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아주 좋은 질문 하셨어요. 어~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우리 뜻하는 데로 우리 인생이 됩니까? 안됩니까? 되요? 안 돼요? 아니 마이크 쥐고 얘기하세요. 잘 안되죠. 그런데 어떤 놈은 나쁜데도 잘 사는 사람 있죠. 착한데도 못사는 사람도 있죠. 착한데도 빨리 죽는 사람도 있죠. 공부도 못하는 게 출세하는 사람도 있죠? 못생긴 남자가 예쁜 여자 얻어 사는 경우도 있죠? 가만 보면 어떤 거는 아~ 저 사람 착하니까 저렇구나. 저 사람 참 마음이 좋으니까 저래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이해되는 것도 있지마는 진짜 이해 안 되는 것도 많잖아. 그죠?
그럴 때 ‘아~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정해져 있구나. 그거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왜? 이해가 안 되니까. 그래서 고래로부터 3가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데 3가지가 있었어요. 인생이란 게 운명이란 것 어떻게 해서 결정이 되느냐? 노력한다고 되느냐? 아니다. 이거는 이 세상에 날 때 운명이 결정이 된다. 그러니까 자기 의지로 갖고 안 되고 이것의 주인이 따로 있다. 이 말이오. 그 1_신이 있다. 신이 우리의 운명을 주관한다. 신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냥 무대 위에 가서 연극하는 사람이오. 꼭두각시요.
그래서 신이 우리의 모든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이게 이제 지구 상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중에 **부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인생이 뜻대로 안 되면 하늘을 원망하는 거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 들어봤지? 작품 잘못 썼다. 이 말이요. 그다음에 2_인생을 보면서 인생이란 게 태어날 때 그 사람이 “니는 이생을 이렇게 살아라.”라고 태어나는 그 생년월일시가 무슨 년에 태어났느냐? 무슨 띠가 뭐냐? 몇 월에? 며칠에? 몇 시에? 태어났느냐? 이 네 가지가 그 사람 삶을 딱 정해버린다. 중국에서 나온 거요. 요걸 뭐라고 그런다?
사주라 그래. 사주팔자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래서 사주팔자 타령을 하잖아요.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단 말이오. 우리가 궁합을 본다. 사주를 본다. 이런 건 다 운명을 좀 알고 싶은 거요, 하도 내 뜻대로 안 되니, 도대체 내 운명이 어떻게 됐나? 작품이 도대체 어떻게 됐냐? 우리는 늘 현재밖에 모르지. 내일 무슨 장면이 나올지 모르는데 그걸 좀 넘겨가며 보겠다는 거요. 뒤에. 그래서 자꾸 사주보는 거요. 여자는 어떤 여자? 남자는 어떤 남자? 만나 애는 몇 두고? 뒤에 돈이 좀 벌리겠는지? 계속 이렇게 곤궁할 건지? 프로그램을 미리 좀 보겠다는 거요.
이거는 그러니까 자꾸 보는 것, 미리 좀 봐가지고 해결책이 없나 하는 거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이 좌지우지할 때 하느님한테 뭐해야 된다? 잘 보여야 되지. 이거는 뭐가 나온다? 주로? 비는 거. 좀 잘 봐주세요. 좀 비는 게 나오고. 사주를 보는 거는 비는 거 별로 없어요. 미리 보는 거요. 그걸 좀 잘 보는 사람, 천기누설이라고 그러죠. 천기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좀 미리 물어보려는 거에요. 미리 물어보면 뭐해요? 정해져 있으면. 그죠? 그래도 거기 뭐가 있다?
비방이라는 게 있죠. 그죠? 방서. 이런 말 들어봤어요? 그래 정해져 있지마는 조금 바꿀 수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요. 그다음에 3_인도에서 나온 건 뭐에요? 네가 전생에 지은 그 복과 죄에 의해서 니는 이생에 요렇게 요렇게 그 복을 받고 그 죄를 지어라. 라고 이 태어날 때 네 전생의 너를 딱 정해 놨다. 이 말이오. 이런 경우에는 또 뭐가 알고 싶어요? 전생이 알고 싶어요. 전생에 내가 도대체 뭐했을까? 왜? 이걸 알면 현생을 알 수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늘 전생을 알고 싶다.
