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선을 한다 하면 그저 몸을 조아리고 앉습니다.
그런데 몸을 수행시키는 게 아니라 마음을 수행시키는 공부입니다, 여기서.
딴 데서 하는 게 틀리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오늘도 스님이 오셔서 내 방으로 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보니까 스님네들이 참선하는 자세를 가르치고 가셨다고 그럽니다.
그럼 좌선을 이렇게 앉아서 하는 걸 가르치고 가는 것만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앉았다가 일어나면 선은 끊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앉은 것도 아니요 선 것도 아닙니다.
또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항상 앉아야 된다고 하는데,
그전에도 마조(馬祖)가 (좌선을 한다고) 앉아있으니까 남악선사는 기왓장을 갈았다 하지 않습니까?
“뭘 하려고 그렇게 앉았느냐? 넌 뭘 하려고 그렇게 앉았느냐?” 했을 때에
나는 부처를 이루려고 그렇게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일어나지도 먹지도 누지도 말아야지 선이 끊어지지 않지
그렇게 앉았다 일어나면 선이 끊어지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니
거기에서 그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앉았다 한들…,
그러면 아주 일어나지 말아야죠. 그게 목석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해보시고
‘아, 이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마음 수행이로구나.’ 해서 그것을,
힌두교의 수행하는 방법도 말씀해주시고 일러주셨고,
그 후로는 마음의 수행을 중시하셨죠.
우리가 지금 망상이 일어난다 이러는 것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건 망상이 아니라 이겁니다.
망상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기 위한 방법으로 망상이라고 그랬지,
우리가 망상이라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 생각 저 생각, 나쁜 생각 좋은 생각 이런 게 안 난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룹니까?
그러니 부처 가운데서 중생이 나왔고 중생 가운데서 부처를 이루었다 했습니다.
어찌 그것이 둘이라고 봅니까?
그런 반면에, 우리는 참선이라는 이 자체가 바로…, 아까도 얘기했죠.
나 주인공만이 주인공이 있다는 증명을 해줄 수 있을 거다, 첫째.
증명을 해줌으로써 이 둘이 아니게 돌아감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들이고 내는 그 능한 도리를 알게 해 줄 것이다 이겁니다.
둘이 아니게, 바로 그렇게 둘이 아닌 까닭에 돌아가는 그것을 아는 까닭에
세 번째는 바로
‘둘이 아니게 모든 일체 생명과 더불어 같이 나툰다.’
이런 도리도 바로 거기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 하는 것을 다 놔라 이런 겁니다.
선으로 돌아간다면 악이 붙고, 악으로 돌아간다면 선이 붙으니 어찌 벗어날 길을 찾으랴!
악도 놓고 선도 놔라 그런 것이죠.
그러니 마음이라는 이 자체가 그대로 그렇게 묘하게
인간은 참, 첨단으로 이룰 수 있는 그 마음이 용솟음치고 나옵니다.
그 마음을 좀더 넓혀서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그 마음이 얼마나 묘합니까?
그 마음은 여러분들의 보배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가져올 수 있고, 슬픔도, 미움도 또 선의적인 마음도, 악한 마음도 듣고 보는 대로 생기는 게 얼마나 묘합니까?
그것을 망상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아하, 이런 것이 전부, 죽솥에서 죽 끓는 방울이 나오듯이,
그 많은 생명의 의식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가 왜 거기 말리랴. 그냥 그렇게 해.’
그래도 ‘그래, 그렇게 해!’ 그렇게 나와도,
‘네가 했으니까 네가 모든 것을 그 한마음 속에서 해결해라.’ 하고 하면
‘야, 내가 너를 속을 썩이려고 이렇게 그냥 막 이랬는데 너는 유유하게 말이야, 내가 그러는 줄 벌써 알고 있으니 재미가 없어.’ 그래서 고만 그만두는 겁니다.
그러니 속이 이렇게 터지던 것도 고만 가라앉는 겁니다.
