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것이 수행인가에 대해서 부처님의 교화 사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삼마짜나라고 불리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절에서 수행을 하면서 명상은 하지 않고 늘 청소만 하셨어요.
사원의 구석구석을 다니시면서 늘 청소만 하셨어요.
그런데 또 한 스님은 하루 종일 늘 명상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이 청소만 하는 스님이 그 명상하는 스님을 보고 자기 생각에는
‘저 분은 참 게으르다. 주위에 지저분하면 치우고 청소를 해야지
자기는 자기가 사는 곳뿐만 아니라 절 전체를 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는데,
어떻게 늘 저렇게 앉아만 있나,
부처님이 수행자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고 그랬는데 저 사람은 참 게으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 스님한테 가서
“당신은 수행자로서 너무 게으르오.
그러니 좀 부지런 하시오. 절에 청소도 하고 이렇게 좀 하시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이 청소를 잘하는 스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이여, 도리어 내가 당신께 충고하고 싶구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시간을 청소하는 데만 바쳐서는 안 될 것이오.
마당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한번 쓸면 족하니, 그 다음엔 탁발을 나가도록 하시오.
탁발 공양이 끝나면 좌선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의 정신을 집중 밀착시켜서, 오온의 진실한 성품을 깨달아 삼매를 얻어야 할 것이오.
혹은 밤이 될 때까지 경전을 독송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렇게 해서 수행에 매진하고도 얼마쯤 시간이 남는다면 그때는 마당을 쓸거나 방을 닦아도 좋을 것이오.”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수행자는 원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게으르게 놀아도 된다’ 이런 얘기가 아니고,
먹고, 입고, 자는 여기에 빠져서
하루 종일 자기를 잃어버리고
경계에 팔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을 못하게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일을 못하게 하는 이유는
게으르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먹고 놀라고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기 마음 챙김을 놓치지 마라.
자기 마음 챙김을 놓쳐버린다면
그것은 경계에 팔려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대중의 인기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보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데서 항상 자기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
자기 상태를 늘 체크하고 이렇게 깨어 있어라.
이것이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깨어있게 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번뇌가 일어났더라도 금방 사라지게 되고,
또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이 생겨났다 하더라도 괴로움이 금방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런데 자기에 깨어있지 못한다면
아무리 재물이 많고, 아무리 지위가 높고 대중적인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늘 수많은 괴로움 속에서 잠 못 이루고 지새워야 하고,
온갖 번뇌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 그 많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높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인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수행자는
첫째, 깨어야 한다.
그 깨어있는 것이 전제되는 범위 안에서
청소도 하고, 일도 해야 된다.
깨어있음을 놓쳐버린다면
다른 것은 수행자로서는 의미가 없다.
이걸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서 적용을 한다면,
남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남을 도우면서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수행자는 될 수가 없다.
희생과 봉사는 많은 공덕을 짓는 행위지마는
그 희생과 봉사의 과정에서 괴로워하고 잠못 이룬다면
그것은 공덕은 있을지언정, 해탈의 길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수행의 가장 요체는 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경지다.
그런데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돈을 모으고, 출세를 하고, 명예를 얻는데
사실은 그 돈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해서 괴롭고,
그것을 얻었으면 지키는데 괴롭고,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괴롭고,
사실은 이것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그러한 부와 귀와 공명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 돈을 벌려고도 하지 말고, 출세하려고도 하지 말고, 인기를 얻으려고도 하지 마라.
나무 밑이나 빈집 등 조용한 곳에서
자기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에 깨어있으며,
자기 몸의 행위 하나하나에 깨어있으며,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깨어있으며,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의 흐름에 깨어있어서
거기에 집착하지 마라.
그럴 때 우리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그런 경지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런 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거요.
이런 정진을 부지런히 하라.
자기 마음에 일어남을 놓치지 말고, 거기에 깨어있는 것을 부지런히 하라.
이것이 부지런함의 말입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되어서 일은 열심히 했다.
사원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밭을 일구고,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만 부지런히 하지, 자기 자신에게 깨어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세상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지마는 수행자로서는 훌륭한 길이 아니다.
그래서 이 분은 절에서 많은 좋은 일들은 하지만 자기에 깨어있지 못하다.
그러기 때문에 타인의 행위를 보고 분별심을 일으키는 거요.
만약에 그가 청소를 하면서도 수행정진에 몰두했다면
자신의 한발 한발 하나하나 행위에 깨어있고
자기의 숨에 깨어있고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에 깨어있어야지
타인을 보고 부지런하니, 게으르니, 왜 이건 안하느냐, 왜 저건 안하느냐,
이런 데에 마음이 뺏기지 않는다.
