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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붓다] 목우 - 채찍과 고삐 - 자각과 수양 ㅣ 몽중일여 - 꿈속에서도 깨어있기

Buddhastudy 2024. 7. 23. 19:24

 

 

절이나 성당에 가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 있든, 시끄러운 공연장에 있든

락 페스티벌에 가든, 침묵의 공간에 가든

마음은 늘 여일하게 중심을 잡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면적인 깨어있음, 중심점이 항상 깨어있거든요.

이때가 비로소 마음의 주인이 된 것이죠.

 

 

--

오늘도 계속해서 목우를 한번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 목우의 게송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채찍과 고삐를 떼놓지 않으면

소가 멋대로 걸어서 진흙 속으로 들어갈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잘 길들이면 자연이 온순해지려니

그때에는 채찍과 고삐를 잡지 않아도

주인을 잘 따르리라이런 게송이 있는데요.

 

우리들 수행에 있어서

채집과 고삐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부처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보살이 되는 경우는 없어요.

 

설령 전세에 석가모니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이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가져온 근기가 물론 남다르기는 하겠지만

0점부터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배우고 깨닫고 성장해 가야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깨닫는 경우는

인과론적으로 그런 경우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우의 소를 길들이기 위해선

이 채찍과 고삐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부처도 필요하고요, 중생도 필요합니다.

 

/여기서 채찍은 자각을 상징합니다.

이치적인 그런 깨우침이죠.

그리고 고삐는 내적인 수양, 노력, 마음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각과 수행은

이 내면의 여행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미천이자 노잣돈이라 할 수가 있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자신에 대한 자각과 명확한 깨달음 없이

어떤 경전의 가르침이나

어디서 뭐 이제 주워들은 얘기 어디서 들은 얘기

어떤 권위 있는 스님이나 수행자의 말이나 책만을 보고

거기에 따라서 맹목적인 수양만을 한다면

위선자나 영혼 없는 좀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도

어느 정도 검증된 것이기에

겉으로 보기엔 저 사람 위대한 수행자다’ ‘위대한 성직자다

이런 모습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진실한 삶의 모습이랄까요?

그 삶에 진정한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나를 존중해도

자신이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느냐?

자신이 자신에게 거리낌이 없느냐?

그겁니다.

 

자각이 없다면, 깨우침이 없다면

내면에는 그 어떤 환희나 기쁨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누구라도 성장 흉내를 낼 수가 있을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남이 나를 인정하고 안 해주고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느냐 받아들이느냐 그거죠.

 

자신이 자신에게 거리낌이 없고

양심에 걸림이 없느냐

이거예요.

 

만약 내가 내 자리를 투철하게 깨져서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설령 나를 가짜 성자라 비웃어도

거기에 걸림이 없겠죠.

내면의 기쁨과 환희를 잊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중생들의 어떤 이 박수 소리에 미(어리석음)해져서

자신이 자신을 속이면서

말과 재주로 중생들을 현혹하고, 중생들을 이끌고, 성자인 척을 한다면

그래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성자라고 존경하고 떠받들어준다면

그리고 그 맛에 취해서 한평생을 산다면

결과는 뭐가 되겠어요?

아무 결과도 이루지 못합니다.

종국에는 큰 업을 짊어져서 그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이 명예라는 것이 가장 큰 시험이자 유혹이기도 한다는 거죠.

무슨 무슨 조사, 무슨 무슨 종정, 대종사, 대선사, 대법사

이런 명칭에 우리가 쉽게 휘둘릴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수행이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 좋고

뭔가 좀 고결하고 이상적이고 멋짐을 추구한다면

위험하다는 거죠.

 

반드시 [자신에 대한 자각][깨침]이 바탕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깊은 사유와 깊은 자각 없이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은 자칫 교리에 의한 강압적인 실천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될 수가 있는 거죠.

 

자신에게 해탈과 자유를 주기는커녕

경전의 어떤 구절이나 어떤 교리나 이런 거에 의해서

더 많은 구속과 더 많은 불편함, 짐을 안겨줄 겁니다.

 

여러분 뭣도 하지 마라, 뭣도 하지 마라가

어느 종교나 다 많잖아요.

불가의 계율에도 종류가 정말 다양합니다.

하지 마라가 많죠.

출가자는 대표적으로

, 담배, 육류, 성적인 욕망

여러 세속적인 즐거움을 모두 멀리 하잖아요.

일반적인 이런 즐거움들을 멀리합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멀리하는지

이것에 대한 명확한 자극 없이

어떤 계율이나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위험한 사태를 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맹목적인 신념이나 가치에 의해서 행해지는 수행은

크게 잘못된 겁니다.

그것은 자신도 해치고 상대도 해치는 독약과 같다는 거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 종교를 보세요.

중세의 어떤 마녀사냥이나

과거 마야나 아즈테 문명이나 이슬람이나 이슬람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불행하게도 지금도 그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 번째로

[자각이라는 채찍]이 있어야 되는 거죠.

