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진짜 세상일까? |뇌과학자가 본 에고의 진실게임

Buddhastudy 2024. 5. 6. 20:19

 

 

마음을 통제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

우리의 노력은 항상 정반대의 결과만을 불러온다.

모든 것을 범주화, 관념화, 사물화, 양극화하는

좌뇌의 정보 처리 방식 때문이다.

 

당신은 숫자 3을 떠올리지 마세요라는 글을 읽고서

숫자 3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생각으로 다른 생각을 없앤다는 발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이 머릿속의 시스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심리학계의 중요한 발견들과 생각실험, 지각실험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관한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오늘은 인지심리학자가 본, 에고의 진실게임

<하마터면 깨달을 뻔>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에고적 마음에서 벗어나는 방법?

 

우리는 흔히 좌뇌는 논리적이고 우뇌는 창조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논리적 사고를 하든, 창조적 사고를 하든

좌우뇌가 늘 함께 관여하는 듯하다.

 

저자는 좌뇌가 주도하여 에고라는 의식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고란 게 원래 그렇듯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할 때만 존재한다.

 

우리가 종일, 에고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 말썽을 일으키고는

그 진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고민하는 딱 그만큼만 에고이다.

에고 의식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꺼져 있고

오직 우쭐할 일이 있거나 불평거리가 있을 때만 연결되어 활동한다.

 

독일의 철학자 에크하르트는

에고적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의식을 두라.

, 마음이 지어낸 허구에 불과한

과거와 미래로부터 의식을 거두어들이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의식을 붙잡아 두라는 것이다.

 

이것은 꽤 강력한 방법이긴 하지만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개선하려면 반드시 과거와 미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마음 주위의 빈 공간을 알아차려라.

이것은 생각의 내용에 동일시되어 매몰되지 말고

생각 자체를 지켜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머릿속의 목소리가 되지 말고

목소리를 주시하는 자가 되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식 탐구의 새로운 경향이

이제 수백만의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하지만 앨런 와츠는

에고를 지켜보는 바로 그것도

역시 또 다른 에고에 불과하다고 했다.

 

 

--좌뇌라는 해석장치

아슬아슬하게 접촉 사고를 피했을 때

사람들은 왜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일까?

 

사고가 날 뻔했다는 것은

신경계의 흥분을 일으키는 상황이고

그 공포는 순식간에 분노로 해석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저 해석기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해석기가 되어 있는 동안은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한다.

그들은 화가 나고 짜증 나고 두려움에 떨든 간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과연 그런 식으로밖에는 될 수 없는가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좌뇌라는 해석기는 항상 켜져 있다.

그것을 끌 수는 없지만

그 존재가 한 번만이라도 알아차려지면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해석기는 자기 자신조차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

에고적 자아를 창조해 낸다.

좌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고

나와 나 아닌 것들을 가를 뿐만 아니라

에고적 마음 안에도 무수한 분열을 일으켜서

내적 갈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한다.

 

좌뇌는 본연의 기능이 분별하는 것이기에

밖으로도 안으로도 분열을 일으킨다.

그러니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그냥 놔둬야 한다.

 

그보다는 당신이 왜 에고를 초월하고자 하는지

그런 마음을 일으킨 것이 바로

에고가 아닌지를 살펴보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에고적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에고의 인지 기능은

경쟁과 유전적 생존을 위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에고의 분별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혹시 스스로 바보 같다고 느끼거나

너무 창피했던 경험이 있는가?

당신의 자아인식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때

당신은 재빨리 동일시의 대상을 바꾸고 재해석에 돌입한다.

특히 영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 경우가 가장 흥미롭다.

 

에고라는 건 어차피 허상이므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더 영적인 존재로서 그들보다 위에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에고를 취하는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스스로 자신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교묘함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여전히 똑같은 에고일 뿐이다.

 

뛰어넘었다는 것 자체가

결국 또 다른 분별이지 않은가.

 

패턴 인식기는 패턴을 초월할 수 없고

당신은 당신의 에고를 초월할 수 없다.

당신이 창조되는 자리가

바로 그것의 눈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와 패턴 인식기가 꺼지면

그 절대고요 안에서, 패턴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관념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절대고요 안에서, 모든 패턴은 시간을 초월하고

의식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된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흔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사건을 발생시키는가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에서 말하는 이해는 그것이 외부 세계로 향한 것이든,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든 간에

거의 언제나 해석기를 통해서 세상을 분류해서 바라보는 작업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서로 다르고 독립적이고 고립되어 있다는 관점이므로

사실상 에고와 동일한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모종의 비감각적 의식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프린지라고 불렀다.

