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193회 딸의 병

Buddhastudy 2012. 7. 2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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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때문에 기도해요?

자기가 절하는데 딸이 병이 어떻게 나아요? 어떤 원리로 낫겠어요? 그러니까 안 되는 짓을 하니까 머리가. 생각은 나았으면 해서 하기는 하지마는 자기 깊은 마음속에 이런다고 병이 낫나? 이런 게 무의식에 있으니까 망상밖에 떠오를 게 없지 뭐.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러지 뭐. 애가 병명도 없는 병을 앓고 있는데, 자기가 엎드려 절한다고 애가 병이 어떡해. 무슨 원리로? 나아지는 원리가 뭐~ 있어야 될 거 아니오. 누가? 부처님이 내려와서 낫게 해 준다.

 

그런데 애가 병이 났는데 부처님 낫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데 애가 병이 안 나으면 첫째 부처님에 대해서도 원망이 생길 거 아니야. 기도해 봐도 소용없다. 이렇게. 아니 아니 그러니까. 더 안타까울 거 아니야. 기도를 그렇게 하는 거 아니오. 애가 예를 들면 신체장애다. 여러 개다. 하더라도 지금 애가 죽는 거 하고 사는 거 하고 중에 자기는 어느 게 나아요? 사는 게 낫죠? 그러면 자기가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장애가 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아이 상태를 두고 내가 행복할 수가 있죠.

 

그런데 나아주세요.’라고 하면 안 나으면 내가 불행하지. 그런다고 호르몬이 분비되겠어? 이치에 안 맞게 하니까 그렇지. 이치에 안 맞게. 그러니까 그런 딸을 봐내는, 그러니까 예를 든다면 우리가 옛날에는 신체장애면 장애를 차별했잖아. 그죠. 요즘은 신체장애라도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호르몬이 분비 안 되도 존중하고, 피부빛깔이 검어도 존중하고, 여자라도 존중하고. 인간은 그 존재 그대로 존중하는 거 아니오. 그죠. 그걸 어떻게 바꾸어서 검은 피부를 희게 바꿔가지고 해결 하려는 거 아니오. 남자를 여자로 바꿔서 해결하는 게 아니고.

 

예를 든다면 신체구조가 요즘 뭐 정신적으로 남자 몸인데 여자 마음이 든 사람도 있잖아. 그죠? 이건 다 옛날에 사탄이 들었다고 했잖아. 귀신 들었다 그런다든지. 고치려고 그랬잖아. 요즘은 그대로 존중하잖아. 그런 상태로. 그도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것처럼 불편한 상태로, 불편할 뿐이지. 요대로 내 딸도 내 아들도 내 자식도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살 권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이한테 오히려 부처님께 감사하고, 아이한테도 이런 거 괜찮다. 이렇게 항상 내가 괜찮아야 아이도 괜찮지.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괜찮다고 기도를 해야 되지. 고쳐달라고 기도하면 안 괜찮다는 거 아니야. 부모부터 자식을 안 괜찮다 하니까 자식도 자기한테 자긍심이 없지. 기도를 잘못하고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부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해야 돼. ‘요만하기 다행입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뭐가 더 변화해야 감사한 게 아니고, 지금도 감사하다. 이거야. 그런데 감사한 마음을 내서 내가 내 아이를 보는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지. 아이를 고치려고 기도하는 거 아니오.

 

그런 마음과 교감이 될 때, 아이의 심리가 안정되기 때문에 병의 치유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지. 집에서 하든, 절에서 하든, 그건 아무 차이가 없는데, 복을 빌면 집에서 하면 안 될 거 같고 절에 가면 좀 빌어질 거 같은 기분이지. 그러니까 복 자체를 빌지 않는데 집에서 하든 절에서 하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딸이 이대로도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따로 다스릴 필요가 없잖아.

 

우리 딸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니까 마음 다스리는 법을 또 얘기하는 거 아니오. 우리 딸이 이대로 참 행복하다. 이대로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이 불안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근본적으로 접근을 해야지. 다시 말하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몸뚱이를 탓해야 되잖아. 몸뚱이는 아무 죄가 없어. 몸뚱이는 공이야 공. 자기가 일어나기 싫어서 못 일어나지.

