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얘기하는 무아라고 하는 것하고
유학에서 얘기하고 있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저는 논증을 했습니다
범주가 다르니까 이러한 논증은 의미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범주가 다르다고 해서 그런 논증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종교에 해당하는 논리를 학문에다가 쓰는 것이 과연 잘못된 논증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논증은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얘기할 때는
진위를 가를 수 있는 논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문제, 믿음이라든지, 신앙이라든지, 사상이라든지, 이념이라든지
이런 거는 논증이 무의미해요.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사람이어도 말입니까?
제가 얘기했던 그 아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거고, 나라고 하는거는 개인인 거고
우리 모두가 물질적으로 나라고 하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거에 대한 접근이 종교적으로 한 접근이건, 학문적으로 한 접근이건
똑같이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을텐데...)
검토해 보는 건 좋은데 논증이라는 건 검토해 본다가 아니에요.
종교적이라는 것의 핵심은 믿음이라는 문제거든요.
믿음의 문제는
논증의 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요.
논증 할 수도 없고, 논증의 대상으로 삼는 거 자체가 잘못됐다. 이런 얘기에요.
믿음의 문제는...
예를 들면 신이 있느냐? 없느냐?
둘이 지나가다가
“나 귀신 봤다” “나 못 봤다”
이런 거는 논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거요. 심리현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들은 늘 ‘신이 있느냐? 없느냐?’ ‘신은 죽었다’ 이런 얘기하잖아.
논증할 필요가 없는 거요.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그러고, 한 사람은 신이 없다 할 때, 이걸 논증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누구 말이 맞노? 이렇게 접근하는 거요.
그래서 번뇌가 생기는 거요.
이거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접근하면 되느냐?
‘이 사람은 있다고 믿고, 저 사람은 없다고 믿구나’
이러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이 되잖아.
얼마나 쉬워요. 뭐라고?
“이 사람은 있다고 믿고, 이 사람은 뭐라고? 없다고 믿구나”
믿음은 다를 수가 있어요? 없어요?
‘두 사람 믿음이 다르구나’하면 끝나는데 그걸 가지고 고민할 문제가 뭐가 있어요.
(그러면 스님,
불교에서 얘기하는 무아론이라고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믿음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논증에 쓰일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론은 믿음이 아니에요.
종교로서의 불교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고, 극락을 간다, 뭐 어쩐다 이건 믿음에 근거하고 있고,
그 다음에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요. 과학적 법칙처럼.
(그러면 그 불교의 무아론이라고 할 때 그 무아를 갖고서 유학에서의 자아라고 하는 것을 접목시켜서 논증하는게 동일하게 아까처럼 무의미할까요?)
그런 문제와 그게 같으냐? 다르냐? 하는 거는 어떤 문제이냐 하면
그것은 사람의 관점이란 말이오.
어떤 관점에 서면 같은 부분이 있고,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다른 부분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다른 부분을 보고 다르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부분을 보고 같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건 누가 맞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 두 사람은 관점을 달리하고 있구나.
예를 들어서 콩 두 개를, 파란콩 두 개를 놓고 봤을 때 두 개가 똑같아요? 두 개가 달라요?
다르지.
그런데, 노란콩하고 비교해서 말할 때는 이 두 개의 파란콩은 같은 파란콩이라고 그래요? 다른 파란콩이라고 그래요?
같은 파란콩이라고 그래.
그럼 파란콩, 노란콩은 다른 콩이라고 말하는데, 이거를 팥하고 비교할 때는 같은 콩이라고 그래요? 다른 콩이라고 그래요?
같은 콩이라고 그래요.
그럼 팥하고 콩하고를 상체하고 비교할 때는 이걸 다른 곡류라고 그래요? 같은 곡류라고 그래요?
같은 곡류라고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같다 다르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식의 문제에요.
어떤 조건에서 인식하냐?
아까처럼 인천사람이 물으면 동쪽이 되고,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이 되듯이
어떤 범주에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콩, 이렇게 인식하기도 하고,
범주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콩, 이렇게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존재 자체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범주를 무시하면.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한다?
불일불이(不一不異) 이렇게 말해요.
뭐라고?
불일불이.
불일이라는 것은 하나다가 아니라 같다는 뜻이에요. 불일. 하나다. 이 말이 아니라 뭐라고?
하나다. 이 말은 같다. 그러니까 불일(不一), 같다고 할 수가 없다.
불이(不異)할 때는 둘 이(二)자를 쓰는 게 아니라 다를 이(異)자를 써요.
다르다고도 할 수가 없다.
이게 진실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이거 같은 거냐?
어떻게 논증하면 같다는 걸 논증할 수도 있고,
어떻게 논증하면 이걸 다르다고 논증할 수도 있다. 이 말이오.
