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64회 법륜스님의 수행법

Buddhastudy 2013. 4. 18. 22:14

출처 YouTube

 

난 아무 과정도 특별히 거친 게 없습니다. 중학교 때 절에 들어와서 스님 말 듣고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에 입문한 건 중학교 3학년 때 했고요. 절에 중으로 들어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어왔고. 특별히 무슨 사연이 있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스님이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온 거요. 그러고 난 동국대를 간 것도 아니고, 선방을 간 것도 아니고, 강원을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살았어요. 감옥도 두 번 갔고. 학원선생도 했고, 연탄장수도 했고, 구두닦이도 했고.

 

그런데 나의 관심은 이래요. 왜 그럴까? 어떤 일을 볼 때 늘 그렇게 내가 어릴 때 늘 그 우주의 이치나 사물의 이치를 궁금해 하고 연구하듯이. 이제 불교에 들어와서는 인생의 이치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는데. 경을 읽어도 왜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 사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 이래서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왜 화가 날까? 화를 벌컥 냈을 때 왜 화가 날까? 그 사람이 그러는데 왜 내가 화가 날까? 왜 내가 괴로울까? 왜 내가 두려워할까? 어두운 밤에 나가면 두렵잖아 그죠? 두려움이 어두움에 있는 걸까? 두려움이 공동묘지 안에 있는 걸까? 왜 공동묘지에 들어가면 두려울까? 거 왜 그럴까? 분명히 여기 현상이 일어났잖아, 그죠? 이 현상이 왜 일어날까? 왜 밤에서 어두운 길에 머리가 쭈삣 할까? 다시 가보자. 아까는 쭈삣 했는데 왜 이제는 괜찮지? 왜 그럴까? 이게 어두움에서 오는 걸까공동묘지에서 오는 걸까? 이게 산모퉁이에서 오는 걸까?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

 

어떤 불신의 의심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의문. “~ 이게 이래서 이런 거구나.” 경전을 뒤지니까 ~ 내가 체험한 것이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구나.” 이유를 몰랐는데 아~ 그렇구나. 또 내가 반대로 경을 읽고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경을 해보면서 어때요? “~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구나.” 그래서 나에게는 절하는 것도 수행이고, 화내는 것도 수행이고, 밥하는 것도 수행이고,

 

밥도 딱 해보면요. 죽밥이 됐다가 설익었다가 몇 번 해보면 아이디어가 생기거든요. 아시겠어요? 햅쌀을 갖고 할 때는 오래 담그면 안 되요. ? 10분쯤 담가놨다가 밥을 해야 밥이 제일 맛있어. 묵은 쌀은 한 30분에서 한 시간쯤 담가 놔야 돼. 햅쌀은 물을 조금 적게 부어야 되고 묵은 쌀은 많이 부어야 되고. 물에 담가놓은 쌀은 적게 부어야 돼. 안그런건 많이 부어야 되고. 처음에 불을 강하게 했다가 파바파박 끓을 때 불을 줄여가지고 오래 작게 했다가 따따따따 소리가 날 때 해보면 어떨 때 조금 더 세겠다. 어떤 때는 조금 적게 됐다. 밑에가 노루끼리 하게 누를 때 밥맛이 제일 좋아. 밥을 잘하면 맨밥만 먹어도 입에 착착착착 달라붙는 게 반찬이 별로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밥할 줄 모르는 것들 밥해 놓은 거 보면 맛이 아니야. 연탄불도 몇 번 갈아보면 유난히 툭 꺼져버려. 유난히 붙어. 연탄불을 갈아놓고는 뚜껑을 열어놔야 불이 붙잖아. 그런데 연탄이 불이 거의 다 돼가 늦었어. 갈아 넣기는 늦었어. 불이 조금 밖에 안 남았어. 그때 연탄을 갈면 불문을 열면 그때 푹 꺼져버려요. 거 참 이상하다. 그럴 땐 오히려 불문을 거의 조금 열어놓고 막아놓듯이 연탄을 얻어놔야 그래야 불이 올라와 붙어. 나는 공부를 그렇게 했어.

 

남이 무다 하니까 나는 무다. 화두는 든다 그러는데 안 들어져. 왜 안 들어 질까? 무라는 의미가 뭘까? 왜 문자 화두가 생겼을까? 옛날 경전을 뒤져봤어. ~ 이래서 의심이 들구나. 잡지를 봐도 공부거리. 신문을 봐도 공부거리. TV를 봐도 공부거리. 벌거벗은 여자 몸을 봐도 공부거리. 다 공부거리요. 내가 잘해도 공부거리. 내가 못해도 공부거리. 그 일체 다 뭔가 원리가 있다 이거야. 잘했을 때는 잘했을 원리가 있고 못했을 때는 못했을 원리가 있고. 계획을 먼저 세우고, 그 다음에 수정을 하고, 체험을 해 보면서 수정을 하고.