 

그러니까 일어나기 싫어서 못 일어난다는 본질을 꿰뚫어야 선택이 딱 나잖아. 그러면 까르마를 따라서 과보를 받든지. 과보를 안 받으려면 까르마를 따르지 말든지. 이렇게 딱 해야 자기 행위를 어느 쪽으로 선택할 건지가 딱 나온단 말이야. 그런 것처럼 딸을 긍정적으로 봐버리면 마음이 불안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긍정적으로 안 보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불안한 거거든. 긍정적으로 안 보고 불안하도록 만들어놓고 불안한 걸 어떻게 고치면 되느냐? 그렇게 하니까 그거는 밑에 솥에 물을 끓이면서 위에다 바가지 물 부으면서 어떻게 식히는 방법을 찾는 거 하고 똑같지. 부엌에 있는 불을 확~ 빼버려야지.

 

그것처럼 딸을 긍정적으로 봐라. 딸을 장애로 보고 문제가 있다고 보지 마라. 이만하기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딸을 긍정적으로 보면 되는데 이 딸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이 딸 데리고 병원에 다니고, 고치러 다니고 이러면 자기 인생은 없어지지. . 딸 하고 둘이서 인생을 다 거기에 허비하지. 이런 딸이 있는 나도 행복할 수 있고, 내 딸도 그런 신체장애를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 이걸 자기가 깨달아야 돼.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지금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아지지. 이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아무 고민이 없지 뭐.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 돼. ‘뭐 해주세요.’ 이러지 말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그래도 속으로는 그래도 고쳐줬으면이러겠지. ‘고쳐줬으면하는 인간의 마음은 나쁜 게 아니야. 그래도 정말 감사하다.’ 그런데 항상 시시각각으로 내가 감사하지 못한 마음을 내.

 

항상 조금만 됐으면, 조금만 됐으면, 이런 마음이 일어나니까 기도할 때 ~ 내가 또 욕심을 내구나. 내가 또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구나.’ 이걸 돌이켜 기도할 때 내려놓는 거지. 그러고 망상이 기도할 때 번뇌가 좀 생기는 거는 너무너무 당연한 거요. 그거는 기도할 때 아무 망상이 없다. 그런 거는 정신작용이 그렇게 안 돼 있어. 기도할 때는 망상이 생기는 거요. 여러분들이 명상하면 아무 망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이렇게 오히려 눈뜨고 돌아다닐 때 망상이 적지. 가만히 있으면 망상이 더 생겨. 눈감으면 환영이 생겨. 그 속에서도 그런 환영이 생기는 속에서도 염불을 할 때는 염불에 집중하고, 화두를 들면 화두에 집중하고,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에 관찰하는 연습을 하는 게 수행이다. 망상이 안 생기는 게 수행이 아니라. 망상이 치성하는 가운데서도 집중하는 게 수행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게 복이 아니고,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구애 안 받는 게 자유다. 이 말이오. 오늘 비 오라면 비 오고, 맑으라면 맑고. 흐리라면 흐리고. 이게 천당이 아니고, 비야 오려면 오고, 추우려면 추워라. 추우면 옷 입고 가면 되고, 더우면 옷 얇게 입고 가면 되고, 비 오면 우산 쓰고 가면 되고, 눈 오면 스키 타면 되고. 니야 뭐 알아서 해라. 나는 구애 안 받는다. 이게 해탈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만날 날씨 갖고도 싸우잖아요. 오늘 소풍 가려는데 이놈의 날씨가 비가 와가지고 날씨가 추워서 어제저녁에 기도했는데 안 들어준다. 이런 식으로. 그런 아무 관계 없는 부처님까지 끄집어내서 부처님을 원망하고 이러잖아. 엊저녁 그렇게 기도했는데 소용이 없더라. 이러면서. 그게 불교가 아니고, 그 시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인연을 따르는 거요. ~ 아침에 딱~ 보고,

 

날씨가 추우니까 옷 좀 더 입고 가야 되겠네. 날씨가 더우니까 좀 얇게 입고 가야 되겠네. 비 오니까 우산 가져가야 되겠네. 날씨가 덥지만은 혹시 만약에 대비해서 어때요? 얇은 옷 하나 넣어가고, 날씨가 덥지마는 혹시 대비해서 잠바도 하나 넣어가고. 그래서 중간에, 아침이 아니라 중간에 갔다 오후에 날씨가 확~ 바뀔 때도 있잖아. 그죠? 그거에 대해 대비를 딱~ 하는 게 그게 수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