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난 12살 여아를 키우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스스로 걷는 게 불편해서 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많이 울기도 하고 또 잠들기 전에 또 혼자 기도도 하고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지만 돌아서면 하염없이 눈물이 또 나오고 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못해준 게 너무나 미안하고 또 치료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이런 부모도 이런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네, 아이 건강에 안 좋으니까
부모로써 마음이 많이 아프리라
듣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느끼고요
본인도 얘기하다 보니까 이렇게 울먹이기까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 ‘어떤 위로를 받을 거냐’ 하는 거거든요.
기도를 해라,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고쳐 주리라.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이 아이의 병을 고쳐주리라.
이러한 기도가 위로가 되겠느냐?
이런 기도가 지난 5000년 동안 위로가 되어 왔습니다.
죽은 뒤에 사람에 대해서도
‘천국에 갔다, 극락에 갔다’ 이렇게 위로를 해 왔다.
그래서 종교가 역할을 해왔고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 현대에 이르러서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비가 오고 가뭄이 드는 것도 무슨 신의 힘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오고, 기도 안 한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내가 기도하는 거하고 그게 날씨가 우연히 맞아떨어지면
마치 기도가 성취된 것처럼 내가 느낄 수는 있지마는
그게 기도한다고 그런 건 아니다.
옛날 같으면 왕이 왕후를 놔 놓고 후궁을 좋아해서 말썽을 일으켜서
비가 안 오면
왕의 문제다, 하늘이 노했다.
근데 과연 한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난다고
오던 비가 안 오고 안 오던 비가 오겠느냐?
그것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건 윤리적으로 잘못된 거지
그 윤리적인 문제하고 자연 현상이 연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사실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 즉문즉설이라는 건 뭐냐?
사실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사실을 확인하느냐?
사실을 확인하면 우리들의 번뇌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고뇌하고 하는 거 이거 다
꿈속의 뱀을 보고 놀라는 같은 현상이다.
눈을 뜨면 뱀도 없고 놀랄 일도 없다
이런 것 때문에 진실을 알자, 사실을 알자
진실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알자
넘어지면 넘어졌다고 알고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알자.
‘화를 안 내야 된다’가 목표가 아니라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자.
이런 얘기란 말이에요.
--
왜 우리는 식물이 점점 자라는 과정을 보면 기분이 좋고
가을이 돼서 식물이 점점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되어서 떨어지는 거 보면
쓸쓸하다고 그럴까?
이게 식물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또는 잎이 떨어지는 문제일까?
사람의 마음 문제일까?
하는 거예요.
그걸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문제지
그 식물이 잎이 나고 꽃이 피나
그 식물이 단풍이 물들고 잎이 떨어지나
그게 식물 문제냐는 거예요.
그걸 보는 사람의 문제지.
동산에 뜨는 달을 보고
마음이 울적할 때 달을 보면 더 슬프잖아요.
그래서 시인이 이렇게 노래를 했단 말이에요.
“아, 오늘 밤은 달마저도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이거는 정서적으로 멋진 싯구다.
근데 이게 진실이냐는 거예요.
달이 나를 슬프게 했느냐는 거예요.
달을 보고 슬픔이 일어난 건 맞는데
이게 달이 한 거냐는 거예요.
달이 나를 슬프게 했냐
내가 달을 보고 슬퍼했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내가 달을 보고 슬퍼했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어떤 사람 달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안 좋아하는 북한이라든지 일본이라든지
이런 지도자들이 죽었다 그러면 어때요?
죽었다 소리 듣고 기분이 좋잖아요.
‘푸틴 죽었다’ 그러면서 서방 세계에서 기분이 좋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죽었는데 기분이 좋아요?
죽으면 울어야지.
그게 죽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다 자기 문제라는 거예요.
그것이 울든 웃든, 자기 문제다.
그러니까 아이가 희귀병에 걸려서
동물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다 그렇잖아요.