자기 탓으로 돌리니 눈물만이…, 아무 상관 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했다면 정말이지 앞으로 멀지 않아서 정말 우죽 쏟아지듯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보세요, 우리의 마음의 뿌리가 칡뿌리라면 하여튼 굵고 깊이 박혔어야,
그 가지마다 굵게 뻗어나가니까 골짜기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이 되나 사철, 칡꽃은 어김없이 골짜기마다 칡꽃이 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꽃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궁무진하며 뿌리가 깊으면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아무리 해도
그것은 뽑아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의 뿌리를 깊이깊이 뻗어나감으로써
위로는 부모의 은혜도 갚고…, 일체 조상이 둘이 아닙니다.
벌레의 부모고…, 거미도 자식을 뒀고 부모를 뒀었습니다.
하다못해 개구리도 개구리 부모를 뒀었고 자식을 뒀었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게 부모가 다르고 자식이 다르겠습니까?
그 벌레에서부터 올라온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말입니다.
얼마나 인간으로 화해서 이렇게, 자기 각자가 광대무변하고 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등 동물이라고 말을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몸 안에서 마음이 벗어나야 할 텐데
첫째는 이 몸 안에서 벗어나야겠다.
이 몸 안에서 나오는 그 모두를…,
내 몸이 있으니까 그 중생들이 있는 겁니다.
내 몸이 없다면 그 중생도 없고 바로 상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몸이 생겼으니까, 어떻게 됐든지 내 몸이 이렇게 생겼으니까
내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그런 걸 어떻게 놀든지 내버려 두고, 이렇게 모든 것을 내버려 둘 수 있는,
들으면서도 행하면서도 자기가, 자기 마음이 자기를,
그 많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돼야 거기에 지배인이 된단 얘기입니다.
모든 그 의식 속에서 지배인이 되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기선 무슨 말을 물었는지도 모르고 지금 이러고 가죠.
그래서 그 지배인이 돼야 만이 그게 그 모두를 이끌고 나가는 선두자가 되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직접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지금 참선을 하려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을 하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진짜 참선은 못하고 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입니다. 아주 쉬운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작업하는 거는, 모든 그 의식들이 수효가 없다.
그런데 그게 용광로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게 나오는 것대로 그냥 거기다가 놔라, 거기에 넣어라.
거기에 넣고 그 작업만 한다면 이건 자동적이기 때문에,
놓기만 하면 거기서 새 쇠로 재생이 돼서 나간다. 그럼 이게 거죽으로 나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여기 믿으면서 다니면서 이 공부를 해보시지만 여기 이 도량은,
즉 말하자면 백 리 안팎으로는 아니, 그냥 아주 조그맣게 하죠.
삼 킬로라고 해도 되고 또 백 미터라고 해도 됩니다.
조그맣게 생각해도 좋고 크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백 리 안팎으로는 광명과 전력과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여러분들한테 이게 적용이 됩니다.
교리로 배운 것은 말만 하면 말로 땅에 떨어지지만,
우리가 마음으로써 그걸 깨달아서 이심전심으로써 이 일체 만물 만생과 더불어 같이 접촉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여기선 그만큼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없다’ 생각하면 없는 것이고, 그게 묘한 거죠.
‘있다’ 생각하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지가 밥을 얻으러 올 때
반드시 깡통을 가지고 와야만이 담아줄 수 있다 이거지,
마음을 안 가져오는데 어떻게 담아집니까?
이심전심인데….
몸뚱이를 보고 안 보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 자세입니다.
여기만, 집에서 여기를 바라보고 생각을 해도 벌써 이게, 이심전심으로 한 찰나에 들었다가 한 찰나에 좋은 뜻을 전하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겁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여러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서
자기가 그런 경험을 못 했다 할지라도
여러 사람들 말을 들어보고 그러면 아실 텐데요?
삼 미터니 백 미터니 백 리니 이런 것을 떠나서,
미국에서 여기를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이심전심으로 딱 한 찰나에 묘한 법을 전달하고 가시더랍니다.
내가 잘나서, 내 모습으로 보였다고 해서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그 자부처가 바로 내 모습으로다가 하나기 때문에 둘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렇게 갖다가 두 다리 쭉 내뻗어서 보인 것처럼 그렇다 이겁니다.