그러면 진실은 어떠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거는 인식의 문제다.
자, 여기 컵 뚜껑이 있어. 여기는 컵이 있어. 컵받침이 있어.
자, 이 셋을 두고 제가 컵을 들고 여러분께 물어요.
“컵은 받침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러면 자기는 뭐라고 그럴거요?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러면...
“받침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러면...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럼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그랬을 때 여기 3가지
이 컵이 크냐, 작으냐고 질문했을 때, 답할 수 있는
1. 말을 안 하는 방식, 침묵, 이게 선적인 언어에요.
선에서는 이럴 때 뭐라고 한다? 말을 안 하는 거요.
몰라서 말을 안하는 거 하고 틀립니다.
2. 안 그러면 ‘다만 그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크냐 작으냐 해도 다만 그것이다.
새거냐 헌거냐 해도 다만 그것이다.
무겁냐 가볍냐해도 다만 그것이다.
이게 선의 언어 표현이에요.
선철학, 선학에서는 언어 표현을 이렇게 한다 이거요.
3. 금강경 언어 표현을 빌리면 뭐냐?
상대가 한 말을 고대로 받아서 표현합니다.
그걸 뭐라고 한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무겁냐? 가볍냐? 라고 물으면 뭐라고 말한다?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새 거냐? 헌 거냐?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한다?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다.
이것은 질문하는 언어를 빌려서 그대로 표현하는 거요.
질문자는 두 개의 선택을 요구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는 거요.
대승불교 철학적인 언어는 뭐냐?
공(空)이다. 그래요.
무겁냐? 가볍냐? 해도 뭐라고 한다?
공(空)이다.
새거냐? 헌거냐? 해도 뭐라고 한다?
공(空)이다.
비싸냐? 값싸냐? 해도 공(空)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대답하는 방식이 여러 개 있다.
이걸 크다 작다 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든지,
공이라든지,
그것이라든지
이런 언어로 표현하면 ‘본질을 본다’ 그래요.
그런데 이것을 정답으로 만들어.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닌 게 정답이다.
공이 정답이다.
억! 하는 게 정답이다.
“이 받침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이렇게 물었는데도 뭐라고 그런다?
“공입니다” 이래요. 제 말 이해하셨어요?
“이 받침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된다?
“작다”이래야 되는데, 진리라는 정답을 만들어서
“공입니다”. 이래요.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그랬는데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 지는 되게 아는 것 같지만 이건 완전히 엉터리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이게 큽니까? 작습니까?” 라고 물을 때, 어떤 사람이
“작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 저 사람은 지금 머릿속에 큰 걸 상상하고 있구나’
“이게 큽니까? 작습니까?” 할 때,
“큽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지금 작은 거 하고 비교하고 있구나’
이 말 이해하셨어요?
그러니까 여기 산이 하나 있는데, 이쪽 사람은 이 산을 보고 동산이라고 그러고,
이 쪽 사람은 이 산을 보고 서산이라고 그래요.
두 사람이 싸워.
“동산이야”
“아니야 서산이야”
“그게 어떻게 서산이야? 아침에 해뜨는 거 보니까 동산이 확실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 동네에서는 해지는데”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볼까? 우리 동네 사람한테 물어볼까?” 물어보니 다 동산이라고 그래.
“우리 동네 사람한테 물어볼까?” 물어보니 다 서산이라고 그래.
“그럼 기록을 보자” 옛날 기록을 이 동네에서 보니 다 동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이 동네에서 보니 다 서산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어.
그러니까 기록이라든지,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자는 다수를 말하는 건데, 다수라든지,
이런 걸 갖고는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다. 이거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철학, 경험, 이런 것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어질 수가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진리를 그렇게 검증하잖아.
여러분들이 공이라는 걸 배워서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책보고 공이라는 걸 배워서 목욕탕 들어가서
“야, 목욕탕 들어갈 때 옷 벗어야 되지 않니?”
“옳고 그른게 어디 있노?” 이렇게 대답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결혼한 남자가 외간 여자의 손을 잡아 놓고,
“왜 너 남의 여자 손잡니?” 그러면
“본래 니거내게 어디있노?” 이렇게 대답하는 거요.
이게 뭐냐? 이런 거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그러는 거요.
이런 게 어긋난 거요.
이게 개똥철학이라고 그래.
전혀 진리라는 철학이라는 그걸 하나 뭘 가져와서, 그걸 잣대를 가지고 자기 멋대로 이렇게 쓴다. 이 말이오.
무유정법이라는 거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인연을 따라서는 크다 작다 말할 수도 있고,
인연을 따라서는 크다 작다 말할 수가 없다.
