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할머니께서 점점 노쇠해지시면서 어릴 때와는 반대로 제가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혼자 모시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결국 아버지가 다시 할머니를 병원에 모셨습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홀로 외롭게 힘들어하고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요?
...
모셔 와도 힘들고, 병원에 모셔놔도 힘들고
그러면 이게 할머니 문제일까? 내 문제일까요?
자기 문제라는 걸 인식하면 되죠.
내가 만약에 심리적으로 건강하다면
할머니를 모셔도 괜찮고, 병원에 모셔도 괜찮고
이래야 할 거 아니겠어요.
할머니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모신다.
할머니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아무리 할머니하고 떨어져도 아쉬워도
병원에 있는 게 할머니에게 더 좋다면
나는 떨어지는 것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왜?
나의 지금 고뇌는 할머니 때문에 생기는 거니까.
이게 할머니의 문제라면
할머니가 좋다면 집에 있어도 좋고
할머니에게 좋다면 병원에 있어도 나는 좋다.
이건 할머니 문제이면 이렇게 돼요.
그런데 내 문제라는 거는
할머니가 집에 와도 모시기 힘들고
할머니가 병원에 가 있으면 내가 잘못한 거 같아서 괴롭고
그러면 이것은 내 문제이지 할머니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
할머니가 병원을 안 좋아하면 자기가 와서 모시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내가 살아야 하잖아, 그죠?
아무리 할머니도 소중하지만, 나부터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어른은 어린애를 볼 때는
‘자기가 못살아도 애를 돌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애를 돌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할머니하고
‘내가 살아야 할머니를 모시지, 내가 죽을 거 같으면 할머니를 못 모시겠다’는 자기하고는
같을 수가 없죠.
그런데 같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
같을 수 없는 존재인데
자기가 할머니하고 자기하고 비교해서
할머니는 나를 포기 안 할 텐데, 나는 할머니를 포기하는 게 잘못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 아니냐는 거예요.
할머니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할머니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손녀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죽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손녀에게 좋은 거라면 자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하는 거죠.
그런데 자기는 ‘할머니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죽어도 좋다’ 이런 존재가 아니잖아요.
나부터 살고 내가 사는 범위 안에서 할머니를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내가 죽을 거 같으면 할머니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게 자기 지금 처지란 말이에요.
그럼, 처지가 서로 다른데 자기가 할머니하고 비교해서
‘할머니라면 이럴 텐데’ 이런 생각은 하나 마나지.
그런데 이 자연 동물계에서는 자연에서든 사람이
부모가 새끼, 어린 새끼를 돌보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걸고 돌봅니다.
그것은 유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유전자적으로.
즉, 생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왜?
그래야 종족이 보존이 된다.
만약에 어미가 새끼를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돌보는 그런 성질이 없다면
종족이 보존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새끼가 어미를 자기 목숨을 걸고 돌본다,
이런 건 유전자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부모하고 자식을 같이 비교해서
엄마라면 나를 포기하지 않을 텐데.
나는 엄마를 포기했다고 죄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엄마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자식을 낳는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교를 해야지
‘엄마가 나를 포기하지 않듯이
나도 엄마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비교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 뭘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어린 자기를 할머니는 보살피는 것에서
할머니가 아무리 어려워도 아기를 보살핀다는 것은
생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이것은 내리사랑이라고 그래요.
그러나 자녀나 손녀가 할머니나 부모를 목숨을 걸고 돌본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는 소수로 있고
부모가 자식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돌본다는 것은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게 소수이고,
자기 목숨보다 더 아껴서 돌보는 게 다수이다.
그래서 그것은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할머니가 마음에 걸리면 할머니를 돌보면 되고
도저히 힘들어서 돌볼 수 없으면 병원에 모셔도
그게 죄가 안 된다.
...
그래요.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요.
‘하면 될까요?’가 아니라 그 길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길이 없다, 이 말이에요.