 

인도에 살면 인도사람들을 연구하죠. No problem 이라 해 놓고. 분명히 된다 해 놓고 다음에 안 돼. 또 된다 해 놓고 다음에 안 돼. 성질이 나. 그러다가 왜 저그 끼린 저래 불러 쌀까? 거 이상하잖아. 그지? 맨날 거짓말 하면 저그끼리 어떻게 살겠어. 그래 생각해 보면 아 ~ No problem. 이 말이 문제없다. 꼭 할 수 있다. 이런 말이라고 나는 그렇게 인식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그 말을 쓸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냥 한 번 해 봐야 되겠다. 이런 의미구나. No problem. 내가 금방 알아. 그 말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죠. 못하겠다. 하는 것보단 듣기가 좋아요? 안 좋아요?

 

그러니까 내가 딱 보고 할 수 있는 일인지, 할 수 없는 일인지. 니가 무슨 말은 하든지. 내가 가가지고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짐작하고 뭐 문제없이 하겠다 해도 내가 보기에 안 되겠다 싶으면 그래 한 번 해 봐라.” 이렇게 딱 하지만은 내가 속으로는 니가 9월 달까지 한다 이래도 나는 속으로 12월 달까지 딱~ 계획을 잡으면 되요. 아시겠어요? 그래 9월 달에 못했다. “이 놈의 시끼 왜 못했어. 한다고 했잖아.” 이러지만은 내 속에서는 집착 안 해. 내 처음부터 못할줄알았기 때문에.

 

이거 언제까지 할래 임마. 그러면 10월 달까지, 그래도 10월 달 까지 못하니까 11월 달 까지 해라하면 11월 달 까지 못하거든요. 가가지고 11월 달까지 꼭해야 돼. . 11월 달 가면 또 못해놓거든. 그 말에 집착을 하면 사람이 속 뒤집어져. 그죠? ~ 살면서 으음 이렇구나. 이렇구나. 내가 딱 잡아놓고. 하면 되요. 10월 달까지 되면 다행이고. 내 예측이 안 맞으면 어때? 맞는 게 뭐 그리 중요해? 그러나 실수는 안 하죠. 몇 번 실수 했어요.

 

올해까지 다 한다 해가지고 준공식 하려고 사람을 억수로 데려갔는데 준비가 안됐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았어? 건물 짓고 준공식하고 나중에 지으면 된다는 거요. 내가 야 임마. 다 지었다가 준공식을 하는데. 덜 지었는데 뭣 때문에 준공식을 하냐?” 그래서 캔슬을 해 버리고. 이듬해 1년 있다가 하니까 준공식 충분히 할 수 있었죠. 그죠? 그런데 요번 케이스는 어떻게 됐느냐? 나도 저그 말 따라 했어요. 다 지어놨다 했는데 가보니 덜 지었어. 그런데 저그는 그래 놓고서 페인트칠하고, 천막 치고 준공식 하는 거요. 좋다. 나도 그랬어. 준공식 하고 난 뒤에 요새 계속 짓고 있어.

 

그러니까 그 사람들 말을 믿으면 문제가 아니라 틀렸다 할 것도 없어. 그런 방식으로 또 하니까. 그래도 또 문제가 없어요. 그거 뭐 다 지어놓고 준공식 하나. ** 또 그 사람들 말이 맞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해서 준공식을 1년 연기하고 그랬는데. 나도 조금 열려가지고 마 됐다 마. 하자.’ 이러고 준공식 하고. 내가 안 된다.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 덜 지어놓고 속여서 준공식 하는 게 아니라. 저희가 준공식 준비하니까 말 안 한다 이거야. 전에 같으면 안 돼이랬는데. ‘알아서 해라.’ 거 뭐 덜 고친 거 있으면 끝난 뒤에 고치면 돼지. 그래서 올 여름 내내 준공식 한 건물 내내 짓고 있잖아요.

 

이렇게 살면서 지혜가 생겨. 내 마누라하고 살면서 처음에는 모르고 싸우더라도 몇 번 살아보면서 아~ 성질이 어떻구나. 뭘 좋아하고, 뭐가 문제고, 이래가지고 깜량이 딱 잡히면 거기 맞춰서 살면 되잖아. 연구 안 하니까. 연구 안 한다는 말은 수행 안 하니까 갈등이 생긴다 이 말이오. 수행을 하면 몇 번 해 보면서 처음에는 몰라서 실수를 하지만은 한두 번 해 보면서 자꾸 이렇게 원리를 찾으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거요. 실수가 나쁜 게 아니오. 실수를 하므로 해서 계속 바른길을 찾아 나갈 수가 있다 이거야.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죠. 준비를 안 해서 실수를 하는 게 아니라, 준비를 해도 예측이 안 맞을 수가 있잖아.