‘이 컵은 크다 작다’가
이 컵에 있는 게 아니고,
인식에 있어요. 우리들의 인식에.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조건에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크다고 인식될 때가 있고, 작다고 인식될 때가 있을 뿐이에요.
여러분들 존재는
착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이해하시겠어요?
여러분들은 존재 자체로 그냥 다만 컵일 뿐이에요.
다만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뭐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고 그래요.
우리 남편 친구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절친했는데.
그런데 그 친구 부인이 남편 죽고 너무 살기가 힘들어.
그래서 마음은 도와주고 싶은데, 또 자존심이 그 친구부인이 세니까 섣불리 도와줬다가는 어때요? 오해를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친구 부인이 간단한 생맥주집을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도와준다고 퇴근하면서 그 집에 가서 맥주 한잔 먹고 오고, 맥주 한잔 먹고 오고 이러면
그 친구 부인이 생각할 때는 자기남편 친구가 의리 있는 사람이오? 의리 없는 사람이오?
의리도 있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요? 나쁜 사람이요?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집에 있는 마누라고 볼 때는 좋은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여러분들이 좋으니, 나쁘니 하지만,
그 좋으니 나쁘니라는 것은 어떤 기준을 잡았을 때 좋으니 나쁘니가 있지
기준이 없으면 좋다 나쁘다고 할 게 없다. 이거에요.
동산이니 서산이니 싸운다. 이게 부부고
이게 한국과 일본이고
이게 남한과 북한이고
이게 중국과 미국이고
이게 기독교와 불교이고
이게 부모와 자식이고
그래서 소통이 안 되는 거요.
그런데 이 동네에서 나오면, 이 동네에서 나온다는 게 뭐요?
이 동네에 사는데서 주장하는 게 아(我)이고
이 동네에서 나오는 게 뭐다? 무아(無我)다. 이 말이오.
이 동네에서 나오면 동산이라고 할 것도 없고, 서산이라고 할 것도 없구나.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구나. 이것을 말할 때 표현방식이 3가지가 있어.
비(非)자를 써서 비동비서,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니다.
부동부서, 동이라 할 것도 없고, 서라 할 것도 없다.
무동무서, 동도 없고 서도 없다.
없을 무(無)자를 쓰거나 아니 불(不)자를 쓰거나 아닐 비(非)자를 쓰거나 다 같은 거요.
그렇게 표현을 하는 거요, 이 사실을.
그런데 이걸 또 정답을 만들어.
비동비서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진짜 이 산은 비동비서산이다. 이게 진리다’
이러면 법집, 진리에 집착했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아까 얘기한데로 소승이 되는 거요.
이 세상에는 자기고집을 하는 사람이 첫째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진리라고 하는 고집을 하는 사람, 이게 더 문제에요.
이건 두 사람이 자기 고집으로 싸우면, 3일 있으면 서로 화해할 수 있고, 늦어도 석달 가면 화해하는데,
진리라는 이름으로 갈등을 일으키면 천년을 가도 화해가 안 된다. 이 말이오.
이게 종교분쟁 아니오.
진리에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떠냐?
어떤 사람이 “동산이다” 하면 “야 임마, 아상이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산이다” 그러면 “아 이 동네에서 온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버려요.
그거 동산이니 옳으니 그르니 안하고, 저 사람은 어디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거요.
“서산이다” 그러면 “아 저 사람은 저 동네에서 온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동산 서산 갖고 논쟁을 하지 않는 거요.
답이 없다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그런 관점에 서야, 이 사유가 자유로워지고,
또 이 동네가면 사람들이 동산이라고 그러면
“바보같이, 너희 동네 사니까 동산이지, 나가봐라 동산이 아니지” 이럴까?
이 동네 가면 그냥 동산이라고 같이 노는 거요.
저 동네 가면 뭐하고 같이 논다? 서산이라고 그러면서 같이 노는 거요.
나는 동산이라고 부르지만,
본래 동산이라 할 실체가 없다.
이게 무아에요.
나는 서산이라고 부르지만,
서산이라고 할 실체가 본래 없다.
본래 없지만 또 이름하여 뭐라고 부를 수도 있다?
동산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자, 이게 무아(無我)에요.
그러니까 이걸 뭐, 자기가 어떻게 주자학의 뭐를 비교할 지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하세요.
네.
--
여러분들이 이런 설명을 해서 알았다.
그래봤자 집에 가도 인생 문제 하나도 안 풀려요. 아시겠습니까?
왜?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지식으로 오기 때문에.
노트해서 외워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아이가 일기장을 보니 엄마 욕을 해놨더라.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나한테 물으면, 스님이
“왜 남의 일기장을 봐요?”