이 희귀병에 걸리면 정상적이라면 만약에 한 80까지 산다
그 중에 간혹은 100살 사는 것도 있고
그 중에 간혹은 40살다 죽는 것도 있고
그중에 간혹은 10살 안 해 죽는 것도 있고 20살 안에 죽는 것도 있고
씨앗을 뿌려도 그렇고
동물이 새끼를 낳아서 자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크게 보면 자연의 한 현상이에요.
곡식을 예를 들어서 내가 100개를 뿌렸다면
100개가 다 싹이 트는 거 아니에요.
그중에 10개는 싹이 안 터요.
그중에 10개는 싹이 텄는데 제대로 자라지를 못해요.
대다수는 잘 자라, 근데 그 중에 10개는 특별히 잘자라요.
이게 모든 자연스러운 현상에 속하는 거예요.
개울에 가도 돌이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큰 돌도 있고 작은 돌도 있고 모래도 있고 이런 것처럼.
근데 그런 중에 자기 아이가 그런 좀 소수에 속하는
자연현상 중에 소수에 속하는 게 자기한테 지금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시각장애, 그런 사람이 백에 한 명, 천에 한 명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청각장애, 그런 사람 백에 한 명, 천에 한 명 있다
태어나자마자 지체부자유 그것도 천에 한 명 있을 수 있다
동성애, 그것도 있을 수 있다. 이건 자연 현상이라는 거예요.
근데 대다수 다수, 주류가 100의 99, 1000의 999가
소위 보통적인 정상적인
정상이라는게 없어요, 다수가 정상이니까.
그런 케이스인 데 어느 집에 누군가는 이런 소수가 닥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일어난 일이다.
그러면 그런 소수도
수명이 짧으면 짧은 동안에
동성애면 동성애인 상태로, 장애인이면 장애인 상태로
보통 사람과 똑같이 되도록 원한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된 상태도 그 상태로 그 사람도 사는 동안에
행복할 권리가 있다
제가 말하는 건 그거예요.
그 사람이 시각이 다 트이고, 청각이 다 트이고,
지체부자유아가 다 치료가 되고, 희귀병이 다 치료가 돼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 소수도 그 상태로 사는 만큼
안 보이면 안 보이는 상태로, 안 들리면 안 들리는 상태로, 말 못한 말 못하는 상태로
그들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 사람답게 산다는 게 꼭 봐야 되고, 들어야 되고,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다.
그래서 너무 다수에다 자꾸 기준을 두니까
소수가 문제아가 되는 거예요.
우린 늘 다수를 정상이라 그러고
소수를 비정상이라 그러고
그래서 그거는 병이라든지
그건 뭐 하나님의 징벌이라든지 죄라든지
자꾸 이렇게 지금까지 생각해 왔는데
이제 온 자연을 다 보니까
늘 그렇게 자연현상 속에서는 늘 그런 게 있는 거예요.
코끼리는 큰 게 코끼리인데 코끼리가 개만 한 것도 있고
쥐는 손가락만 한 것도 있고 쥐가 고양이 만한 것도 있고
자연은 이렇게 다양하게 되어 있다.
어떤 걸 정상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많이 접하면 그게 정상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을 바꿔야 해요.
자기가 그 주류 다수라고 하니 그 기준에서 보니
지금 이 아이가 큰 문제예요.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자기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몸을 받고도
사는 만큼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밖에 없잖아요, 사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자기가 뭐 치료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그럼 어떡하겠어요?
저는 이렇게 사니까 여러분들이 볼 때는
“법륜스님 훌륭하시고 좋다” 이럴 거 아니에요.
근데 우리 부모님은 살아계실 때 저를 보면 어때요?
늘 안쓰러운 거예요, 혼자 살고.
저렇게 세계로 다니면서 고생하고.
그건 부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요.
부처님같이 위대하신 분을
부처님 아버지는 오직 부처님이 누구 뭐 스승이다, 이런 건 생각 없고
뭐 먹나? 늘 먹는 건 뭐 먹나?
옷은 어떻게 입었나? 잠자리는 어떻나?
늘 이것만 물어봐요, 사람들한테.
