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이거 보세요.
놔진 것이 아니든 놔진 것이든 그냥 놓고 가는 거거든, 그게.
우리가 되풀이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냥 놓고 지금 가는 건데 지금 과거가 아까도 과거예요, 우리.
정락 스님이 설법할 때도 벌써 과거로 지나간 거예요.
아니, 내가 첫 번에 들어와서 말한 것도 벌써 과거로 흘러간 거죠.
그렇게 빠르게 흘러갑니다.
벌써 오백 년 전으로 흘러갔대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이 그 핵심으로써 내가 작용을, 그대로 중용을 지킬 수 있느냐.
그거 어렵지 않아요.
일체가 자기가 하는 거고, 일체 답답하든 뭐든, 뭐든 하여튼 생각이 나오는 것도 모든 게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그 사람이 하는 거죠.
그러니
“네가 하는 거지, 영원한 친구야. 네가 하는 거지, 네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잖아?
네 몸뚱이는 너 따라 다니면서 이날까지 시봉을 하고 이렇게 있는데 아, 시봉을 잘해서 누가 되지 않도록 인생을 심부름을 해야, 그래야 될 거 아냐? 이 친구야.”
이렇게 가깝게 아주, 가깝게 하라고!
그게 이름이 부처가 아니니까.
만약에 이름이 부처라면 부처는 없어. 이름이 부처가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49년 설했다 하지만
‘사십’이라면요, 이 세상, ‘십’으로 돌아가는 걸 말해요.
그래 ‘사십’ 했단 말이에요.
‘구 년’ 했단 말이에요. 년 자는 언제나 붙어요, 꼬리에.
그래 ‘구 년’ 했어. 과거 삼, 현재 삼, 미래 삼 ‘구’란 말이야.
구가 그게 그냥 이런 우리 수효로다가 세는 9년이 아니에요.
구경지를 말해요.
그러니 그것이 없는 숫자를 말한 거지 있는 숫자를 말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49년이라고 한다고 모두 “49년, 49년, 49년” 이런단 말입니다.
49년이 3일이 될 수도 있고, 3초가 될 수도 있고, 1초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금까지도
하는 게 없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설하고 나가시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세상 돌아가는 거.
저렇게 말없이 설하고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부처 아닌 게 없어요.
꽃은 꽃대로 갖은 각색으로 남을 위로해 주고 또 극복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고, 마음이 화사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 줘요.
나무들은 또 시원하게 응달을 지어 주기도 하고
보는데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고, 또 추운데 따듯하게 해주기도 하고요.
또 나무는 모든 매사에
밑을 씻고 뭐 여기 씻고 뭐 종이를 전부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게 보시를 하는 겁니까?
자기 몸뚱이를 다 그냥 보시하는 거예요, 다 그냥.
일체 만물이 다 그렇게 보시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시를 하고 가는 겁니까?
그래서 첫째 육바라밀의 무주상 보시, 핵심으로써 무주상 보시를 해라.
내가 그 전에도 얘기했죠.
나뭇짐을 지고 가는데, 뜨물 한 그릇 얻어먹고 나뭇짐을 해 주려고 그랬는데
은사가 그냥 한번 때려 재껴서 쓰러뜨려 놓고
“이놈아! 나무 한 짐으로써 무주상 보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무주상 보시를 하고 난 뒤에는
‘아차! 무주상 보시가 이렇게, 핵심적인 여기에서
한 생각이면 무주상 보시의 그 행을 할 것을
내가 나뭇짐을 이렇게 하느라고 끄달렸구나!’
하곤 그냥 무릎을 ‘탁’ 치고 무릎 깨진 거를 어루만지면서
‘고맙다, 고마워!’ 했다는 얘기.
전파하고 다니면서 설법하고,
다니면서 뭐 하나 집어주고 이러는 게 바로 무주상 보시가 아닙니다.
그거는 새 발의 피예요.
우리가 쌀을 수억 가마니를 갖다가 고아원에 줬다고 해도 그건 새 발의 피예요.
물론 물질로도, 물질 아닌 무주상 보시로도
이거 겸해야, 겸용을 해야 이것이 중용이 되죠.
‘이거는 아니고 이거는 기다’ 이런다면
벌써 그 중용은 그냥 해체가 돼 버리고 말아버리고
이것은 진짜 핵심적인 중용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름해서, 그것도.