벌써 타인의 행위를 보고 마음을 일으켜서 부지런하니, 게으르니 하는 것은
자기에 깨어있지 못하다.
마음을 자기 쪽에 향해있지 않고 바깥으로 향해있다.
부지런함이 자기를 관찰함에 부지런한 게 아니라
바깥 경계에 끄달리는 데 부지런 한 거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 수행자가 이 분을 위해서 이렇게 좋은 충고를 해줬습니다.
그럴 때 이분이 오히려 상대의 충고를 듣지 않고,
“너 청소하기 싫으니까 그따위 소리 한다. 너 일하기 싫으니까 그 따위 소리 하지 않느냐.”
이렇게 자기를 고집했다면 그는 이 좋은 법을 들을 귀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은 그 분의 얘기를 즉, 도반의 얘기를 굉장히 귀담아 들은 거요.
‘일리가 있다. 그렇구나.
내가 출가수행을 할 때는 청소하기 위해서 출가 수행한 것은 아니다.
바로 해탈하기 위해서 출가수행을 한 거다.’
이렇게 도반의 충고를 일리 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거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분이 본래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니까, 자기 마음 관찰하기에도 아주 부지런 했습니다.
그래서 정진에 몰두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이제는 이분에게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거요.
“아니 청소를 그렇게 부지런히 해서 정사가 참 깨끗했는데
왜 요즘 청소를 안 하느냐? 왜 게으름에 빠졌느냐?
왜 주위에 흩어진 것을 보고도 왜 그냥 두느냐? 이거 당신 일 아니냐?”
이렇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한 거요.
그래서 이분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마음 집중법을 수행하지 않던 때에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것이 수행이 되는 줄로만 알고 그 일에 몰두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참된 수행법을 알아서 마음을 잘 다스려 산란하지 않게 되었소.
내 마음은 이제 일념으로 잘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를 하더라도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청소를 하거나, 어떤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런 행위를 할 때 그 행위 동작이 깨어있거나,
그런 일을 할 때 일어나는 자기 마음, 자기 감각에 깨어있다는 얘기요.
그러니까 이것은 더 이상 일이라고 할 수 없고 수행이다.
바로 이런 경지가 되어야 일과 수행에 통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이것을 선가에서는 선농일치다. 이렇게 말하죠.
화두 선을 하는 사람이 화두를 놓치고 일에만 몰두되었다면
이것은 일하는 사람이지 수행자는 아니다.
그러나 화두만 간직하고 있고, 자기의 먹고 사는 생활을 돌보지 않을 때,
인도 같으면 탁발에 의해서 먹고 살 수 있는데,
중국이나 한국에 오면 이 얻어먹는 것을 굉장히 부정시 하는 이런 문화속에서는 얻어먹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어쨌든 최소한도 먹는 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먹어야 된다.
그러니까 그 먹는 행위를 할 때, 자기에 깨어있음을 놓쳐버린다면 그냥 세속생활을 된다.
깨어있음만 있지 육신을 보전할 최소한도의 음식도 구할 수 없다면 결국은 육신이 죽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육신을 보존할 최소한의 음식을 얻기 위한 행위
즉, 인도에서는 탁발을 하는 그 과정에서도 깨어있듯이
농사를 짓는 그 과정에서도 깨어있다면 이것은 세속생활이 아니고
즉,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세속생활이 아니다.
먹고 사는 데 집착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다.
하나의 수행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럴 때 ‘선농일치’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바로 이 수행자는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 근본에 서고, 여타의 문제가 부수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스님은 바로 생활하는 것이 주가 되고, 해탈의 그 목표를 놓쳐버렸다.
그러기에 도반의 얘기를 듣고
‘아, 내가 출가한 목적이 해탈에 있다.
그 해탈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다음에 생활에 대한 것도 함께 해 나갔다.’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다른 스님들이 생각할 때,
오? 저 비구는 원래 수행도 잘 안하고, 청소나 하고, 밥이나 얻어먹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말하는 걸 들으니까 자기가 도인인척 한다. 자기가 도인인 것처럼, 당시로 말하면 아라한인 것처럼 말한다. 저거 거짓말 한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
“저 비구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았다고 말하고, 마음 집중이 안 된 사람이 마음 집중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는 이미 번뇌를 여읜 비구다.”
이렇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가를 해주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전에는 그가 마음집중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마음 집중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빛을 나타나게 되었나니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절에 여러분들 같으면 입문을 할 때,
그렇지 않으면 스님들 같으면 출가를 할 때는
다 큰 포부를 갖고 출가를 합니다.
