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붓다는 종교의식을 부정한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종교의식을 하나요? (2025.01.22.)

Buddhastudy 2025. 1. 31. 18:49

 

 

금강경을 보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종교의식을 부정한 것 같은데

저희들은 성지순례를 와서 참배를 할 때마다

석가모니불 염불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종교의식이

혹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거나 법회를 할 때

하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담마, 즉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 행사입니다.

 

예를 들어,

삼배를 하거나 악수를 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것은

인사 문화에 해당합니다.

스님들이 승복을 입는다거나 절을 짓는 것 역시 문화입니다.

촛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는 것 또한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적 행위를 보고

촛불을 켠다고 부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부처님이 어두워서 오지 못하시나?’, ‘향을 켠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담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담마, 즉 진실을 추구하는 관점에서는

불상도 필요 없고, 탑도 필요 없으며, 석가모니불 염불도 필요 없고, 절도 필요 없습니다. 종교의식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순히 문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실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는 남에게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한 본능입니다.

이런 본능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둘째, 생존을 위해서는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도 필요하고

집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아귀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한 가장 첫 번째

계율이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가 살고자 하는 보호 본능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수행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 계율은

사람의 생존을 위한 기본 재산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주의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존에 위협이 있을 경우

조건 없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계율입니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보호받고

자기가 먹고 생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계율은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대표적입니다.

내가 싫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와서 괴롭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는 큰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를 괴롭히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욕설이나 거짓말 등

말로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처럼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말로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상대의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네 번째 계율은

말로도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어기게 되면

수행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죄라고 해서 사바라이(四波羅夷)라고 합니다.

이는 참회의 대상도 아니고

어기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모두 범죄에 해당합니다.

폭행죄, 절도죄, 성추행죄, 사기죄

이렇게 죄에 해당될 정도로, 법적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법에도 저촉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수행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선 이런 관점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문화적인 것과 진실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손으로 먹는 것은

문화적 차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요소는 필요없지 않느냐하고 주장하는 것은

제법이 공하다하는 생각에 빠진 겁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제법이 공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문화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화를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형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문화를 모두 부정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에 기준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문화적인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절을 하면 깨닫느냐, 명상을 하면 깨닫느냐,

촛불을 밝히고 공양을 올리면 깨닫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

이런 문화적인 부분에 종교가 너무 치우치니까

여기에 대해 비판하고 나온 것이 공사상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구절은

만약에 모양으로써 여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여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란 것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형식에 너무 의미 부여를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상적인 문화를

모두 부정하는 것 또한 치우친 생각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문화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집착하게 되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불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종교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이렇게 문화적인 것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이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나온 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이 나온 역사적 배경은,

당시 사람들이 형상에 너무 집착해 있었던 것을 비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언어도 절대성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극복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공을 절대화시키면

공이라는 상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