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7. 부처님처럼 되는 길

Buddhastudy 2019. 2. 6. 21:34


오늘은 담마라마 라는 스님의 수행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스님들 계시는 곳에서

나는 앞으로 넉 달 후에 반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행이 아직 덜 무르익은 사람, 즉 깨달음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늘 의지하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하니까 슬픔에 못 이겨서 울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근심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수행이 잘 되신 분들, 이미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은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이 육신은 무상한 것이라서 때가 되면 모이고, 때가 되면 흩어지는구나.

오히려 부처님마저도 그 육신이 열반에 든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겠죠.

그런 측면에서 담담히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했습니다.

 

그때 담마라마라고 불리는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앞으로 넉 달 뒤에 반열반에 드신다고 하니,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머무르시는 동안에 열심히 수행하여 반드시 아라한과를 성취하리라.’

이렇게 결심하고는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반들이 볼 때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다 라고 하는데, 근심도 안하고 걱정도 안하고, 자기 혼자서 숲속에 앉아서 정진만 하고 있으니, 저 사람은 부처님에 대한 일종의 효성이랄까, 존경이랄까, 믿음이 없는 게 아닌가. 이런 의심이 들었을 거요.

부처님이 돌아가신다고 그러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기일 하기만 바쁘니까.

 

그렇게 의심을 하고는 부처님께 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 비구는 부처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담마라마 스님을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왜 그렇게 혼자서 숲속에 있느냐?” 하고 물어봤더니, 담마라마 스님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앞으로 넉 달 후에 반열반을 성취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직까지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께서 아직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에,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함으로써, 생사윤회를 벗어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비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혼자서 열심히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 상태를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착하구나 비구들이여, 너희는 여래에 대한 애정을 이 담마라마 비구처럼 표현해야 하느니라.”

 

부처님에 대한 사랑을 바로 이 비구처럼 해야 된다.

부처님에 대한 사랑이 부처님이 돌아가신다고 울고불고 초조 불안해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존경, 부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이다.

이런 얘기죠.

 

너희가 설령 여래에게 향이나 꽃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래를 공경하지 못함이 되느니라.

너희가 진실로 여래를 존경한다면 여래에 의해 밝혀진 담마를 열심히 수행하여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게송으로 이렇게 읊으셨습니다.

 

비구가 담마에 안주하여 담마 속에서 기쁨을 얻고

담마에 항상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을 하고,

담마에 깊은 뜻을 잘 기억하고 있으면

진실한 담마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부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꽃과 향으로 공양 올리는 게 아니다.

그보다 더 부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표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 불자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부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부처님이 돌아가심에 임해서 슬피 울고, 근심걱정을 한다면 부처님께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라고 가르친 그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우리를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존경의 표현이 존경의 목적과 맞아야 한다.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그 가르침이 위대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나의 표현은

그 가르침과 관계없는 방식으로 즉, 세속의 방식으로 부처님께 존경을 표한다면

중생들의 심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해는 되지마는

그것이 바람직한 존경의 표현은 아니다.

 

오늘 우리 많은 불자들은 부처님의 영험, 부처님의 가피를 기대합니다.

중생의 심정에서 세상살이가 힘들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를 잊고자 하는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성취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거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함으로 해서

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날 때

그것이 부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최고의 가피력이다. 부처님의 은혜다.

그거야 말로 불가사의한 기적이다.

 

가르침에 따라 정진해서 번뇌가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최고의 가피인데,

우리는 그런 부처님의 가피를 구하지 않고,

세상의 가피, 소위 재물을 많이 얻는다든지, 지위가 높아져야 된다든지, 명예를 얻는다든지, 건강을 구한다든지, 수명을 구한다든지,

하는 이런 세속적 복을 구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피로 삼는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수행정진에서 법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도리어 이렇게 수행정진 하는 사람을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고 비난을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야말로 가장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정법을 계승한 사람, 부처님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을 해주신 거요.

 

여기서도 나오지마는

너희가 설령 여래에게 향이나 꽃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래를 공경함이 되지 못한다.

참으로 여래를 공경함은 여래가 설하신 진리, 그 법에 따라 수행정진해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번뇌가 없는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르는 거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는 그날 저녁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사라수는 꽃필 때가 아닌데도 꽃이 만발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풍악을 울리고,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이 기적 같은 현상에 너무너무 감동을 했다.

 

그리고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거냐, 했을 때 부처님께서

저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올리는 공양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남기신 유언도 이 제자에게 한 말과 같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7일 만에 돌아가셨던 그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셨기 때문에 어느 해 안거를 어머니가 계시는 저 도리천에 가셔서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을 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알려지고 있어요.

 

부처님께서 안거기간 동안, 3개월 동안 지상에 없으셨던 거요.

많은 분들이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뵙고 싶어 했던 거죠.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안거가 끝나고 지상에 하강을 한다. 이 하강 한 곳이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카시아라고 하는 곳인데.

 

그래서 부처님께서 브라만과 인드라를 대동하고 이곳으로 하강을 하셨어요.

그럴 때 많은 분들이 부처님을 마중 나갔어요.

환영을 나갔다.

 

그럴 때 빨리 이곳에 와서 부처님을 환영하신 분이 한 비구니 스님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께서 부처님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극진한 예로 인사를 드리면서 부처님께 제가 가장 먼저 부처님을 마중합니다. 이렇게 기뻐서 말씀을 드렸더니 부처님께서

아니다.” 이래요.