이 세 가지 우리가 뜻대로 안 되는 인생에 대한 으음. 그 답답함에서 나온 거요. 그래서 여기에 나온 게 인생은 정해져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를 뭐라고 그래요? 숙명이라고 그래요. 알았어요? 이 세 가지가 다 숙명론에 속합니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거나, 하나는 전생에 의해서 정해져 있거나 하나는? 태어날 때 정해져 있거나. 그런데 부처님은 이걸 부정했어요.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으음. 운명은 바꿔나갈 수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내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게 불교로 말하면 업입니다. 알았어요? 업. 또는 업식. 까르마에요. 그런데 인도에서 쓰는 불교가 아닌 인도에서 쓰는 운명은 앞에서 얘기한 데로 “너는 전생에 요렇게 해서 요렇게 살게 돼 있다”는 숙명론적 업관이에요. 질문하신 거는 인도철학적 관점이에요. 힌두교의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지금 얘기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게 인도의 철학이라니까. 불교가 아니라니까. 그게 만약 불교라면 내가 한 대 때렸으니까 반드시 한 대 맞는다는 거는 보복 아닙니까? 그죠? 그럼 부처님이 보복의 원리를 가르쳤겠어? 응? 보복의 원리 아니오.
우리가 말하는 인과응보라는 거 있죠. 인과응보라는 게 자연적 보복의 원리 아닙니까? 자연에 의해서 저절로 보복을 받는다. 하는 원리라는 말이오. 그건 불법이 아니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불교라고 알고 있는 윤회, 인과응보 이거는 99.9%가 불교 아닌 설이에요. 으음.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헷갈리는 거요. 불법은 헷갈릴 이유가 없어요. 투명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듣고 헷갈리면 좀 생각을 다시 해봐야 되요. 우리가 불교라고 알고 있는 이게 이 세 가지 중에 전생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이거는 인도의 힌두교사상이다. 이 말이오.
이거를 오늘 대부분 불교가 이건 줄 알고 있다. 이 셋 중의 하나가 불교인줄 알고 있는데, 부처님은 이 세 가지가 다 잘못됐다고 말한 거란 말이오. 이건 숙명론이다. 방법은 틀리지만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뭐요? 운명은 정해져 있다. 이 얘기란 말이오. 부처님 말씀은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런 얘기요.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운명이 어떻게 해서 전개되느냐? 현재 이전에 내가 해온 행위, 이 까르마죠. 이것이 현재와 미래, 과거에 내가 해온 것이 현재와 미래의 영향을 준다. 이거요. 으음.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은 건 아니다. 영향을 준다.
만약에 내가 특별한 노력이 없다면 거의 100% 그대로 규정을 받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이런 원리를 모르니까 결국은 전생이 현생을 규정한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렇지가 않다. 영향을, 절대적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다. 큰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걸 바꿀 수가 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누가 담배를 빡빡 피우고 있어요. 나하고 한 시간 얘기하는데 한 갑 피워. 완전 골초야. 그럼 내가 이 사람보고 “너, 어제 담배 피웠지?” 맞아요? 안 맞아? 틀려? 맞아? 100% 맞지. 그럼 저분이 나보고 그래. “아니, 스님 어제 나 안 만났는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걸.”
“이야~ 신기하다. 그걸 안보고 어떻게 압니까?” 안 봐도 알 수 있나? 없나? 알 수 있지. 딱 보고 “내일도 담배 피울 거야.” 이랬어. 맞아? 안 맞아? 맞아. 그런데 중요한 거는 너 내일 담배 피울 거야? 하는 거는 100%는 안 맞습니다. 이 사람 하루에 한 갑 피우더라도 내일 끊을 가능성도 있어요? 없어요? 있어. 으음. 그런데 이 사람의 어떤 특별한 다른 노력이 없다면 그것도 100% 맞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요게 문제요. 그러니까 이 까르마라는 거는 확정돼 있는 게 아니고 까르마라는 거는 변화하는 거요.
없던 데서 생성되기도 하고 생성돼 있는 것이 뭐하기도 한다? 소멸하기도 한다. 인도에서 쓰는 까르마는 변할 수 없는 거고. 불법에서는 그 까라마라는 용어는 같이 쓰이지마는 뭐할 수 있는 거다? 그건 변화하는 거다. 할 수 있는 거다가 아니라. 변화하는 거다. 변화하기 때문에 뭐 할 수도 있다? 소멸할 수도 있고, 변화한다는 말은 생성될 수도 있다. 생성 소멸하는 거다. 그래서 제행은 뭐다? 무상하다. 그래서 이 무상이 굉장히 중요한 거요.