두 번째는 [수양이라는 고삐]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각은

자신의 견성에 기반한

직관적인 양심, 불심의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나 직관적인 깨어있음이

아직은 전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뭐가 필요하다고요?

고삐를 갖고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은 계속 소승이 얘기해 왔던 것처럼

오래된 습관과 패턴에 의해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업력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에 익숙하게

이미 습관화된 익은 길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늘 가던 길만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 생각과 감정이 늘 그 길로만 가려고 해요.

 

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 있잖아요.

이 양반이 항상 가는 기생집인가, 술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이 말과 함께 갔는데

이 말도 익숙해진 거예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김유신 장군이 길을 알려주지 않아도

이 말이 자기가 알아서 가더라 이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김유신 장군이

내가 습관을 잘못 들였구나.

계속 이러면 나 자신을 망치겠다싶어서

그 말을 결국에는 칼로 베었다고 합니다.

죽인 거죠.

 

사실 말은 주인의 성격을 잘 파악 파악해서

그것대로 간 건데

어쩌면 충직한 말이죠.

그런데 자기를 고쳐야지 애꿎은 말을 죽인 건 큰 잘못이죠.

그러니까 소송의 하나의 비유를 든 거예요.

습관이 무섭다는 하나의 비유를 든 겁니다.

 

이처럼 습관의 통로가 형성되면

굉장히 그거는 큰 업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익숙하고 흔해 빠진 길보다

아직 만들지 않은

내가 가야 할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견성을 했고, 자각의 상태가 되었다 해도

그 에너지가 잘 흐를 수 있는 길을 새로 만들어줘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하듯이

이 마음이라는 건, 낡은 패턴에 따라서

움직일 기회만 있으면 쏜살같이 부지불식간에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예를 들자면

화가 일어나고 짜증을 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자각이 전체적인 내 것이 되지 못하면

내가 짜증이나 분노라는 것을 자각할 때쯤이면

이미 이 활화산 같은 분노가

내 마음을 지나가 버리고 난 후에 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공부, 마음 훈련이라는 것을 계속하면

전체적인 깨어있음의 상태가 되도록 우리가 계속 노력을 한다면

그리고 또 전체적인 깨어있음이 된다면

자각의 불꽃이 언제나 꺼지지 않고

나와 함께 하게 됩니다.

 

분노가 온다 해도, 짜증이 온다 해도

어떤 번뇌나 망상이 온다 해도

그것들에 앞서서 뭐가 존재할까요?

자각이 존재합니다.

이 자각의 통로를 계속 익숙하게 만들어 놔야 된다는 거죠.

그것이 보임공부입니다.

 

이런 자각이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되어서

잠 속에서도 그 꿈을 지배할 수 있다면

이것이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는 몽중일여의 상태가 되는 거죠.

 

이때에는 수양이 필요 없어요. 노력이 필요 없어요.

그러나 처음에는 이런 게 될까요?

처음에는 절대 안 됩니다.

자각의 불꽃을 지피는 시작 단계에서는, 초기 단계에서는

그래서 노력과 수양이 필요하다는 거죠.

점수가 필요하다는 거죠.

 

수양, 즉 점수라고 말하는 것은

이 에너지가 낡은 패턴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새로운 길로 그 길을 내주는 작업이에요.

 

우리는 여러분이나 저나

우주가 끝이 얻는 것처럼 수많은 연겁의 세월 동안

이 삼천 대천세계를 돌고 돌았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부처도 있고 마도 있어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존재합니다.

보살 같은 마음도 있고, 부처 같은 마음도 있고, 축생 같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수라 같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 지나가는 개 같은 마음도 있고, 고양이 같은 마음도 있다는 거예요.

 

이 뿌리가 매우 깊어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거거든요.

 

죽는 순간, 한 생각 잘못해서

10년 공부도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삼악도에 빠지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어떤 에너지를 갖게 되는 순간

그 에너지는 그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혹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과 조우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을 보태줍니다.

 

그래서 이 에너지를 잠재우려고

여러 종교에서는 수행의 일종으로 가끔

단식을 권유하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요?

 

단식을 한다는 것은

충분한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게

강제적으로 그것을 막는 거예요.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무언가를 먹으면

몸에는 에너지가 충전됩니다.

당연히 뇌에도 영양분이 공급되고

생각하는 힘이나 감정에 에너지가 공급되죠.

 

여러분 몸 안에 에너지가 없으면

이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어요.

성욕도 사라집니다.

그럴 힘이 없거든요.

 

마치 우리가 몸에 병이 들면

그동안 해왔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습관이나 행동이

사라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힘이 없거든요. 에너지가 없거든요.

 

물론 이런 단식으로 인한 허약함,

몸에 병이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영적인 변형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속임수에 불과하죠.