 

그러니 바구니 스님이 주위를 다 둘러봤어. 아무도 없어.

누가 저보다 먼저 부처님을 마중하셨습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수부틴이니라.” , 수보리 존자니라.

수보리 존자는 이 곳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수보리가 제일 먼저 마중을 했습니까?”

 

그때 수보리 존자는 왕사성 밖 영축산에 계셨는데, 그곳에서 정진을 하시다가 부처님께서 하강하신다고 하니까 부처님을 마중하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쳤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치고는 그 자리에 도로 앉았다.

 

이건 뭘 말합니까?

바로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본다.

 

나의 육신을 보는 것이 나를 보는 게 아니고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본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이것도 역시 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아 해탈하는 것이 바로 여래를 친견하는 거다. 이런 의미가 되겠죠.

이것은 우리들이 잘 아는 금강경에도 이대로 들어있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들, 형상이 있는 것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혀로 맛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거요.

이게 다 상입니다. 이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이때 *허망하다는 것은 주관적인 인생이 허무하다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자세하게 풀어서 뭐라고 그럽니까?

꿈같고, 꿈은 있는 것 같지만 깨보면 없죠.

꿈같고 환상 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다.

이런 비유를 든 것은 실체가 없다. 이런 얘기에요.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이것은 금방 바뀌어 버린다. 이것을 굳이 교리로 말한다면

제법에는 실체가 없다.

제행은 항상함이 없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이렇게 말하죠.

무상과 무아를 말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은 초기 대승경전이기 때문에 아직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허망하다. 이렇게 표현한 거요.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이렇게만 표현했단 말이오.

그것을 또 알아듣기 쉽게 꿈같고, 환상 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이렇게 표현한 거요. 이것을 한마디로 공이다. 이렇게 표현한 거요.

 

그러니까 반야심경에서도 공이라고 표현했죠.

오온은 모두 다 공하다. 그래서 *오온개공. 이렇게 표현한 거란 말이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

제상_모든 상을, 비상_상이 아님을,

 

여기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하는 거요.

무릇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마치 꿈처럼, 꿈속에서는 있었지만 깨보면 없는 것처럼

사실은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

이게 제상비상이다.

 

제상을 비상인 줄 알면 약견제상비상,

제상을 비상인 줄 알면 이게 뭐요? 조견오온개공이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보면, 이 말이오.

 

*즉견여래라. 곧 여래를 본다.

곧 여래를 본다할 때 여래가 뭐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

부처가 된다. 이 말에요. 열반에 든다. 이런 얘기에요.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도일체고액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표현했단 말이오.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든지, 다 같은 얘기다.

 

이렇게 법의 진실을 깨닫는 것,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 꿈꾸는 사람이 꿈에서 깨는 것, 강도에게 쫓기던 사람이 강도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는 것, 그래서 보호받는 것, 이것이 열반이 아니다.

 

그 꿈으로부터 깨버리는 것, 그럴 때는 그 문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내가 강도로부터 피신했구나하는 안심도 아니고

저 사람이 나를 강도로부터 보호해줬구나하는 고마움도 아니고

나는 아직 강도로부터 쫓기고 있구나하는 불안도 아니고

눈을 딱 뜨는 즉시 그냥 사라져 버린다.

 

거기는 강도도 없고, 강도에 대한 적개심도 없고, 강도로부터 나를 구해줬다고 하는 은인도 없고, 그 은인에 대한 고마움도 없고. 강도로부터 벗어났다는 안심도 없다.

 

그냥 눈을 떴을 때는

꿈이네. 꿈이잖아.” 이 한마디밖에 없다.

 

이것이 열반의 경지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다.

이런 경지에 우리가 이르게 된다면, 공부하는 데 있어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부처님이에요.

 

뱃속에 있을 때는 내 몸인 줄 알았다가 배밖에 나오니 똥이구나. 더러운 것이구나.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몸속에 있을 때는 내 몸의 일부로 애지중지 했는데

몸밖에 나오니까 갑자기 더러운 것이다. 버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깨끗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것은

존재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나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벽돌이 밭에 있으면 쓰레기가 되지만,

건축 공사장에 가게 될 때는 건축자제가 된다.

벽돌이 변하는 게 아니다.

존재는 그냥 있어.

 

그런데서 불구부정이다.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다.

아름다움도 없고, 추함도 없다.

 

이 법의 실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어진다.

 

우리는 실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해서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이렇게 갖가지 애착을 부리게 되는데

법의 실상을 깨닫게 되면

바로 이 집착이 놓아져 버린다.

 

뜨거운 불덩이를 들 때, “어떻게 하면 놓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냥 앗 뜨거이 한마디면 족하다.

앗 뜨거하는 동안에 이미 놓아져 버렸다.

 

그것처럼 바로 일체가 고인 줄, 뜨거운 것인 줄 확연히 깨닫게 되면,

이미 고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가버린다.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의 첫 번째가 일체개고다.

바로 일체가 고임을 깨닫는 거다.

 

이런 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하는 것이

여래를 친견하는 길이고, 여래를 존경하는 길이고

나도 부처님처럼 되는 길이다.

 

이것을 우리 불자들이 꼭 명심하셔서 매일매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하면

매일매일 부처님을 친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