무상이 뭐가 중요하냐? 변할 수 없다 하면 여러분들이 운명을 바꿀 수가 없어요.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요. 그래서 그러면 여기서 일단 바꿀 수 있다고 해야 어떻게 바꿀 거냐라는 방법 문제 아닙니까? 그죠? 바꿀 수 없다면 방법론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 데서 제생이 무상하기 때문에 2_죄인이다. 하면, 이 죄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 이 죄라는 것은 한번 지어놓으면 영원히 간다 하면, 이거 노력해봐야 안 되잖아. 그지?
그런데 이게 소멸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어떻게 소멸할 거냐. 는 게 과제가 된단 말이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중요한 거는 ‘죄라 하는 거는 죄라 할 실체가 없다.’ 이게 중요한 거요. 이게 무슨 소리다? 무아설이에요. 그러니까 무상과 무아가 사실은 우리를 고통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고 고통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뭐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이 무상과 무아가 굉장히 중요한 거요. 이게 불교철학의 핵심입니다. 무상과 무아가.
그래서 너가 지금까지 담배를 피워서 담배의 습관이 들었다. 담배가 중독이 되었다. 습관을 뭐라고 그런다? 까르마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의해서 오늘도 피우고 내일도 피운다. 까르마가 그의 삶을 어때요? 규정짓는다. 이 말이오. 그런데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오늘이라도 그 까르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버리면, 즉 피우고 싶은 욕망이 있더라도 내가 거기 안 끌려가고 내가 안 피워버리면 어떻게 될까? 오늘 열 갑을 피웠다 하더라도 내일 안 피울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것의 영향을 받지마는 거기 내가 끌려가지 않으면 업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나는 그 까르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한번 벗어났다고 다신 안 나타나는 게 아니고 시시때때로 계속 일어나는 거요. 요번에 딱 피우고 싶을 때 참아서 안 피웠다고 해서 다시 안 나타나는 게 아니라 1초 후에 또 일어나고, 2초 후에 또 일어나고, 3초 후에 또 일어나고, 1시간 후에 또 일어나고, 2시간 후에 또 일어나고, 사흘 후에 또 일어나고 계속 일어나니까 고때고때 때때로 어떻게 해야 된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아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하니까 무지. 무지에요. 또 무의식적으로 이 말 하죠. 무의식 세계의 지배를 받아서 우리가 피워버리는 쪽으로 끌려간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된다? 안 끌려가려면 찰나찰나에 깨어있어야 된다. 순간순간에 깨어있어야 된다. 그래서 여기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이게 수행이에요. 그러면 과거에 어떻게 했든 관계없이 나는 그 과보를 안 받을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는 이미 과거에 담배를 피웠던 인연의 뭐가 된다? 과보지. 그러나 그게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피울 거냐? 하는 거는 내가 안 따라 갈 수도 있는 거요. 요걸 정확하게 심리현상을 분석해놓은 걸 뭐라고 한다? 12연기라 그래요. 12연기. 그 12연기에서 핵심은 수와 애에요. 수라는 것은 담배 연기를 탁 맡았을 때 호의적인 반응. 흡~ 할 때 기분이 싹 좋게 일어나는 거 있잖아. 흡~ 이러면. 그런데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흡~ 했을 때 호의적인 반응이 일어나나? 거부 반응이 일어나나? 으음.
그러니까 요게 왜 어떤 사람은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거부반응이 일어나느냐? 그거는 그 사람의 과거의 습관이에요.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지만, 습관이 없는 사람은 거부적 반응이 일어나는 거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면 딱 이 마음이 어떠냐? 피우고 싶은 욕구로 딱 전환을 해버려요. 그러면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과 욕구로 전환하는 그 사이에서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면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피우고 싶은 욕구로 전환하는데.
그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는 걸 딱 알아차리면 어떠냐? 욕구로 전환이 안 돼. 부싯돌을 탁~ 켜면 옆에 솜이 있어서 탁 달라붙으면 불이 붙는데. 솜을 치워버리면 어떠냐? 부싯돌을 아무리 탁탁탁 켜서 불이 번쩍번쩍해도 불이 안 달라붙는다. 여기서 끊는 키에요. 그런데 요게 달라붙었다. 그래서 이미 피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그러면 두 번째 단계로 제동을 거는 거는 피우고 싶지만 어떻게? 참아야 된다. 피우고 싶은 거를 참는 건 뭐고? 계율에 속하는 거요. 그런데 호의적 반응이 일어나는 걸 딱 알아차리고 멈춰버리는 건 뭐다?