 

그 길만 있냐? 이리저리 해도 안 되면 또 길이 있다? 무슨 길이?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길이 있다. 아시겠어요? 아이고 마. 이렇게 시간낭비 하느니 딴 일 하자. 포기해 버리는 길도 있다 이거야. 아이고 내 능력부족이다. 네가 문제다가 아니라 내 능력 부족이다. 니는 현재 내 수준으로는 안 되겠다. 미안하다. 하고 항복하고 나가버리면 돼.

 

어떤 과정을 거쳤냐?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시겠어요? 난 학교 가서도 배워 본 것도 없어요. 나는 공부했다 하면 책보고 신문보고, 난 지금도 예를 들면 내가 이슬람역사를 공부한다.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 할 여가가 어디 있어요? 원고도 산더미처럼 쌓여 교정도 못 보는데. 사건이 생기면 왜 어디서 저럴까?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개인이 저렇게 힘이 날까? 저 배경이 뭘까? 이런 생각이 들면 그럼 거기 다른 자료를 구해서 보면, ‘~ 배경이 사우디 아라비아 배경이 이렇고, 여기 나라 국경의 배경이 이렇고, 이렇구나.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오우~ 스님 이슬람 역사에 대해서 언제 그렇게 공부했습니까? 박사네요.” 이래. 박사는 무슨 박사요? 관심이 있으니까 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책을 한 권을 다 읽어도 잘 모르는 반면에 스님은 몇 장만 봐도 아는 거는 스님이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게 아니라. 나는 거기에 애절한 관심을 갖고 보기 때문에 몇 줄만 딱 읽어보면 대충 짐작이 돼. 그래서 내 영화관에 잘 안 가잖아. 앞에서 딱 시작하는 거 몇 개만 보면 과정이 보이고 결과가 딱 보이니까. 그냥 자잖아. 끝에 가서 맞나 안 맞나 보면 비슷해.

 

~ 이리 저리 시작하는 거 보니까. 그냥 끝나면 재미가 없잖아. 그죠? 중간에 반전이 있겠지. 그죠? 주인공은 늘 두드려 맞아야 되나? 안 두드려 맞아야 되나? 두드려 맞고 치고 죽을듯해도. 그래도 또 죽나? 안 죽나? 안 죽어야 돼. 그러다 줄거리가 살이 붙고 생기면 끝에 가서 어떻게 돼 있지. 그런데 요즘 나오는 영화는 재미없다고 끝에 가서 주인공을 죽이죠. 그죠? 저건 아~ 작가가 요새 주인공을 죽이는 각색이로구나. 어떤 사람은 지난번에 독일 갔더니 누가 쓴, 무슨 소설을 보고 거기 뭐 신들의 싸우는 그런 얘기 나오는 거 보고, 그게 진짜냐? 가짜냐? 나보고 물어.

 

제목이 뭐냐? 소설이래. 소설을 갖고 누가 진짜냐 가짜냐 얘기 하냐? 소설은 소설이지.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읽고 재미있으면 돼지. 읽지 말아야 됩니까? 읽어야 됩니까? 소설은 그냥 소설이에요. 읽으세요. 그것은 재미있으면 읽고 재미없으면 안 읽고. 그런 걸 갖고 진위를 논하는 게 아니지. 소설을 갖고 진짜 가짜를 논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TV연속극 보고 여러분들 요즘 역사 공부 하지. 그게 역사면 역사스페셜이지 왜 TV연속극이겠어. 그지? 재미있으라고 어때요 없는 것도 만들고, 그렇다고 완전히 가짜로 할 수는 없으니까. 대충의 줄거리만 해서 그 안에서는 전부 뭐 한다? 재미있으라고 그냥 끝나면 아무 재미가 없잖아. 사람이 안보잖아. 그러니까 거기가 온갖 걸 집어넣어 그리한다.

 

그러고 나중에 책보면 여러분들이 다 아이 책에 있는 내용하고 틀리던데요.” 틀리는 게 너무 당연하지. 책대로 하면 누가 보겠어. 아무도 안 보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아직도 많아. 참 순진해. 어이 보면 순진하고 어이 보면 어리석고. 그렇게 사시면 되요. 나는 그랬어요. 이게 옳다는 뜻이 아니라. 아시겠어요? 요새 참선 많이 하세요? 하고 싶으면 실컷 하세요. 다리가 오그라 비틀어지도록, 허리가 굳도록 한번 해봐요. 실컷 해 봐야 뭐가 없다? 후회가 없어.