 

많은 종교에서 단식을 통해서

예를 들자면

성욕을 극복하라고 권장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에너지가 없다면 성욕은 사라지거든요.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자,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생기면

다시 잡초처럼 올라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단식을 한다고 성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에너지를 다른 차원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길을 내주는 일이에요.

그 길을 내주는 게

바로 이 점수의 하나의 숙제인 거죠.

 

이런 점수의 공부를 해야만

에너지가 욕정이 아니라 자비 안으로

탐욕이 아니라 어떤 나눔의 정신으로

어리석음의 에너지가 지혜의 에너지로

전식성지하게 되는 거죠.

분노의 에너지가 사랑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이 자각과 수행이 병행되어야 한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는

이 돈오돈수라는 것은 뭐예요?

이미 이 자각의 빛이 충분해져서

자발적인 규율과 수양이 자연스럽게 몽중일여의 상태가 된 거죠.

그 상태에 이미 도달한 거예요.

 

그럼 여러분 그 상태까지 성철 스님은

돈오해서 갑자기 되신 걸까요?

성철 스님 역시도 점수가 있으셨던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깨달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초행자에게는 매우 위험한 사고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자각만 있으면 충분하고

그 어떤 수행이나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위험합니다.

반대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된다고

자각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양극단, 다른 극단에 서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기계는 계속해서 어떤 일을 합니다

기계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성자도 죄인도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적으로 할 뿐이에요.

마치 습관적으로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절에 가고, 기도를 하고, 절을 하지만

마음의 메커니즘이 반복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 안에 나는 존재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있는지

우리가 살펴봐야 된다는 거죠.

 

우리는 어떤 봉사활동을 할 수가 있고

선교나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 도를 아십니까주 예수를 믿으세요’ ‘부처님을 배우세요.’

다 똑같은 종교 활동이죠.

 

그러나 우리가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다면

거기에 참다운 자각이 없다면

참다운 깨달음이 없다면

별무소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많은 종교에서 수행과 규율을, 교리와 말씀, 도덕성 선행을 가르치고 있지만

글쎄요, 세상에 어떤 지대한 깨어있음을 주었을까요?

종교가 인류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요?

 

사람들은 종교 속에서 참다운 생명, 참다운 깨달음, 참다운 깨어있음을 얻은 자는

그 많은 종교 신자와 이 성직자에 비해서

매우 극소수입니다.

 

십우도의 목우에서는

자각과 수양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게송처럼 채찍과 고삐를 떼놓지 않으면

이 멋대로 걸어서 진흙 속으로 들어갈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소는, 즉 우리 마음은 이 진흙길에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때로는 이쪽 길로 가라고 우리가 채찍을 때리고

진흙길로 가려고 한다면

고삐를 잡아서 끌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잘 길들이면

, 즉 우리의 에고는 자연이 온순해지고

그때에는 여러분이 고삐를 잡지 않아도

본성의 말을 잘 따른다는 겁니다.

진짜 주인공이 주재하는 그런 삶이 되는 거죠.

 

그래서 마음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점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훈련은 하나의 수단일 뿐

결국에는 그 훈련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거죠.

강을 건너면 뗏목이 필요 없듯이

모든 수행과 노력과 훈련을 잊어야 합니다.

 

잊는다는 건 뭐예요?

자연스러워진다는 거죠.

기억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진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 필요성을 느낀다면

아직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죠.

아직도 점수해야 된다고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아직 그 단계에 가지 않은 겁니다.

 

처음에는 이 마음의 에너지가

새롭게 새로운 길로 이동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이 노력이 무르익으면

서서히 그런 노력이 필요 없게 될 날이 온다는 거죠.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 노력 없이 그냥 깨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꿈을 꾸어도 꿈속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꿈속에서도 깨어있게 되는 거죠.

 

명상을 하나 안 하나, 참선을 하나 안 하나,

염불을 하나 안 하나, 절을 하나 안 하나

하나가 됩니다.

절이나 성당에 가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 있든, 시끄러운 공연장에 있든, 락 페스티벌에 가든, 침묵의 공간에 가든

마음은 늘 여일하게 중심을 잡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면적인 깨어있음, 중심점이 항상 깨어있거든요.

이때가 비로소 마음의 주인이 된 것이죠.

 

내가 진정 주인이 된다면

마음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지만

주인이 아니라면 그 반대가 되겠죠.

내가 그림자처럼 마음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을 때는

내가 나 자신의 주인공이 아니었을 때는

에너지가 항상 바깥으로 노출되거든요.

 

이게 식색수명리라고 그러잖아요.

돈과 권력을 향해서, 어떤 지위와 신분을 향해서, 명예와 재물을 향해서

에너지가 누출됩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되면 그것들이 나를 따라다니는 거죠.

하나의 방편이 되는 거죠.

때에 따라서 인연에 따라서

방편적으로 그것들을 씁니다.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소유에도 무소유에도 걸리지 않아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요.

있거나 없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는 얘기죠.

그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목우의 단계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