그 포부라는 것이
나도 해탈을 해야 되겠다.
나도 열반을 증득해야 되겠다.
이렇게 큰 뜻을 갖고 출가를 한다.
그런데 이 큰 뜻을 갖고 출가를 할 때,
그것이 욕심일 때는 해탈과 열반이라고 하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마치 사업하는 사람이 ‘큰돈을 벌어야 되겠다.’
정치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되겠다’하는 그런 욕심에 매달리듯이
해탈과 열반을 욕심으로 얻으려고 한다면,
그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도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수행이 안 된다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욕심이 아니고 ‘정말 내가 해탈을 성취해야 되겠다.’
이렇게 큰 원을 가지고 출가를 해서 정진을 할 때는
첫째 욕심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출가할 때는 큰 원인 것 같은데,
그 뒤에 수행의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그것을 욕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하면 내가 ‘도인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은
‘번뇌 없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이거보다는
‘세상에서 알아주는 높은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내가 뭘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존경을 받아야 되겠다.’
이렇게 욕심이 결합된 그런 마음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기 때문에 바로 해탈이 증득되지 않는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승납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지위도 높아지고, 그래서 절에서는 큰 스님 소리를 듣는 지경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자로서는 자꾸 자꾸 절에 오래 다니다보면, 거사님, 보살님의 지위에 올라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욕심에 뿌리를 두고 불법을 공부하게 되면
그는 마음이 괴로움을 떠난다고 하는 열반은 경험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를 할 때는
해탈의 길은 욕심을 버리는 데에 있지,
욕심으로 해탈을 얻을 수는 없다.
자기 견해를 버리는 데서 해탈의 길이 있지,
자기 견해를 고집하는 데서는 해탈의 길이 없다.
어리석음을 버리는데 해탈의 길이 있지,
어리석음을 움켜쥐고는 해탈의 길이 없다.
그래서 탐진치 3독을 버려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불법에 귀의했다. 즉, 절에 다닌다라고 해서 해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에 다니는 목적이 무어냐 이게 중요한 거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그대로 자기도 해보면서
그 법을 경험해야 한다. 체험을 해야 된다.
그래서 온갖 번뇌가 있다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을 써보니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말을 해보니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을 해보니까
‘아, 이게 번뇌가 사라지구나.
괴로움이 사라지구나. 온갖 재앙이 사라지구나.’
이런 경험을 했을 때만이
우리가 법에 귀의했다.
단마에 귀의했다.
법의 제자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잘못 읽으면
‘절에 와서 청소하면 안 된다.’ 이렇게 들으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수행의 본분을 놓치고,
다른 데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이 수행의 본분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자비심으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도반들을 위해서
틈틈이 청소도 하고, 틈틈이 공양도 짓고, 틈틈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도와주는 이런 일들을 할 때
우리가 훌륭한 수행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나무만 하고, 하루 종일 농사만 짓고, 하루 종일 청소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마음의 번뇌가 없다면,
그가 자기의 일체 마음이 일어남과 행위에 대해서 깨어있다면,
선으로 말하면 그가 가진 화두가 여일하게 들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를 외형의 모습만은 보지 않고,
그를 수행자라고 이름 부를 수가 있다.
그런데서 지금 이 부처님의 교화사례는
본분을 놓쳐버리고 생활하는 사람에게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이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어떤 형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해탈의 길을 나가야 한다.
이런 거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도 절에 다니면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마음의 갈등 이런 것들이 법에 귀의해서 해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절에 오면서 오히려 더 번뇌가 는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절에 와서 봉사를 하면서 오히려 더 분별심이 일어나서 괴롭다든지 하면
이것은 법에 귀의하는 태도를 지금 놓치고 있다.
그러니 봉사를 안 하면 해결이 되느냐? 그게 아닙니다.
바로 이 일어나는 분별심을 수행의 과제로 삼아서
바로 이러한 경계 속에서도
이러한 분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과제로 삼아버리면
이미 봉사가 수행이 된다.
그런 것을 꼭 명심을 하셔서
모든 불자는
왜 우리가 불법에 귀의했나 하는 근본을 잊지 않도록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법륜스님 > 부처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9. 수행자는 청빈자 (0) | 2019.07.05 |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8. 진리란 무엇인가? (0) | 2019.07.01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6. 죽음에 대하여 (0) | 2019.06.14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5. 욕심이 있기 때문에 좌절이 생긴다 (0) | 2019.06.06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4. 마음의 문을 열면 외롭지 않다 (0) | 2019.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