지금 나라에서도 쿠웨이트나 뭐 이란이나 이런 문제들,
세계적인 문제, 이북 문제 뭐, 이런 문제들이 허다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계산을 해서 얘기하려면 계산이 그냥 쫙 붙고, 절대적으로 이건 어렵다.
어렵고, 이렇게 완화될 수도 없고 계산적으로 볼 때,
교수들이 얘기하고 그러고 나갈 때 이거는 뭐 전체 강대국에서 이럭하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나갈 것이다. 고립될 것이다.
또 고립이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이거는 그렇게 완화해서 우리 한국이 어떻게 대처를 해나가며
이북에서 어떻게 들어올 것이냐 이런 문제들이 붙죠.
그런데 부처님 법에서는 안 그래요.
내가 한다면 하고 만다면 말지, 부처님 법에선 이유가 붙지 않는다니까!
미쳤다고 할 거죠, 날더러.
글쎄 나한텐 그런다면 미쳤다고들 그럴 테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서 잘 생각해 보고 실험들을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들 하세요.
그러면 내 속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내 속만 알면, 자기 속 알면 내 속 알고, 내 속 알면 일체제불의 속을 알 텐데 뭐이 걱정입니까?
아니 일체제불의 속을 안다.
그렇죠, 저 꽃 한 송이의 속도 알 테니까요.
저기 외국에 지난번, 지지난번 그 전에 한번 갔을 때입니다.
꽃을 누가 아주 색색가지로 그냥 이렇게, 한아름 꽂아다 놨어요.
근데 나도 무의식중에 그냥
“꽃도 참, 누가 꽂아다 놨는지, 고상하게 하나만 꽂아다 놓으면 놨지
이걸 색색가지로 이렇게 갖다가 놨구나. 어지럽구나.”
그러고선 무의식중에 그냥, 목마르니까 냉장고를 열고선 물을 마시는데
그 꽃에서 말하는 거 있죠.
‘내 이 파란색, 파란 옷을 입고 나왔지만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 하는 겁니다.
“무엇에 도울 수 있느냐?” 하니까,
“그것도 말을 하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전에 뭐가 왔느냐 하면 다리를 뱀한테 물려서
영 낫지를 않아서 구멍이 이만큼 뚫렸으니까
거기다가 병원에서 가제를, 전부 약을 넣어서 소독을 해서 거기 넣어줬는데
그게 새 살이 안 나오니까 엉덩그러서 아주 그냥, 그걸 붙들고 절절매더라고요.
그런데 걔가 그러는 겁니다.
나를 짓찧어서 거기다가 가제에다 묻혀서 넣으라는 거죠. 내가 준다 이거야.
이게 가고 옴이 없이 이게 가고 오는 반면에 말없이 말을 듣는다.
말없이 말을 듣고 말없이 말을 받아들이고 하고.
이것이 또 가까운 데서만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미국하고 여기 있어도 같이 말을 할 수가 있고 그걸 들을 수가 있다. 그러고 볼 수가 있다.
뼈가 몇 개가 달린 거까지도 볼 수가 있고 사마귀가 붙은 거까지도 알 수 있다.
또 과거의 죽은 사람의 형태도 그냥 낱낱이 나온다 이겁니다, 모두가.
이렇게 좋은 공부를 안 하시렵니까?
그러니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대로, 여러분들이 부처님이자 중생입니다.
왜 그런가 그랬더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생각을 하니까, 그 전입니다.
“아하, 몸뚱이 속의 중생들이 우글우글하구나.
몸뚱이 속의 중생들이 우글우글한가 하면,
이 상반신 하반신이 전부 중생들이요, 부처구나.”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왔고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왔지
딴 데서 온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점만 있다면 지금…,
제가 그전에도 항상 말씀드렸듯이 전파,
숙명통, 컴퓨터, 탐지기, 팩스 또는 망원경, 통신기, 레이다망 이것이 여섯 가지, 다섯 가지가 우리가 맘대로 쓸 수 있는 게 그게 말로 이름을 지어놨다 뿐이지
“이 물이 넘치면 안 돼!” 할 때 그게 전체가 거기 돌아가는 겁니다, 그게.
요 “물 넘치면 안 돼!” 하는 그 순간에
그것이 전체가 돌아가는 게 그냥 딱 집중되는 겁니다.
그게 따로따로 벌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눈 따로 있고 귀 따로 있고, 이름도 다르죠?
코 따로 있고, 혀 따로 있고, 몸뚱이 따로 있고, 그렇게 이름이 전부 각각이면서도 한 몸뚱이에 붙었죠?
