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이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2025.02.18.)

Buddhastudy 2025. 2. 24. 20:11

 

 

 

둘째, 마음이 고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에 들뜨거나, 불안하거나, 침울하다면

고요한 상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어린 아들이 친구와 다투고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엄마, 쟤가 나 때렸어. 혼내줘하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요?

뭐라고? 우리 아들을 때렸다고! 어떤 놈이야? 가보자!’

이렇게 흥분해서

아들을 때린 친구를 찾아서 야단을 칩니다.

또 야단맞은 아이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이릅니다.

그 엄마도 화가 나서 삿대질하면서 서로 또 싸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사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라면 아들에게

아이고, 그랬어? 그 친구가 네게 그렇게 했구나.

우리 아들 마음고생했구나이렇게 아들을 달래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 있다가

아들이 다시 그 친구와 놀게 됩니다.

어른이라면 꽁해서 며칠을 갈 일을

아이들은 5분도 채 안 갑니다.

그리고 다시 그 친구와 놀아요.

 

우리는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엄마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진을 하면

아이가 일어나서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이들은 항상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부모는 늘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이것을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때도 늘 편안해야 하는데

우리는 보통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서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때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바로 정향(定香)입니다.

 

부처님의 일화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화가 나고 괴로워서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딱 선정에 들어계시니까

차마 질문을 못 하고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가

저절로 괴로움이 해결 돼버렸습니다.

 

데바닷타의 사주를 받고, 부처님을 죽이러 온 청부 살인자가

밤에 칼을 들고 부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선정에 드신 모습을 보고

칼을 찌를까 말까, 한참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한 마음에

그만 땡그랑 하고 칼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이리 나오너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쪽으로 도망가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부처님을 해치고 내려오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또 다른 두 명의 청부 살인자를 배치한 거예요.

그리고 또 그 두 명을 죽이기 위해

네 명의 청부 살인자를 배치해 놓은 겁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옛날 선사들의 얘기를 보면,

어느 절에 도둑이 들었는데 물건을 훔치다가 조실스님에게 들켰어요.

도둑이 도망을 가다가 제자들한테 잡혀 왔습니다.

조실스님이 제자들에게

그는 도둑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내가 물건을 준 것이니 보내주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제자들이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놔줬어요.

이 도둑이 크게 감동을 받아서

몇 년 뒤에 출가를 하기 위해 그 절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조실스님에게 찾아가

제가 사실은 그때 그 도둑이었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니까

그 반대급부로 뜻대로 안 되면 침울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정신(定身)’이고

정신에서 나오는 향기가 바로 정향(定香)’입니다.

 

사람이 착하고 마음이 고요해도

막상 같이 살아보면 답답한 사람들이 있어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 이치대로 하면 일이 쉽고 힘이 적게 듭니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면, 힘은 힘대로 들고 일은 일대로 안 돼요.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물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이치를 알아서 이치대로 해결하는 것을 지혜롭다라고 말합니다.

 

순우리말로는 슬기롭다또는 꾀가 많다라고 합니다.

꾀가 많다고 하면 보통 나쁘게 이해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이

꼭 지식이 많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답답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지식이 지혜에 도움이 될 때는 좋지만

 

지식이 지혜를 방해할 때는

지식이 없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알고,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불교 용어로 바꾸면

제법이 공한 줄 안다.,

세상이 연기되어 있는 줄 안다.,

무아와 무상인 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면 집착이 적어집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의 몸을 혜신(慧身)’이라고 하고

그 혜신에서 나오는 향기를

혜향(慧香)’이라고 합니다.

 

넷째,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렇게 하면 어때요?’ 하고 물어보면,

자꾸 안 돼요하면서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의 말이나 상황을 가볍게 받아들여서

, 그래요? 한 번 검토해 보죠하는 말이 나오지 않고,

그거 안 돼요!’ 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요청에 대해

침묵으로 허락하셨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대답이 없으면 허락하신 거예요.

이것은 부처님께서 상대의 제안을 대부분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는

말이 없으면 허락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허락을 안 한 겁니다.”

 

허락은 항상 또는 오케이하고 말해야 허락한 거지

아무 대답이 없으면 허락하지 않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누가 이것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때,

부처님이 아무 대답이 없으면

침묵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주위에는 걸림이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제안을 해도 일단 아니라고 먼저 말합니다.

 

해탈의 경지는

제법이 공한 도리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공이 색한 도리까지 알아야 합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와 공이 색한 도리를 모두 아는 경지는

보살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공이 색한 도리를 알아야

중생의 다양한 고민에 맞춰 교화가 가능한 거예요.

중생이 겪는 하나하나의 고통은

다 현장에서 제각각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중생들에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아라.’라고 말해서

금방 깨달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제법이 공하다고만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인연 따라

뭔가에 걸려서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인연에 따라서 법문을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인연설법이에요.

이렇게 걸림 없이 자유로운 자의 몸을 해탈신이라고 하고

그 해탈신에서 나오는 향기를

해탈향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