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백 년 전, 조선 만해도 여성들이 이런 취미활동은 커녕
교육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어떻게 이런 걸 누릴 수 있게 된 거지?
배움보다는 집안일이 우선
인내와 순종이
여성의 미덕이었던 시절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생전 처음 보는 광경
입장료 1원
(현재 가치 약 5~6만원)
비싼 돈을 기꺼이 내고
모여든 청중들
그곳에선 오로지 여성들만이 모여 갑론을박,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조선 여자계의 급선무는
조선에서의 활동인가, 해외 유학인가?’
여성의 해방이 곧 민족의 해방이다.
-조선여자교육회
옛날에는 외출 자체가 쉽지가 않았잖아요.
외출을 하더라도 잠옷이나 쓰개치마로 자신을 가리고 다니던 시절에
‘해외 유학을 갈 것이냐’ 이런 주제로 토론을 했다는 게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멋있는 것 같아.
토론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도 얼굴을 내놓고 자유롭게 외출을...
아들딸 가리지 말고 공부를 시키게 곳간을..
교육을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맙시다.
온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강연단으로
84일간 67개의 마을을 순회하며
여성들을 위한 강연에 나선 이유
조선여자교육회를 이끈 차미리사
일천만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자 하노라.
그 역시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나
이른 나이에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세례명 ‘미리사’라는 이름으로
10년 간 떠난 중국, 미국 유학길
이후 남들과 달리 새로이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며 깨달은 한 가지.
‘조선이 독립하려면
여성도 깨우쳐야 한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것은 백성 된 의무다’
‘실로 민족의 딸임을 잊지 말라’
평생을 여성 교육에 매진
그녀와 여성들이 자력으로 세운
순수 민족자본학교 ‘근화여학교’
열 계, 어두울 몽, 啓蒙(계몽)
조선 여성들이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차미리사.
그런데 이런 그녀의 노력에 일제는 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槿花근화=무궁화
‘교명이 불온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근화(槿花)에서 덕성(德成)으로 바뀐 학교명
1940년 8월 총독부 압력으로 ‘차미리사’ 교장직 강제퇴임
1940년 8월 총독부 압력으로 친일파 ‘송금선’ 교장직 취임
2002년
덕성여대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다시금 기억된
차 마리사와 여성들의 역사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그날 스스로 일어선 여성들이 있었기에
당신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차마리사
(1880.8.21~1955.6.1)
전효성,
차마리사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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