두 발은 두 발인데 한발이죠. 한발은 한발인데 둘이 아니죠.
네 발 내 발 둘이 아니니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앉아서 참선? 산골에 들어가서 참선?
아니, 산골에 들어가면 거기 부처가 있고 산골에 안 들어가면 부처가 없습니까?
여러분입니다,
즉. 여러분부터 알아야 부처님의 마음을 통달한다고 그랬어요.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여러분 모르는데
어찌 남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자기 마음부터 알아야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도 알고
이 머저리 같은 내 마음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마.
테레비젼을 보고도 그렇고, 세상을 보고도 그렇고, 사람들 그 울부짖는 걸 보고도 그렇고,
“스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울 때도
그렇고 이거는 뭐, 이 듣는 것만 해도 참 기가 막힙니다.
그러면 내가 미국에서 사십 일 동안에 몇 사람의 소리를 들었을까요?
그걸 수효를 따진다면 한 사람도 못 해.
그걸 남으로 안다면 한 사람도 그걸 이익을 못 준단 말입니다.
그저 위로도 보지 말고 내려 보지도 말고
자기같이만, 못난 자기같이만 보면 됩니다.
그래야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만이 이익을 줄 수 있고 그래야 만이 공덕이 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내가 안방에 앉았어도…,
여러분들 가셔서 안방에 앉아보세요.
자기가 거기 있기 때문에 부처가 거기 있지,
아, 자기 없는데 무슨 부처가 있습니까?
자기가 없는데 부처가 어디 있으며
또는 내 몸뚱이를 끌고 저 산골로 들어가 본다 하더라도…,
나도 한바탕 웃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끌고 다니면서 그렇게 했어도
끌고 다닌 자체가 없더라 이겁니다.
그러니 좌선이라든가, 좌선은 마음 편안한 걸 말하고
참선이라는 거는 마음 편안한 데서 참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좌선과 참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용광로에 넣고 내가 편안하게
‘아, 내 주인공만이 내 주인공이 있는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것이지.’ 하고선 관할 때,
마음이 한군데로 몰아놓으니 편안할 때 그 진리가 거기에서 나온다 이겁니다.
또 여러분들이 급한 일이 있어서 집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아하, 내 주인공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지. 내가 주인공 심부름꾼인데 그저 당신만이 해줄 수 있어.’
하고선 거기다 놓고 또 편안하게 앉아서 관할 수 있는 것이지,
이건 일일이 나오면 일일이 생각하고 일일이, 마음이 말이야,
몸뚱인 여기 앉았는데 마음은 이리로 가고 저기로 가고
온통 그러다 보면 그게 무슨 좌선이자 참선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항상 안정됐을 때
가게 나가서 장사를 해도 그건 꿈쩍 안 합니다.
여전히 웃고 부드럽게, 장사하면서도
그 심봉은 꿈적 안 합니다.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그전에도 제가 그렇게 그 산골로 다녀도, 목신도 있고 뭐, 없는 거 있습니까? 다 있지.
그 생명의 의식들이 다 친구가 되고 벗이 되니까 무서운 게 어디 있습니까?
아, 보세요. 모두가 친군데 어떻게 무서울 게 있습니까?
‘너’ ‘나’가 있기 때문에 무서운 거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조금 머저리 같아도 좋다 하는 겁니다.
좀 모르는 듯 한 것이 그런 땐 조금 낫더라 하는 거죠.
내가 약았으면 그렇게 못 하죠.
지금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 말입니다.
그리고 보세요.
지금 세계를 전파를 통해서 두루 하는데
앞으로 마음공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이겁니다.
물질은 무상하다 이 소립니다.
그 질문하신 게 고만 어떻게 됐습니까? 다 됐습니까?
지금 질문하신 분도 그 도리를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여러분들에게 보시하시기 위해서, 이 마음이 갸륵한 마음입니다.
그 도리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같이 이렇게 하면서 배우자 하는 뜻에서
높고 낮음이 없이 이렇게 이 길을 걸어가는 법우님들, 형제님들이 같이 하자는 뜻이죠.
내 그것도 압니다.
그래서 그냥 덮어놓고 이렇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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