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아이를 그리고 있거든요. 우리 딸은 이런 사람이 되야 된다는 환영을 그리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 환영, 자기가 그린 틀과 실제 딸이 안 맞을 때 일어나는 게 실망이죠. 실망할 거는 없어요.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내 자신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너무 좋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 좋게 그린 내 상에서 볼 때 현실의 나가 부족하니까 실망을 하는 거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남편이든 아내든, 선생이든 스님이든 누구든 너무 좋게 그리면 현실의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돼요? 실망하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환상을 가지고 현실을 실망하는 거요. 그러니까 환상에서 깨어라 하는 것은 그런 환영을 갖지 말고 실제를 보라. 실제 있는 그대로. 나에 대해서도 실제를 보고, 부모에 대해서도 실제를 보고, 스님에 대해서도 실제를 보고, 또 자식에 대해서도 실제를 보라. 이런 얘기거든요. 이게 아까 진리를 본다는 얘기란 말이오.
그러니까 어머니는 그런 어릴 때 공부를 잘했다 하는 그런 몇 가지 요인으로 해서 자신에게 대해서 지나친 환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거는 언젠가는 이제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되거든요.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이 누구의 환영에 끄달려서 살게 되면 자기 삶이 없어져요. 남이 그려준 그림에 자기를 맞추고 살아야 되니까 너무 부담스러워지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는 게 좋죠. 그것을 뭐 실망 안 시킨다. 시킨다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조금씩 조금씩 사실대로 얘기하는 게 필요하다. 나는 내 인생은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충격적으로 가서 한꺼번에 폭탄선언하고 그러지 말고, 그냥 조금씩 조금씩 사실을 보여주고, 어머니가 거기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신앙문제라든지 이런 것도 숨길 필요는 전혀 없고, 사실대로 얘기하면 되는데.
그러나 그 신앙이라고 하는 문제는 굳이 내가 불교 신잔데 내가 불교 신자라고 굳이 밝힌다고 불교 신자가 되는 건 아니다. 기독교 신자는 내가 신자면 확실히 입장을 밝혀라. 하지만, 불교는 그래 안 가르쳐요. 불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내가 불교라는 거를 밝혀서 상대가 좋으면 밝히고, 상대가 그거 갖고 힘들어하면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불교는 그렇게 형식 논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얘기한 데로 형식논리는 상이잖아. 그죠? 상에 집착하지 마라. 본질을 꿰뚫어 보라.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기독교니 불교니 이렇게 나누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진리가 어떤 것이 있느냐? 이렇게 봐야 되고. 또 불교라는 이름 속에서도 진리가 아닌 것들이 여기 묻어 들온 게 뭐가 있느냐? 이런 거를 벗겨 내는 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자세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불교 기독교라는 그런 종교적 대립 관계에서 어머니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고 이제 자꾸 더 내가 더 본질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더 진실의 세계에 접근해가면 언젠가 어머니하고 대화가 될 때가 있고, 또 대화가 안 되도 내가 구애받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구애받을지 몰라도 나는 어머니 때문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틈나는 대로 그냥 보여주는 게 제일 나아요. 내 뭐 나쁜 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아니라.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고.
스무 살이 넘었는데 부모를 의식해서 거기에 자꾸 맞춰서 살라. 그러면 자기 어깨가 너무 무거워져요. 그러면 생기가 자꾸 발랄 안 해지고, 자꾸 이렇게 억압심리가 생겨요. 자꾸 쭈그러들어요. 그러고 자꾸 가식적으로 해야 되고. 그래 되면 젊은이답지가 못해지죠. 으음. 그래서 그냥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 내 인생을 내가 살아야 되니까 뭐든지 드러내놓고, 실망할만한 건 실망시키세요. 어차피 언젠가는 벗어나야 되거든요. 실망을 시키면서 지나친 충격을 주지 않고 점점 충격을 주면서 나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게 부모자식간의 가장 좋은 점이다. 네.
Q2
네. 어~ 자기가 뭐든지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고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고, 대신 결정해줄 수가 없어요. 전에도 한번 간섭을 했잖아요. 간섭을 했기 때문에 자기도 간섭하고 싶은 생각이 남아있고, 친구도 자꾸 요청을 하는데, 이 요청을 하는 핵심은 고통을 반분하자는 거요. 다시 말하면 안 됐을 때 잘못됐을 때 니가 반 책임을 져라. 이게 상담의 핵심이거든요.