그러니까 부처님이 다 떨어진 옷 입고 있으니
한나라의 왕자인데 어떻게 옷을 그런 걸 입을 수 있냐
어떻게 왕자인데 남의 집에 가서 먹다 버린 밥으로 먹고 사느냐
어떻게 왕자인데 나무 밑에서 그렇게 남의 처마 밑에서 자느냐
이런 늘 난리를 피우고 그러거든요.
아니 부처님 같은 위대한 분을.
부처님은 천하를 다 가지고 왕을 불쌍히 여겨서 위로해주는 사람인데
부처님 아버지는 부처님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걱정한단 말이야.
그럼 이게 부처님이 불쌍해서 그러냐?
아니라는 거에요.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보는 가치관이 그거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좀 자기도
자꾸 자녀에 대해서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 보면 막 자기가 가슴 미어지고 아프고 이러니까
그게 애한테 좋을까? 나쁠까?
아버지는 자기를 보면서 한 번도 웃는 적이 없고
늘 눈물을 글썽거리고 슬퍼하는 모습이다.
그거 어떻게 애한테 좋겠어요?
자긴 잘한다고 하는데
자기를 슬프게 만들고 애한테도 나쁜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애가 오히려 친구들하고 비교해서
건강에 안 좋은 거에 대해서 좀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아니다, 인생은 건강만이 아니다
이 신체라는 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다
넌 정말 이대로 아름답다.”
이렇게 격려를 해주고 해야지
그게 속으로는 울면서 겉으로만 말만 격려하니까 자기가 모순적으로 다가오고
애도 그게 별로 설득력이 없죠.
자기 생각이 바뀌어야 해요
슬픔은 애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슬픈 거예요, 지금.
자기가 달을 보고 지금 우는 거란 말이에요.
늘 얘기 하잖아요.
이런 아이를 가진 부모도 행복해야 되는데
행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되어서, 이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또 그것 때문에 아이는 자기 열등의식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생긴 대로 그냥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기준에 맞춰서 안 된다고 늘 열등의식 갖고 살아야 하잖아요.
왜 사람이 꼭 100살까지 살아야 돼요?
20살 살다 죽으면 안 돼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는데?
30살 살다 죽으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예수님은 33살까지 살아도 만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 받잖아요.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셔야 한다.
여러분들은 위로를 받으려면 뭐 정상이 되도록
근데 정상인이란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세상에 정상이란 건 없어요.
그냥 다수를 우리가 그냥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거지.
그냥 다양할 뿐이에요.
그 다양함 속에, 세상이 있는 중에 조금 소수에 속하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희귀병이다라고 할 수 있는지, 난 모르겠어요.
그런 소수라고 그냥 인정하면 되지.
그걸 정상화 시키려니까
정상이란 걸 정해놓고 정상화하려니까 희귀병이 되는 거예요.
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병이라고 생각하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대로 존중하고.
왜 꼭 결혼을 해야 돼?
70살 되어도 결혼 안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 왜 고등학교 가야 돼?
옛날에 다 고등학교 안 다니고도 얼마든지 살았는데.
신라시대 고등학교 간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이런 상에 집착해서
거기에 해당 안되는 사람을 자꾸 거기에다 꿰맞추려니까
애는 애대로 고생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고생한다.
그러니까 그 몸 상태에 맞춰서 학교갈 수 있으면 가고
못 가면 집에 있고
걸을 수 있으면 걷고
걸을 수 없으면 휠체어 타고.
왜 또 꼭 산에 올라가야 하고
세상 사람이 하는 걸 다 해야 해요?
자기가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
조금 더 법을 공부해서
자연의 원리, 사실을 확인하고
이 아이를 절대 열등하게 보지 말고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피부 빛깔이 검은 거를
자꾸 흰 걸 기준으로 해서 검은 걸 탓하니까
흑인들이 자꾸 분을 바르고 아무리 해도 희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말콤엑스가 ‘검은 것이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을 확 바꾸잖아요.
