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의 말이라는 게 그거예요.
불교에서 무아 공부다, 무아라고 얘기하는 거는
무아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아가 있다라는 그거를 부수기 위한 것이지
무아에 대한 규정이 아니에요.
‘경계에 떨어지지 말라’ 그러면은
경계에 떨어지는 그거에 대한 부정인 것이지
경계에 떨어지지 말라고 부추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방편의 말이라는...
그러니까 말귀를 알아들어야 된다는 게 그거예요.
‘뭘 하지 말라’
그럼 그걸 뭔가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인 거예요.
‘하지 말라’라는 걸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그러다가 시간 보내는 거예요.
착을 놓아버리게 하는 것이지
다른 거를 착하게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대기설법만이 가능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묶인 거를 풀어주는 것이지
그 묶인 데서 풀려난 상태를
또 고착시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불교에서의 언어는
풀어주는 검이라.
검은요. 다른 걸 묶지 않습니다.
그냥 풀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방편의 말이라는 건 그거예요.
풀어주는 역할만 하는 거예요.
그게 해탈인 거예요.
묶인 것에서 풀어주는 것이지
사람들은 근데 분별심은 뭐냐 하면
이게 아니면 저거에 묶여.
“풀어진 상태를 유지해야 돼”
막 이런 식으로 묶어버린다고.
그래서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1시간을 들으면요.
제가 한 말이 남아 있으면 안 돼요.
그냥 들었는데 남아있는 건 없고
뭔가가 좀 가벼워진 것 같아.
뭔가 답답함이, 갇혀 있던 것에서 풀려난 것 같아.
그럼 제일 잘 들은 거예요.
“내가 뭐가 따로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구나, 그거 다 망상이구나” 해서
거기서 깨어나면 제일 잘 들은 것이지
제가 1시간 동안 한 말을 마음속에 새겨놓고
“이렇게 해야지” 하면
그거는 오히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겁니다.
그래서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런 감이 생겨야 되고
이 감이 생기면
알아들은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남아있는 것도 없고
그게 바로 우리가 깨어나는 것이고
다른 식의 표현하면
오염, 중생심이 오염돼 있는데
그게 청정해지는 거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게 깨끗해지는 거예요, 깨어나는 게.
깨어나는 거랑
깨끗해지는 거랑 같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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