에 대해서와 인간 세계를 동일하게 보는데

자연 생태계는 생태적인 연관 속에 있는 거고

인간의 이러한 지배 질서는 인위적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허상이었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그 허상을 깨뜨렸기 때문에

붓다는 그런 인간 세상의 그런 허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왕이 권력을 행사하거나 한, 그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천민들의 그런 사람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는

그런 소위 당당하되 겸손한 삶을 살아가셨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법을 깨달음으로 해서

고뇌가 사라졌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연결해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거든요.

 

왕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거를

저 숫염소를 봐라. 여러 암염소를 데리고 살지 않느냐?”

이렇게 비유를 한단 말이야.

 

그럼, 반대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살면

저 여왕벌을 봐라이렇게 말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자연을 들먹거리는 거지

그것은 자연 생태계의 존재 원리고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한 것이지

그것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연적인 거는 개가 암캐하고 수캐가 있을 때

수캐가 암캐를, 암캐가 수캐를 차별한다.

열등하다고 차별하는 거는 자연 생태계 없지 않습니까?

 

근데 사람은 남자가 여자를 차별하잖아요.

개가 친구를 사귈 때

색깔이 까만 개도 있고, 하얀 개도 있고, 노란 개도 있는데

그 털 색깔로 차별하지 않지 않습니까?

근데 사람은 피부 빛깔로 차별하지 않습니까?

이거는 자연적이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고통이 왜곡된, 자연스럽지 못한 이 왜곡된

허위의식으로 인해서 인간이 괴로워하고 있다.

이런 얘기예요.

 

그 허위의식을 깨뜨림으로써

붓다는 이러한 잘났니 못났니, 잘했니 못했니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붓다가 어떤 자연생태적인 무슨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건 아니에요.

칼로 찔러도 안 아프다든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다든지

그런 얘기는 아니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스트레스, 두려움

이런 거는 없어졌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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