환경운동하는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관점을 조금 바꾸시면
자기도 행복하고 애도 행복하고
같이 있는 동안 행복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
이런 일은 노력한다고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 말한 대로
그 생각을 하면 괴로움이 생기고
그 생각 안 하고 딴생각하면 괴로움이 없고, 그런 거예요
부모가 죽었다고 우는데
문상을 가면
막 울다가 뭐 어떤 재밌는 다른 얘기 꺼내서 얘기하다 보면 뭐
울음이 어디가 버렸는지
멀쩡하게 얘기하다가 또 갑자기 또 그 생각하면
또 ‘아이고 엄마 죽었지’ 하고 또 우는 거 이거 그래요.
그래서 다 생각이 만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생각이 거기서 못 벗어나면 뭐
그렇게 사는 수밖에 없고
이런 원리를 알아서 자기가 조금 연습을 해서
‘이게 다 생각해서 빚어지는 거구나’ 생각에서.
이게 무슨 아이가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뭐 부모한테 야단 좀 맞은 것도
잘 살다가 부모 만나 얘기하다가 그 생각나면
또 눈물이 나고 막 분노가 생기고 이러잖아요.
영화 보듯이 그 생각을 하면 그렇다.
그래서 뭐 그게 쓸데없다가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그 생각을 내려놔야 하고
뭐 그냥 슬퍼하면서 살려면 그 생각하면서 살면 되는 거고
이건 선택이라는 거예요.
이게 뭐 운명도 아니고
하느님의 벌도 아니고
전생에 죄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고
내가 그래서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 생각을 하면 되고
그렇게 안 살고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아까 첫 번째 얘기도 똑같죠. 뭐
그렇게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그렇게 되니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안 괴로워지려면 그렇게 안 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뭐 아까 그거에 비하면 이건 더 어렵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식이 이러니까 부모가 아무리 놓으려 해도 잘 안 놔지지
그건 뭐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울어서, 슬퍼서
내 인생에 뭐가 좋고, 애한테 뭐가 좋냐?
내가 막 그냥 아무리 나빠도 애한테만 좋다면 저는 뭐
“부모로서 해봐라, 애한테 좋다니까”
나한테 나쁜 짓을 하면서 마치 애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처럼 말하고
아까도 애를 걱정하면서 애한테 나쁜 행위를 계속 한다
그게 어리석다는 거예요, 어리석다.
애가 걱정이 되면
애한테 나쁜 행위가 덜 일어나도록 과감하게 해야 되고
그게 안 되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걸 감수해라.
늘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인연을 지었으면 과보를 받고
과보가 받기 싫으면 인연을 짓지 마라.
먹고 싶으면 먹어라.
근데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결과를 받아들여라.
나쁜 결과가 싫거든
먹고 싶어도 먹지 마라
가고 싶어도 가지 마라
하고 싶어도 하지 마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하냐?
결과가 나쁘니까.
그러니까 너무 이게 단순하고 쉬우니까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안 갖는 거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허황한 걸 좋아하거든요.
“돈은 빌리고 안 갚아도 되는 무슨 그런 길이 없습니까?”
이러니까 온갖 얘기가 다 필요한 거예요.
돈을 빌렸으면 갚고 갚기 싫으면 다음부턴 안 빌리고
간단하게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는 거를 방치해.
안 하려고 그래.
옛날에는 이제 하도 인생살이가 힘드니까
그런 허황한 생각이라도 가져야 됐어.
근데 요즘같이 이런 밝은 세상에 왜 허황하게 사느냐는 거예요.
분명해 지는데.
가슴 아픈 얘기에요.
자식 잃으면, 자식이 죽은 사람
자식이 이렇게 병든 사람들의 부모 마음이 뭐 어떨 거라는 거
내가 얘기한다고 되겠어요?
제가 자꾸 얘기하면
“스님은 애가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이런 소리 듣기 딱 좋지.
그러나 안 그러면 어떡할 건데
스님 얘기한 대로 그럼 안 하면 방법이 있으면 되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치료 방법이 있으면 부모가 알아서 치료했지, 왜 안 했겠어요?
치료 방법 없는 걸 가지고 자꾸 운다고 해결이 돼요?
죽어버렸는데 지금 운다고 해결이 돼요?
죽었으면 장례를 치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 안 되면 그건 병이에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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