 

프린지는, 어떤 모호한 앎의 느낌으로써

거기에는 직접적인 감각이나 인식 가능한 내용물이 없다.

 

만약 당신이 어떤 방에 들어갔을 때

단번에 그곳이 지내기의 근사한 곳임을 알게 됐다면

이때의 마음에 든다는 느낌이 바로 프린지이다.

 

이 프린지 의식이 흥미로운 이유는

거기에 명확한 감각적 내용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바로, 프린지 의식이고

바로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에 관한

우리의 근본적인 오해가 드러난다.

 

이해란, 외부 현실 속에 있는 뭔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과정이다.

다만 내적인 과정이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바깥에 있다고 확신할 뿐이다.

 

프린지는 공간에 관한 것이기에

감각은 직접적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의미는 어떤 감각과도 연관이 없다.

 

융은, ‘모든 불빛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에고적인 마음의 그림자가 바로, 프린지이다.

 

에고는 실체가 없지만

모든 인식된 패턴은 그 주변 공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해석하는 마음은 사물과 내용물에 제약되어 있지만

프린지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공간을 이용한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때도 말이다.

 

스티븐 호킹은

만약 우리가 완전한 이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몇몇 과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로써 우리가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할 때

언어와 이론과 감각적 경험과, 환원 가능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에고적 마음의 방식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우주를 지각하는 방식처럼

영혼도 과연 눈과 귀로서 지각할까?

 

현대 신경과학에는

오직 뇌만이 의식의 기계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그래서 의식은 영원히 두개골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믿음은 따로 떼어낸 뇌가

곧 진정한 우리 자신이라는 괴상한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알바노에는

의식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의 일부임을 지적했다.

의식은 결코 환경으로부터 떼어내거나 고립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뇌는 몸에 의존하고, 몸은 세상에 의존하고, 세상은 우주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가 아니라

공간이라는 텅 빈 배경과 하나로 얽혀 있는 존재이다.

 

분명 뇌와 의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최고의 기술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은 뇌 안에서 의식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의식이란 것이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뇌가 우주에서 알려진 것들 중 가장 복잡한 기계라고 할 때

그것은 의식을 하는 기계이지

의식을 소유하는 기계가 아니다.

 

의식이 머리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라.

 

멀리서 새 소리를 들을 때

당신의 의식은

실제로 거기에 가 있는 것이지

결코 두개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에고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영원할까?

겹겹의 층이 모두 벗겨지고 나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의식밖에는 없고

이 의식은 절대 개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주와 생명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감각에 의한 우리의 인식 행위 자체를

우주가 그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 낸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재미 삼아

여러 개의 모자를 바꿔가며 써보는 것처럼

우주도 그 자신을 새롭고 독특한 방법으로

인식해 보고자 한다는 뜻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막바지에서, 주인공 네오는

모든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

진정한 현실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여러 개의 방문과 전등이 달린 기다란 통로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깨달음 후에 그는

모든 것이 컴퓨터 코드임을

즉 실제하는 땅이 아니라 지도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우리의 내면과 바깥세상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가 보는 타인이 곧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이다.

좌뇌는 마음이 작업해 낸 것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외부로 즉 타인들에게 투사한다.

 

당신이 세상을 볼 때

실제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는

당신 안에 그 패턴 인식 메커니즘이

타인들 안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에고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오랫동안 외부에 관심을 두었다면

결국 당신은 내부로 관심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식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감각적 정보가 좌뇌 해석기를 통해 의식을 묶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좌뇌가 의식을 창조한다고 믿는다.

 

 

요점은 이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든

긍정적인 상황을 간직하고 싶어 하든 간에

에고적 생각으로서의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라는 흥미로운 대안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곧 에고가 환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불안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애초에 회전목마 대신 롤러코스터를 선택한 것은

하나하나의 우리 자신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다음번에 당신의 좌뇌가 만들어 낸

정신적인 분열의 한쪽 극단에 서서

예민해지고, 불안해하고

더 이상 그런 느낌을 견딜 수가 없어서

절망적으로 몸부림치게 된다면

기억하라.

당신은 지금 최고로 아름답고 정교한 방법으로 게임을 하는 중임을.

그리고 당신 없이 이 게임은 성립될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