요거는 선정을 닦는데 속하는 거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놓쳤을 때는 계율로써 차단해야 되고, 그런데 놓쳐서 이미 일어난 거를 억제하려고 할 때는 싸움이 일어날 거 아니오. 욕구는 일어났는데 그걸 안 하려고 그러면. 그래서 계율은 어기기도 하고 또 지키기도 하고 이런단 말이오. 그리고 여기 대결정심이 필요한 거요. 그럴 때는 콱~ 죽기 살기로 이걸 아무리 피우고 싶더라도 탁 끊는 용단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런데 요 계율만 갖고 수행이 되는 게 아니오. 이건 힘들어. 내 싸워야 돼.
그러니까 요게 호의적 반응이 딱 일어날 때 딱~ 알아차려 버리면 어떠냐 하면 욕구로 이전이 안 되니까 힘이 안 들어. 싸우는 게. 요건 알아차림만 있으면 돼.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못 알아차려요. 무지 때문에. 그냥 넘겨버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선정을 닦는 게 나오는 거요. 그 선정을 닦게 되면 어떠냐? 반짝반짝하고 올라오는데 늘 딱~ 자기 마음에 아주 그러니까네. 이 깨어있어야 된다는 거요. 수, 느낌, 필링이 일어날 때를 그 찰나찰나를 딱 알아차리면 반응만 있지 거기에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과거의 업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불법은 자기운명을 자기가 주인이 돼서 가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을 자기 운명의 주인, 이렇게 말하는 거요. 이 까르마가 있으면, 예를 들면 담배 연기가 탁 나면 내가 피우고 싶은 마음을 탁 일으키고 담배를 피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담배 연기의 지배를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지. 저 사람이 나 보고 칭찬을 하면 입이 빙긋이 벌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아이고, 스님 법문 참 좋으십니다. 너무너무 좋아요. 아이고 좋아요?” 이러면 스님 기분 좋으나? 안 좋으나? 기분 좋지. 기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좋기는 뭐가 좋아? 그게 무슨 법문이라고 해.” 이렇게 칵 쏘아버리면 기분이 나쁘나? 안 나쁘나? 나쁘지. 그럼 내 이 기분 좋고 기분 나쁨이 저 사람의 말에 뭐 받고 있다? 영향을 받고 있지. 내가 저 사람의 종이야. 왜 이렇게 내가 저 사람에 따라 울고웃고 하는게 왔다갔다하느냐? 그건 저 사람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 내 까르마가 거기에 반응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게 좋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거기에 대한 거부반응이 드는 걸 내가 딱~ 알아차리면 칭찬해도 거기에 빨려들지 않고, 비난해도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못 하는 거요. 나는 그로부터 자유롭고, 그가 나를 칭찬하든 비난하든 그건 누구 문제다? 그의 문제고 나는 거기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 이게 바로 내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다. 여기계신 여러분들은 자기 잘나서 제법 설치고 다니는데, 그게 거의 바깥경계의 여러분이 노예에요.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지금 가을에 가랑잎에 바람이 불면 막~ 하늘에 막~ 휘날리죠. 가랑잎이 지가 뭐 나는 줄 알아. 그런데 그 바람에 의해서 나는 거요. 바람이 멈추면 어느 개굴창에 떨어질 줄 몰라요. 오늘날 내가 뭐 좋고 싫고 하지만 이건 다 바람이라고 하는 이 경계에 그냥 놀아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굉장히 허망한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이다. 불행이다. 이런 거는 순식간에 뒤집어질 수 있는 거다. 주인이 아니에요. 인생의 주인이 아니에요.
이제 그런 데서 불법은 바로 우리의 운명을 메인, 정해진 숙명이 아니고, 운명을 자기가 창조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지나? 내가 저 사람을 한 대 때렸다 이 말이오. 그런데 저 사람이 나를 한 대 쳤어. 그랬을 때 이제 첫 번째 “오 한 대 때렸으니까 한 대 맞는 거 당연하지.” 이렇게 받아들이면 한 대 맞았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 또 한 대 때리려는 마음이 드나? 안 드나? 안 들면 이건 여기서 끝나버리죠. 이것도 운명을 자기가 바꾸는 거요.