누가 잘못했다? 네가 잘못했잖아. 남의 일기장 안 봤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데.
그러면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화를 하는 게
바로 정해진 게 없다는 거를 경험하도록 한다. 이 말이오.
이렇게 질문하고, 저렇게 질문하고, 이런 대화하고 저런 대화하고.
그러니까 교리라든지, 철학 하나도 몰라도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이 말이오.
왜?
경험적으로 무아라는
즉, 잡고 있던 것을 놓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데 대화를 해도 계속 붙들고 잡고 있으면
얼굴이 안 펴지는 거요.
그러면 저도 뭐, 잡고 있으려면 잡고 있으라고 넘어가는 거요.
잡고 있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ㅎㅎ
‘스님이 정답을 얘기한다’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늘 얘기하잖아.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여러분들이야, 뭐 결혼을 하든, 혼자 살든, 이혼을 하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얘기에요.
그건 여러분들 좋을대로 하면 돼.
그런데 결혼하면 좋은 줄 아는데 내가
‘왜 결혼 하니?’ 물어보니까
이래이래 결혼한다 그러면
‘이래이래 결혼하면 1년도 못가서 깨지겠구나’ 내가 짐작을 하는 거요.
‘이혼을 하겠다’ 그래요.
‘왜 이혼하려고 하나요?’
‘이래이래서 이혼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살펴보면
‘이혼하고 후회하겠구나’ 이렇게 짐작이 되는 거요. 대상.
그러면 어떻게 묻는다?
그래, 이혼했다고 치고, 너 그만한 남자 딴데 가서 구할 수 있겠니?
네가 원하는 100은 아니지만, 바람피워서 기스가 났어. 그래서 80점이 되었는데
이혼하고 너 새로 남자 구하면 50점 짜리 밖에 없으면, 그때 후회하지 않을까? 이렇게 대화를 하는 거요.
대화를 하는 중에 스님이 이혼하라, 이혼하지 마라가 아니라
본인이 생각해보니까,
‘오, 내가 그 생각 못했네.’
어차피 이혼하고 새로 결혼하려면 총각하고 하기는 쉽지가 않잖아.
어차피 딴 여자하고 살던 남자하고 결혼해야 안 되나?
그러면 늘 딴 여자하고 살던 남자하고 내가 가끔 만나는 게 낫나?
늘 나하고 만나는 남자가 가끔 딴 여자 만나는 게 낫나?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내가 유리한데, 주관적으로 백을 다 내가 가지려는 관점에서 보면 기분이 나쁜 건 맞아요.
바람을 피워도 된다, 제가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런데 잘못 듣고 ‘스님이 바람을 피워도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잘못 듣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선택을 하라는 거요.
결혼할 때 섣불리 선택해서 고생을 했으면 이혼할 때도 또 똑같은 방식으로 섣불리 선택을 하면, 그러면 배우는 게 없잖아. 인생에서.
그러니까 결혼할 때는 섣불리 했다면 이혼할 때는 조금 신중해라 이 말이오.
그럼 이혼까지 또 섣불리 했다하면 다음에 재혼할 땐 조금 더 뭐해라?
신중해라.
신중 하라는 건 조심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조금 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해라.
이러면 될 거 같은데, 해보면 안되는 게 많아요.
그러면 어떤 문제를 내가 잘못 체크했느냐?
이걸 여러분들이 살펴야 된다. 그래서 연구를 좀 해야 돼.
애를 낳아서 키우면서 연구를 안 해.
자기가 낳아서 자기가 키워놓고 나한테 물어.
그리고 또 내가 얘기하면
“스님 애 낳아봤어요? 키워 봤어요?” 또 이래.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있지.
“그렇게 잘하면 니가하지 왜 나한테 물어.” ㅎㅎㅎ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해주는 거는
그렇게 감정에 치우쳐서 자꾸 이렇게 하지 말고
조금 정신을 차리고, 조금 연구하고, 체크를 해봐라.
그러면 이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요.
특별한 거 아니에요.
철학을 연구해야 아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지식을 쌓는 거지.
불교철학을 연구해서 석사하고 박사해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인데,
마누라 바람피우면 성질낼까? 안 낼까?
애가 말 안 들으면 성질낼까? 안 낼까?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슨 자동차 기술을 가진 사람이나,
유교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기독교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그냥 지식을 쌓은 거지,
그것은 인생의 문제 아무런 해결에 도움이 안 돼요.
그거 갖고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면 그게 인생에 도움이 되려면
그것이 자기 경험화 되어야 되는 거요.
그래서 그런 글자 한자도 몰라도, 불교 교리 하나도 모르고, 절에 안 가도
요런 이치만 알면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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