사람이 늙어서 죽어갈 때
그게 임금이라 하더라도, 그게 재벌이라 하더라도
다른 길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삼성 그룹 회장이 의식불명이 되어
2~3년인가 산소 호흡기 꽂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안타까워도, 돈이 많아도 달리 길이 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할머니가 돌볼 수 있는 지금 집에서 자녀나 손녀나 가족이 돌볼 수 있는 조건이라면 집에서 돌보면 좋은데
가족들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성이 없어서 팽개친다는 게 아니라
이 회사도 나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그 생활을 도저히 돌보면서 할 수가 없으면
요양병원에서 돌보든, 요양원에서 돌보든, 병원에 입원해서 돌보든
그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다른 길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어떠냐?
자식이 장애가 있거나 자식이 아프면
직장을 그만두고 돌본다든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돌본다, 이 말이오.
그런데 자식이나 제3자는
부모가 어렵다고 자기 직장을 포기하고,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돌본다,
이것은 극히 드문 예다, 없는 건 아니지만.
...
아니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할머니를 돌볼 수준이 안된다는 거예요.
수준이 안되는 자기를 인정해야지
자기가 무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80억 인구밖에 한 명밖에 없는 성인이 되겠다고
자기가 자꾸 고집하면 안 되지.
그러려면 자기가 다른 생을, 결혼이고, 직장이고 다 포기하고 할머니를 돌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돌보지 않는다고
대다수 사람들이 돌보는데,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잖아, 그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한다, 이 말이오, 다수가.
그게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고
다수가 하기 때문에 안한다고 나쁜짓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대다수가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안그런 사람도 가끔 있다는 거예요.
안 그런 사람도 가끔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비난받는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지 않으면 비난받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비난은 받지 않는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칭찬받는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 갖고는 칭찬받지는 않는다.
그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자기가 할머니를 못 돌보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즉, 자식인 아버지도 돌보지 않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손녀인 자기가
돌보면 훌륭한 사람이지만
돌보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그걸 갖고 죄의식을 갖을 필요는 없다.
죄의식을 갖는다면
자기가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다.
현실적으로는 돌보지 않으면서
괜히 자기가 성인군자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
하라면 안 하면서,
생각만 해야 한다, 이렇게.
그래서 할머니한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자기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게 할머니한테 도움이 될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는 게 할머니에게 도움이 될까?
...
그럼, 할머니한테 직접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도 정신적으로도 아무 도움이 안 되고
할머니한테 어떤 기쁨과 보람도 못 주고
자기가 혼자 방에 앉아서 울면서
마치 이게 할머니를 위해서 우는 것처럼 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런 것을 감정낭비라고 그래요.
다른 말로하면 어리석다.
자기가 착한 병에 걸린 사람이다.
하나도 착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착한 줄 지금 착각하고 있다.
...
그런데 할머니 속에서 자라면 할머니가 어머니예요.
기른자가 엄마에게요.
자기가 할머니를 돌보는 것은 엄마 같은 심정인데
여기서 할머니가 나를 많이 돌봐줬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할머니 돌보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건 착각이에요.
어릴 때는 할머니한테 돌봄을 받았지만
조금 사춘기를 넘어가면서 자기가 할머니를 돌봤기 때문에
관계는 할머니이고 내가 손녀지만
이 정신적인 자세는 어떠냐 하면
내가 엄마이고 할머니가 딸과 같은 관계예요.
내가 돌봤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돌봤는데 지금 돌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병원에 넣어놓고 돌보지 못해서 아쉽고 후회하는 것 같은
심리적으로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심리는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걸 세상 사람들이 말할 때는 착한
‘아이고, 그 집 손녀 착하다.
아들도 안 돌보는 데, 손녀가 그런 생각이라도 하니 얼마나 착하냐’
이런 소리는 듣지만
그러나 이걸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이것은 착각이고,
그다음에 착한 병에 걸렸고,
이것은 자기가 마치 대단히 착한 사람 같은 자기 착각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활 잘하는 게 할머니를 위한 거다.
어차피 못할 바에야,
내가 내 직장 잘 다니고, 내가 기쁘게 살고, 생활 잘하는 게
할머니에게 잘하는 거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라도 가고, 용돈이라도 드리고, 먹을 것도 사다 드리고
그게 실질적으로 할머니를 돕는 일이지
앉아서 우는 건 할머니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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