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86회 진정한 불자의 길

Buddhastudy 2013. 5. 1. 22:27

출처: 불교TV

    

불교적인 삶이 뭘까? 그것은 불교관에 따라 다르다. 크게 분류를 하면 신앙으로서의 불교, 믿음으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믿음으로서의 불교,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에요. 거기서 진정한 불자의 길은 부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한 믿음이에요. 깊은 믿음. 신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두 번째 학문으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이론으로서의 불교, 논리로서의 불교. 이 불교는 올바른 이해가 가진 불교다. 여기서 진실한 불자라는 것은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 되요. 믿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해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때 진실한 불자라는 것은 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거요. 

 

세 번째 실천으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실천행으로서의 불교. 여기서 진실한 불자라는 것은 얼마나 부처님이 살아가신 삶과 같이 행하느냐 이게 중요하다.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거도 아니고, 얼마나 믿느냐가도 중요한 거도 아니고,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행하느냐가 중요해요. 가난한 사람이 있을 때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 병든이가 있을 때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 주위사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느냐? 그것이 검증기준이에요. 진실한 불자의. 백가지를 아는 것보다, 무얼 믿는 것보다도 그가 하는 행위를 보고 진실하다 안 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 체험으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수행으로서의 불교에요. 그가 뭘 믿느냐? 뭘 얼마나 아느냐? 바깥으로 어떤 활동을 하느냐? 이거 갖고 말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정말 얼마나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있느냐? 본인이 얼마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느냐? 자기가 그것이, 얼마나 체험이 되어 있느냐? 이거요. 체험이. 해탈과 열반이 얼마나 체험이 되어 있느냐? 

 

아무리 세상 사람을 위해서 도움을 주더라도, 괴로워하면서 하고 있으면, 이 관점에서는 수행이 안 된 거요.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알고, 바르게 알아도, 자신이 자기의 번뇌를 제어하지 못하고, 잠 못 들어 안다면 이거 수행이 안 된 거요. 부부간에 다투고 싸우고, 이래서 살기 힘들어 하면 이건 수행이 안 된 거요. 이건 진실한 불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진실한 불자라고 할 때 어떤 불교적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서 진실하다는 것의 기준이 다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불교라고 하지만은 그 불교는 이렇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만 있는게 아니라, 이제는 종파마다, 즉 대승의 입장에서 기준이 있고, 소승의 입장에서 기준이 있다. 선의 입장에 기준이 있고, 교의 입장에 기준이 있다. 종파마다 또 **종 입장에 화엄종입장에, 율종입장에, 또 기준이 있다. 비파사나를 행하는 남방불교의 입장에서 수행자가 화를 낸다하면 자기감정에 지금 깨어 있는 거요? 안 깨어 있는 거요? 안 깨어 있는 거죠, 그죠? 자기감정에 휘둘려 있잖아. 그죠? 그럼 이것은 알아차림을 놓친 거요.

 

그런데 선적입장에서는 그런 거는 좀 놓쳐도 중요 안하고, 어떤 말을 탁 던졌을 때, 거기에 막힘없이 직답으로 탁 나오느냐? 거기 번뇌가 일어나고 어리 버리 하느냐? 이게 기준이에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이 선승은 옆에서 살아보면 보통 화를 잘 내요? 안내요? 화를 잘 내. 큰소리도 막 치고. 집어던지기도 하고. 약간에 이것은 꼭 무사도 비슷한 게 개입이 되 있어. 그래서 중국에서 뭐도 있다? 소림사나 그런 거하고도 개입하고. 일본에서도 하는 거보면 사무라이 하고도 약간의, ~ 이런 경직된 태도가 있단 말이오.

 

그런데 남방 불교적 관점에서는 그런 게 전현 없는 거요. , 파워, 이런 거는 수행하곤 거리가 멀어.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선 힘, 파워. 그런 것을 굉장히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율종에서는 그 사람이 술을 한잔 먹었냐? 안 먹었냐? 말을 어떻게 했냐? 안했냐? 계율을 어겼냐 안 어겼나가 굉장히 중요한 거요. 마음이 어떻던, 행위가 어떻게 됐냐? 이게 중요하다 이거요.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계율을 어겼냐? 안 어겼냐? 이거 보다는 그가 큰 서원을 잊지 않고 있느냐? 이게 큰 기준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게 진실한 불교며 진실한 불자냐? 이렇게 말하기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던, 불교라고 이름을 가졌을 때, 그것이 어떻게 서로 다르더라도 불교라고 이름을 가진, 이 집단, 또는 이 부류의 최종 목표가 뭘까? 해탈이에요. 니르바나, 열반과 해탈이다. 니르바나라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해탈이라는 것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그러니까 진실한 불자라면 그러한 니르바나를, 그러한 해탈을 자기가 얼마만큼 체험하고 있느냐? 이게 기준이 돼야 된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또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인이라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 이것은 소대승을 막론하고, 불교가 갖는 가장 큰 공통점이오. 불교인이 행해야 할 기준이 뭐라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 첫째, 계율인데, 계율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분석이에요. 불교인이라면 적어도 도덕적 분석을 할 수 있어야 돼. 그 도덕적 분석이라는 것은, 도덕이라는 것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집단마다, 다르잖아 그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기준을 잡나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기준이 아니에요.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행위가, 말이나 행위가, 상대에게 손해를 주거나, 상대를 헤치거나,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는 행위가 있어요. 그런 행위는 하지 않는 거요. 남을 헤치거나, 즉 남을 죽이거나,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치거나,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성적으로 괴롭힘을 주거나, 괴롭히거나. 그리고 말로 거짓말 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속이거나, 안 그러면 술 먹고 마약에 취해서 비틀대거나, 이렇게 해서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거를 우리가 악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악, 악은 멈춰라. 타인에게 이로움과 즐거움과 타인에게 좋음을 주는 것. 이것은 행하라. 이것을 선이라 그래. 그래서 죽어가는 생명은 살려주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돕고. 상대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고, 진실을 말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정신을 맑게 가져라. 그러니까 이것이 계율이다. 여러분들이 불교신자라면 적어도 먼저 이게 행해져야 진실한 불자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이러한 언행, 말과 행위가 일어나는 뿌리가 있어. 그 뿌리는 마음이야. 마음에서 이 말고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말과 행위의 뿌리인 그 마음까지도 깨끗이 해야 된다. 이게 선정을 닦는 거요. 그래서 지악수선. 악은 멈추고, 선은 마땅히 행하고. 두 번째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마음을 고요히 하고. 즉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그 마음을 고요히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감정에,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 감정에 휘둘려서 격정적인 것은 불교에서 보면 진실한 불자가 아니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세 번째 이렇게 범행,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그 마음이 고요하면, 즉 삼매에 있으면 선정을 닦으면 이게 불교냐? 불교는 그것만 가지고는 불교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다른 요가나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한다 이거야. 세 번째 뭐냐? 지혜다. 사물의 이치를 깨쳐야 된다. 그것을 깨쳐서 뭐하느냐? 아까 얘기한데로 해탈과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을 닦는다.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한다. 이것이 불교인이 가야할 가장 기본 목표다. 이것이 공통적 관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