 

술이 먹고 싶거든 코가 비뚤어지도록 먹어봐. 속이 뒤집어 지도록. 자제하지 말고. 그리고 그게 안 좋다 싶거든 두 번 쳐다보지 마라. 그냥 찔끔 찔끔 괴롭다 하면서 또 하고, 괴롭다 하면서 또 하고, 남편 나쁘다. 나쁜 거 하고 뭐 하러 사노? 이해가 안 돼. 발로 차버리지. 그래 모순이잖아. 아이고 제가 아직 좀 부족했어요. 지가 보족하니까 지가 앞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건 의미가 있지. 이미 나쁘다고 단정해 버렸는데 나쁜 거 하고 뭣 때문에 살아? 안 그래요? 바보지.

 

그러니까 이 말이나 생각에 늘 모순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모순인 줄 몰라. 그런 모순을 안고 아무리 앉아 있다고 해결이 안 되고, 아무리 절해도 해결이 안 돼요. 엎드려 절하면서 그 모순을 발견하고,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그 모순을 발견해야 돼. 아까 그래 괴롭더니 왜 가만 앉아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까? 앉아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그걸 가지고 그게 왜 그럴까? 그걸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뭐라고 한다? 이 뭐꼬가 되는 거요. 중국말로 하면 시삼마.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인생살이 다 연구하고 사세요. 그게 수행이다. 수행. 늘 수행하고 살아야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을 당해도 인생은 늘 좋은 일만 생긴다. 좋은 일이 밖에서부터 온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일이 세상 사람이 말하는 재앙이라는 것이 생겨도 나한테는 늘 좋은 공부거리. 새로운 걸 발견하는 계기. 나를 성숙하게 하는 소재가 된다. 세상 만물이 다 공부 소재요. 오나가나.

 

책 들고 따라 다닐 것 없이. 아주 내가 보기에 저놈의 시끼 미쳤다 하는 사람 만나면 큰 공부거리가 하나 생긴 거죠. 그지? 여태까지 만만한 거 갖고는 내 공부가 덜 되는데 내 공부가 안되고 넘어가기가 좀 어려워. 참 좋은 공부거리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것도 몰라서 내가 미쳐서 욕을 하고 했는데. 다시 자기를 떡 돌아보니까 일체유심조 이지. 내 문제지. ~ 큰 공부거리 하나 생겼구나. 저런 놈 하고도 잘 지내면 세상에 누구하고도 못 지내겠냐? 세상 누구하고도 다 지내는 공부를 다 안 지내보고 그 놈 한 놈하고 지내도 해결할 수 있는 계기잖아. 그죠?

 

내가 인도에서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사는 이유가 뭐에요? 여기서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 어디 가서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10년 정도 세월을 보낸다 해도 헛세월이 아니야. 여기서 되면 뭐 딱 그 모델로 밀어붙여 버리면 되는 거란 말이오. 그렇게 좀 사물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면서 연구를 하는 게 수행이다. 부부간에도 연구하세요. 애들도 연구하고. 세상사도 연구하고. 요새 보살님 모금하는데도 연구를 많이 해서 도가 트여가지고 잘하잖아.

 

모금할 때 남이 나를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못해요. 세상 사람들이 나한테 아무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길거리 서있는 전봇대 같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이 들면 모금이 잘 되요. 돈 내놔라 이렇게 하면 주고 안주는 건 누구 탓이다? 지 탓이다. 나는 그냥 뭐만 하면 된다? 내 놔라. 그런데 내가 상대가 주고 안주는 데 신경이 팔려가지고 그러면 내 마음이 조마조마한 거요. 저놈의 시끼가 줄까? 안줄까? 이런 생각이 드니까 말이 입에서 안 나오는 거요. 주고 안 주고는 그 사람 문제요. 나는 그냥 뭐라고 하면 된다? 내 놔라. 이렇게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힘도 안 들고. 그 사람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주고 편하니까 또 주고. 한 번 안주면 두 번 달라 그러고. 그러면 되죠.

 

이렇게 그 공부 속에서 그런 것 속에서도 공부가 된다 이거야. 상대가 욕을 하니까 내가 화가 난다. 그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지가 나한테 돈 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내 지금 바빠 길 가는데 돈 내 놔라 그러니까. 그것도 내 미워하는 놈 북한 놈 준다. 그러니까. 성질 나겠어? 안 나겠어? 나겠지. 아따 저 사람 성질 나겠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 사람 한 풀이 좀 들어주면 되잖아. 욕 실컷 해라.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넘어갈 수도 있고. 이렇게 무엇이든지 경험하면서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런 원리가 있단 말이오. 그럼 법륜스님 니는 다 되나? 나도 안 될 때가 있어. ? 나도 깜박해서 내 성질에 탁 사로잡히면 어때? 안 된단 말이오. 그렇게 해 나가시면 인생이 두려울 게 없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