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왕따를 당한 후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 힘듭니다. (2025.03.23.)

Buddhastudy 2025. 3. 27. 20:07

 

 

저는 중학교 때 1년간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이 어렵습니다.

회사나 정토회에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긴장이 됩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또 외톨이처럼 느껴집니다.

상대가 기분이 안 좋으면 마치 제 탓 같아서 자책하고 후회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독여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기도문으로 기도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트라우마라는 일종의 병입니다.

먼저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치료 받는 게 우선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냥 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합시다.

첫째, 병원에 가서 고치든지, 못 고치면 의수라도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또 하나의 길은 팔이 하나 없는 것을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팔이 두 개인 사람들을 보며

나는 왜 모자라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팔이 하나라도 있는 게 정말 다행이다. 두 개 다 없으면 어쩔 뻔했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왕따를 좀 당하면 어때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쳐다보거나 상대가 화를 낼 때

내 책임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 이것은 내가 가진 병이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또 병이 도지네.’ 이렇게 내가 안고 있는 병을 인정하고 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그런 것 같다가 아니라

내가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된 거예요.

 

...

 

내가 지금 팔이 하나 없는 상태인데

극복해야지하면서 팔이 새로 생기길 바란다고 생기겠어요?

없는 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아이들이 그런 상태가 된 건 엄마의 영향이 맞아요.

하지만 질문자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키가 작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키가 작아요.

그 책임은 나한테 있죠.

그렇다고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요.

 

나는 피부가 까맣습니다.

아이는 하얬으면 좋겠는데 까맣다면 내 책임이죠.

그래도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나로부터 생긴 일은 맞지만, 그게 죄는 아닙니다.

 

내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보니

아이를 키울 때

무의식 중에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을 나쁘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만약 팔이 하나 없고, 눈이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 상태인데

결혼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니 아이도 눈이 안 보이게 됐어요.

내 영향은 맞아요.

그렇다고 내가 죄를 지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첫째, 심리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도 치료 받을 수 있는 데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치료가 안 된다면,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죽을 때까지 환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정상이란 게 따로 없습니다.

내가 팔이 하나가 없으면, 팔이 하나 없는 지금의 내가 곧 정상입니다.

10년 전에는 팔이 두 개 있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팔이 하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는 지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지금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관점이 전환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을 만 원 주고 샀는데 5천 원으로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준을 이제 5천 원으로 바꿔야 해요.

5천 원에서 6천 원이 되면 천 원 오른 것이 되고,

4천 원이 되면 천 원이 떨어진 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만 원을 기준으로 삼으면

10년 내내 적자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것처럼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눈이 두 개인 것이 정상이었는데

다쳐서 눈이 하나가 되었으면

이제는 눈 하나가 정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준을 지금 상태에 맞춰 바꿔야 해요.

 

질문자도 치료해서 나아질 수 있을 만큼 노력하되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면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새로 기준을 설정해야 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다시 기준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100이고 우리 아이는 80이라면

우리 아이는 80부터 시작하면 돼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100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니까

아이가 학교 가는 게 부담이 되고 힘들어지는 겁니다.

 

괜찮아. 엄마도 상처를 갖고 있지만 잘 살잖아.

결혼도 하고, 너희 둘도 낳고 잘 키웠잖아. 걱정 마.’

이렇게 긍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죽을죄를 지었다. 나 때문에 너도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 키가 작으면 아이의 키가 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속상해하면

괜찮아. 엄마도 키가 작지만 잘 살고 있잖아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키가 크면 좋겠지만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나요?

이런 관점에서 아이들을 봐야 합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73세입니다.

그런데 계속 20대 시절만 생각하면서

그때는 산도 잘 올라갔는데’,

그때는 눈도 밝았는데’,

그때는 목소리도 좋았는데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산다면

현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70대의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걸어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목소리가 이 정도라도 나오니까 다행이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늘 과거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열등감 속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스님, 기도를 할 때 명심할 수 있는 기도문 하나만 주세요.)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