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相無住分
-형상에서 벗어나 머무름이 없다
“수보리야,
-분별이 빚어내는 온갖 갈등을 잘 참고 견뎌내는 지혜를 일컫는-
인욕바라밀에 대한 가르침을 여래는 설한 바가 없나니
그저 이름만 인욕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니라.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야,
네가 저 옛적 가리왕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느니라.
행여 나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나의 몸이 갈기갈기 찢길 적에
필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생각해보면 저 옛적 오백 년 동안
내가 인욕을 닦는 수행자로 있었을 때에도
나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이처럼 상에 머무름이 없으니 인욕바라밀이란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이렇듯 수행자라면 응당 일체의 상에서 벗어나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하나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며
소리와 향과 맛, 감촉, 사념에도 얽매여 마음을 내지 말지라.
반드시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낼지며
행여 마음에 머무름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관함으로써-
머무름이 아니게 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는 수행자는 응당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라고 설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보시해야 하느니
-그 이롭게 하는 방향이란 것이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상이 아니며
일체의 모든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진리를 말하는 자이며
실상을 말하는 자이며, 한결같이 말하는 자이며, 속여 말하지 않는 자이며
어긋나게 말하지 않는 자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이란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수행자가 법에 집착하여 보시행을 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둠에 갇혀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수행자가 법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써 보시를 한다면
마치 눈을 통해, 햇빛의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온갖 형상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간직하고 독송할 수 있다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그 사람을 능히 알아보고 헤아리게 되리니
결국 무량한 수행의 공과를 성취하게 되리라.”
-解義-
수행의 첫 단계는 인욕바라밀이다.
불제자가 되어 구도를 발원하면
자신이 늘 살던 방식을 완전히 바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언제 어디서 갈등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또한 이러한 주변 여건과 상황의 변화 외에도
수행 자체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고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행의 첫걸음은
온갖 갈등과 멸시, 역경, 반목.. 등을 잘 참고 견뎌내는
인욕바라밀에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아상이 큰 경우는
인욕바라밀이 결코 쉽지 않다.
아상 자체가 머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욕바라밀은 저절로 아상을 줄이고
인상이 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인상이 더욱 깊어지면 중생상과 수자상으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인욕바라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내면에서 분별의 불씨가 급격히 수그러들면서
평정심을 잃지 않게 된 까닭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분별의 불씨마저 없애야 하는데
이때가 바로 수행의 분수령이다.
그런데 분별의 뿌리를 뽑으려 하면
절대로 이것을 이룰 수 없다.
그런 시도 자체가 분별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의 궁극에 이르러서는
분별을 인식하지 않는 경지로 올라서야 한다.
이것이 부처도 버리고 불법도 지우는 단계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상에 집착하지 않아 머무름이 없게 된다.
머무름이 없으면
나라고 뚜렷이 주장할 만한 것이 없기에
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개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문호가 열린다.
비로소 이상무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 수행이 꽤나 복잡하고 지난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용왕매진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대게 불교 수행은 분별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분별에서 피조물인 중생이 만들어졌으니
그것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분별이라는 난적을 없애기 위해 인욕바라밀도 하고 선정에도 수시로 드나든다.
지혜도 도움이 되니 경전 연구에도 소홀함이 없고 분별을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위빠사나 수행도 곁들여 한다.
그 외의 모든 수행이 예외 없이 분별 타파에 초점이 모여 있다.
그런데 사실상 평생을 그렇게 해 봐야 소득이 없다.
윤회를 천번 만번 하며 수행에 매진해도 결과는 똑같다.
왜 그럴까?
어떤 문제가 주어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해답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오랜 세월이 걸리면 풀리게 된다.
그런데 만일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풀려고 하면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된다.
이런 이유로 문제를 풀려는 수행자들도
문제에 관심이 없는 속인들도
그 구조상 문제에 얽혀 문제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러면 문제가 없다고 인식하면 깨닫게 될까?
다시 말해 나를 비롯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실존이며 붓다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래도 결과는 똑같다.
어떻게 보면 문제 속에 더 파고드는 격이 될 수 있다.
사실 ‘세상에 붓다 아닌 것이 없다’고 외치는 수행자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을 보기 힘드니 말이다.
그러면 문제가 있다고 여겨도 안 되고
문제가 없다고 여겨도 안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면 될까?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는 표현이 그나마 수행의 진전에 보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왜냐,
지금 당신이 사고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를 근간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 틀, 다시 말해
사고 구조를 뿌리째 바꾸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해도
붓다의 말과 중생의 말이 다르다.
이것이 중생이 붓다를 흉내낼 수 없는 이유이며
붓다의 평범한 말도 법이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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