그래서 눈 귀 코 혀 몸 뜻, 육식(六識)
이것이 바로 한꺼번에 주어져서 한꺼번에 나가는 이치죠.
손이 만약에 10 개다 하면
이거 새끼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이건 뭘 쥐는 데도 이렇게 잘 안 쥐어지죠.
꼭 쥐어지지 않죠.
일을 못 하듯이, 나사가 하나가 빠져도 안 되듯이,
인간에게는 그렇게 시스템이 다 아주 굳건하게 주어져 있으면서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 지수화풍의 재료를 바탕을 삼아서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그게 그냥
그냥 맘대로 자기가 기가 적으면 맘대로 끌어서 기를 넣을 수 있는 운전사가 될 수 있고, 자기가. 자기가 본인이니까, 핵심이니까!
그거를 기를 넣을 수 있고,
병이 났으면 거기에 한 생각에 그것이 파워를…, 자기니까!
여기 공장 하는 공장장들 뭐, 직원들이 다 자기야.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그렇구요. 모든 게 다 그래요.
가난이든지 뭐든지 뭐든지 뭐든지 전부예요.
그래서 자기부터 알고 자기 중생부터 제도했어야
그 중생들이 털구멍을 통해서 오고 감이 없고 말함이 없이 오고 가면서 말하면서 모든 걸 정돈시키고
내가, 몸뚱이가 보이는 거를 턱 봐서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인간에게 아주 용이하게 주어져 있다는 거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부처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이거죠.
그러면 나만 말했으니까 오늘 질문 좀 하세요.
전에 저는 산에 다닐 때요,
“몇 시나 됐나?” 이러면 ‘어, 이쯤 됐겠구나!’
또 ‘동쪽이 어딘가?’ 하고 보면 ‘아, 여기 쪽이로구나!’ 이런 걸 안 거죠.
그냥 그냥 알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다니지 어떻게 그 눈 속에 다닙니까?
사방도 이게 헤칠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 줄도 모르고 어떡합니까?
그러고 전부 친구예요.
전부 친구기 때문에, 새들이나 나무들이나 전부 친구기 때문에
벌써 가다 보면
‘야, 이 친구야, 이리로 가지 이리로 가.’
그러고 인사를 하고 그래도 여러분들은 인사하는 걸 못 보죠?
그래서 모두 이리로 가도 저기로 가도 친구요 벗이요,
외로울 게 하나도 없고 고독할 게 하나도 없고….
내가 공부하려고 해볼 거는 다 해 봤습니다.
그래서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 남한테 기대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거는 다 극복했고 그렇게 해나가는 거죠.
또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
큰스님같이 고행을 하지 않고도 마음을 깨우칠 수 있습니까?//
그렇죠.
예전에는 고생을 해 가면서, 그냥 그 나무껍질을 삶아서
온통 손으로 그렇게 해서 봉투도 만들고 그랬지마는, 비유를 할 때
지금은 그냥 탁하면 그냥 잘라지고
탁하면 그냥 들어가고, 탁하면 그냥 나오고, 아주 차곡차곡 나와요.
지금 그런 세상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머리 정신도 그만큼 빨라요.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그만큼 빨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몸뚱이로 고행을 했다.
예전에 부처님 말마따나
“몸뚱이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그게 다 떨어지는데, 무슨 몸뚱이로 고행을 하느냐?”
그저 이 마음, 공부를 할 때 어떤 고난이 들어와도
‘네놈이 하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고난이 안 되게 할 수도 있고 고난이 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네놈이…,
이 친구야, 이렇게 고난을 받게 하지 않아도 알아, 네가 하는 걸.’ 이런다면 그게 금방 바꿔지죠.
금방 바꿔지기 때문에 이 고난을 받은 거
내가 고난 받은 걸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안다면
각자 자기 핵심을 안다면 그 고행한 것만 아는 게 아니라
천체 역대의 부처님 역사도 알 수 있으며 돌아가는 이 세상
이 병풍 둘러친 듯한 이 세상도 알 수 있는 건데 그까짓 게 뭐이 문젭니까?
모두 나 아님이 없는데….
연구하는 박사들 머리에 들어가 주려면 그만큼…,
그러면 그 박사 속 머리에 들어갔을 때는 그 박사가 고생한 것만치 다 자기, 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알게 되는 거예요.
다 알게 되는데 무슨
“똑같습니까, 그거 알게 됩니까?” 합니까?
그러니까 한 발짝 떼놓지 말고
자기 앉은 자리에서 자기가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변소간에 앉았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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