질문자는 한 대 때려놓고 안 맞는 방법이 없느냐? 이걸 연구한단 말이오. 때려놓고 안 맞는 방법이 없느냐? 그거는 이제 인연은 지어놓고 과보를 피해 가려는 도둑놈 심보요. 그러니까 때려서 설령 한 대가 돌아오더라도 이 인연의 원리를 알게 되면 이 맞는 거를 “오 그래 당연히 때렸으니 맞아야지. 돈을 빌려줬으니 어때요? 갚아야지.” 이 말이오. 그런데 지금 질문은 돈은 빌리고 쓰고는 갚지는 않는 법이 없겠느냐? 이런 얘기란 말이오. 그건 원리에 맞지 않다는 거요.
그러니까 설령 그런 것이 돌아올 때, 지은 인연의 과보가 돌아올 때 과보를 뭐해라? 피하지 마라. 피하지 않는 마음을 내면 과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고 2_ 그런 과보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라? 그런 인연을 짓지 마라. 그러면 그 인연의 과보가 끊어져 버린다. 이렇게 원리를 찾아서 공부를 해가면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여러분들이 부부가 같이 살면서 저 남자 때문에 내가 인생을 늘 괴로워하잖아요.
저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괴로워하고, 저 남자가 술 먹고 들어온다. 저 남자가 월급을 받아 집에 안 가져오고 자기가 다 썼다. 괴로워하고 이러는데, 자긴 똑똑한 줄 알지만 늘 그 남자 쳐다보고 인생을 전정 긍긍하고 살아야 되요. 그게 자기는 똑똑다고 하는데 그게 바보 같은 짓이오. 놔두고 나는 내대로 사는 거요. 나는 나대로. 으음. 그게 안 맞으면 요즘 같은 세상에. 옛날에는 안 맞아도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하는 길도 사회가 열어놨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걸 열어놨어요? 안 열어놨어요? 열어 놨죠.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문제를 풀 수도 있고, 단물이 좀 있어서 그거는 싫지마는 또 좋은 거도 있어요? 없어요? 좋은 것도 있어. 다 나쁘면 같이 사나? 안 사나? 안 살아요. 요거요건 나쁜데 요거요건 좋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요거요거 좋은 건 내가 취하고, 요거요거 나쁜 건 니가 좀 고쳐라. 이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그러니까 요거요것이 싫으면 좋은 것도 같이 붙여서 버려버리든지. 요거요것이 좋으면 나쁜 것도 같이 섞어서 취해버리든지. 결론을 내야 되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요러요런 문제도 내 맘에 안 드는 것도 있지만 요거요건 내 맘에 드는 것도 있다면. 요게 더 점수가 많다면 어때요? 요건 내가 가지고, 요걸 감수해야 되요. 그걸 고치려고 하면 안 돼. 왜? 나도 잘 안 고쳐지는데 남 고쳐질까? 그럼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그거 고쳐서 이익 좀 더 보려다가 죽을 때까지 노예 생활해요. 그런 거는 딱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내 얘기 하죠. 탁 포기를 해버리면 이익분만 탁 취하면 되요. 오히려 그쪽은 이기적으로 좀 영악하게 놀아라. 이 말이오.
그런데 왜 그렇게 순진해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눈을 반들반들하게 살면서 늘 바보같이 살아? 영악하게 이때 지혜로워야 된다. 이 말이오. 어차피 살려면 좋게 생각하고 사는 게 나한테 좋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살지를 마라. 그런데 내 욕하면서 같이 살아요. 이게 이제 인생을 피곤하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스님이 살까요? 말까요? 니 알아서 해라. 살고 안 살고는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살아야 될 형편인가?” “예.” “그러면 마음을 이렇게 갖고 살면 행복해지고 이렇게 갖고 살면 불행해진다.”
“헤어져야 할 형편인가?” 남편이 죽었다 이 말이오. 그럼 내가 헤어지기 싫든 좋든 헤어졌어요? 안 헤어졌어요? 헤어졌지. 헤어졌으면 그러면 마음을 이렇게 갖고 살면 행복해진다. 이렇게 이렇게 가지면 불행해진다. 그러니까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경우는 내가 선택하는 거요. 으음. 내가 행복해지려는데 안 됩니다. 하면 “어~ 그건 마음을 이렇게 이렇게 잘못 써서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쓰면 행복해지는 거네요.” “아 그러네요. 맞습니다.” 이렇게 쌈빡하단 말이오. 언제나.
그런데 잘 안돼요. 그거는 습관이 들어가.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걸 알았는데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자꾸 이렇게 일어나서 정신을 잃어버리니까. 엉뚱한 데로 자꾸 가니까 문제니까 그건 조금 연습이 좀 필요하다. 그게 수행이오. 연습이 필요한 게. 쉬워요. 어려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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