네가 동의하지 않았냐? 너 때문에 내가 했다. 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니까. 내가 괜히 덤터기를 쓸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친구가 전화 오면 안 들어주면 친구가 아니죠. 친구가 괴로워하면 얘기하니까 들어주면 되고, 그다음에 대답을 해줘야 된다. 하는 강박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 안 들어주면 친구를 외면하는 거고 그거에 대답을 자기가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 것은 건방진 데서 나온 거요. 자기의 영역이 아니에요. 자기의 영역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저기 대우그룹 회장이 나한테 와서 “아이고 스님 부도나려고 그러는데 10조만 좀 빌려주세요.” 이러면 내가 대답할 의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런데 그건 걱정이 안 돼요. “아이고 그러세요. 아이고 힘드시겠네요.” 이러고 끝나면 돼요. 친구가 전화 와서 “나 이거 깎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하면 “아이고, 그래 지금도 예쁜데.” 이렇게만 얘기하면 되지. 하라 마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지금도 예쁜데.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그래도 하면 어떻겠니?” “아이고 그래도 예쁜데.”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나는 예쁘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예쁘기 때문에 너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지를 말아요.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된다? “그냥 예쁜데. 아이고 그대로 예쁘네.” 이렇게만 얘기하면 돼요. 그러면 “해라.” 기분 나쁘니까 “그래 해버려라. 네 맘대로.” 이렇게도 말하지 말고, “예쁜데 뭣 때문에 하나? 하지 마라.” 이렇게도 말하지 마라. 그러면 내 에너지가 든다.
가장 쉬운 말은 어떻게 한다? 들어주고 “아이고 그대로도 다 예쁘네.” 이렇게만 얘기하면 돼. 그러면 하나도 힘 안 들어. 전화 오면, 문자 메일로, ‘어떻게 할까?’ 하면, ‘그냥 예쁘다.’ 이러고, 또 문자 오면 ‘예쁘다.’ 이렇게 답주고, 전화 오면 받고 가만히 다 들어 주고 “아이고 그래도 예쁜데” 이렇게만 얘기하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걸 고민하고 그래. 그래도 고 뒤에다 뭐라고 그러냐 하면 “그래도 예뻐.”
갈릴레오 얘기 못 들었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런 것처럼 “내가 뭐가 예뻐. 됐어.” 이래도 “나는 예뻐.” 이렇게 하면 돼요. 그런데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이게 선에서 남에게 구애를 받아서 우리는 남의 말과 행동에 자꾸 끌리거든요. 자꾸 거기에 끌려가 자꾸 대꾸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거는 경계에 끄달린다. 내가 경계에 끄달릴 필요가 없다. 그가 나에게 뭐라고 하든 내가 거기에 구애를 안 받으면 돼.
그러니까 선에서 조주스님한테 와서 불교가 뭐냐? 부처님이 뭐냐? 깨달음은 어떻게 되느냐? 진리가 뭐냐? 이렇게 물을 때, 조주스님이 딱 오직 한 가지.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그 말이 무슨 얘기요? 쓸데없이 그만 지껄이고 저기 가서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이 말이오. 뭐라고 물어도 답은 뭐라고 한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이러는 거요. 그런 것처럼 뭐라고 대답하든 뭐다? “예쁘다.” 뭐라고 뭐라고 하면 “그래도 예쁘다.” 갈릴레오처럼 그렇게 얘기하면 돼. 그러면 아무 뭐, 갈등이나.
그런데 처음엔 자기가 기분 나빠 해도 그래도 친구가 시종일관 너는 예쁘다고 해주면 나중엔 기분 좋을까? 안 좋을까? 기분 좋겠죠. 그러면 잘못해도 책임 안 지고, 안 해도 지지해주고, 친구가 금 갈 일도 없고. 그러니까 고민할 일도 없고 답은 딱 한 가지. 뭐라고? “예쁘다. 그래도 예쁘다.” 이거 하나만 딱~ 쓰고 뭐라고 답이 와도 “그래도 예쁘다.” 그렇게만 써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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