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행복은 먼 길 끝에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 돌아서면 될까요? (2025.05.19.)

Buddhastudy 2025. 5. 22. 20:06

 

 

  • 삶의 목표 설정, 현재 자신의 위치 파악, 목표를 향한 방향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01:27].
  • 진리는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며,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서면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02:29].
  • 욕망의 근원을 탐구하고, 행복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02:55].
  • 지구 끝까지 가는 비유를 통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했습니다 [04:56].
  • 경전 공부는 목적지와 출발점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06:37].

 

 

사람들은 가끔 진리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진리가 시간이나 공간,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길 때 생깁니다.

그러나 불교는 어떤 절대적 진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첫째,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통해,

내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둘째,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자문하며

현재 내 삶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셋째, ‘그 목표를 향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가야 할 길을 살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분명해졌을 때라야

비로소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도 불분명하고, 현재 위치도 모르면서

방향이 맞다, 틀리다 말하는 건

허황된 소리입니다.

그러니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괴롭게 살고 싶은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지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방향을 논할 수 있습니다.

목표도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방향이 옳으니 그르니 말하는 것은 헛된 판단일 뿐이에요.

 

 

--행복은 먼 길 끝에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 돌아서면 될까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유정법이라고 말합니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하는 모든 판단은

결국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이 없다면 그런 판단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삶을 두루 관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것을 원합니다.

결혼하고 싶고, 출세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런 욕망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학생에게 질문해 보면 이런 대화가 전개됩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니?’

공부 잘하는 거요.’

 

공부 잘해서 뭐 하려고?’

좋은 대학에 가야죠.’

 

좋은 대학에 가서 뭐 하려고?’

그래야 좋은 데 취직을 하죠.’

 

좋은 데 취직을 해서 뭐 하려고?’

그래야 돈을 많이 벌죠.’

 

돈 벌어서 뭐 하려고?’

그래야 큰 집 사죠.’

 

큰 집 사서 뭐 하는데?’

그래야 편하죠.’

 

편하게 살아서 뭐 하려고?’

 

이렇게 계속 물어가다 보면

결국 행복하게 살고 싶다.’, 혹은 괴로움 없이 살고 싶다.’ 하는 데 도달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나는 불행해도 괜찮다.’하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행복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자유로우려면 지위가 높아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수단으로 출세하고 돈도 벌려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지위가 높으면 자유로워질까요?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까요?

 

다들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아직 내가 그만큼의 돈을 벌어본 적도, 높은 지위에 올라본 적도 없으니까요.

다만 주위를 보며 막연히 추측할 뿐입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치를 보니까

지위가 높으면 낫겠구나’, ‘돈이 있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겠구나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지 확인하려면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됩니다.

그 사람이 과연 행복한지, 자유로운지를 살펴보면 되겠죠.

그러나 막상 만나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실제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구 끝까지 가는 길은 뒤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자유롭고 싶고,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긴 과정을 굳이 다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누군가가 지구의 끝까지 가겠다.’하며 앞으로만 걷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온갖 고생 끝에 결국 끝까지 갔어요.

대부분은 중간에 포기하고 죽었는데, 운 좋게 그 사람은 끝까지 간 거예요.

그런데 거기가 어디였을까요?

바로 출발점이에요.

그렇다면 이렇게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애초에 뒤로 돌아서는 게 나을까요?

사실은 뒤로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도 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바퀴 돌아서 그 자리에 도달해 보기 전까지는

뒤로 돌아서면 된다.’ 하는 말을 쉽게 믿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줘도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거짓말처럼 느껴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토록 애써 앞으로 나아가려 할까요?

정말 뒤로 돌아서면 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아무도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인류는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뒤로 돌아서면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게

오히려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끝까지 가보겠다.’라고 하면,

그래, 가봐라.’하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돌아서면 될 텐데.’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출발점과 목적지를 모른 채 하는 경전 공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나아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결국 목적지와 출발점을 먼저 확인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한다 해도 출발점이 다르면

가는 길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부처님 당시의 사람들과

부처님 열반 후 500년이 지난 시기의 사람들은

분명 서로 다른 출발점에 서 있었습니다.

 

또한 불법을 전혀 모른 채 출발한 사람과

어느 정도 배웠지만 여전히 헤매는 사람 역시

서로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 거예요.

이렇게 출발점이 다르면 접근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과 같은 대승 경전을 배우면서도

이런 출발점과 목적지를 먼저 점검하지 않고

단지 경전의 언어나 문자에 매이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외우고, 많이 알고, 또 열심히 실천했음에도

정작 해탈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조금만 실천해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열 배, 백 배 더 노력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바로 법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강가 강에서 목욕하면 하늘에 태어난다.’ 하는 믿음처럼,

부처님의 법을 배우면 곧 해탈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불법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잘못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원에 사는 사람은

그렇게 기록된 경전을 읽고 아무리 동쪽으로 간다 한들

서울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강릉 사람이 동쪽으로 가라는 말만 믿고

그대로 갔다가는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생깁니다.

 

부처님 말을 그대로 따랐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의문이 생기겠죠.

이것은 동쪽이라는 말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출발점이 인천이 아닌데도

무조건 동쪽으로만 가면 된다고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누군가 질문을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은 지금 여기 있고, 원하는 곳은 저기입니다.

그러니 이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라고 바르게 안내할 수 있습니다.

 

대승 경전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글자를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 금강경을 삼천 번이나 읽었는데도 해탈하지 못합니까?’라는 질문도

같은 맥락에서 나옵니다.

 

진리는 어디 특정한 책이나 장소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땅속에 묻힌 보물처럼

가서 캐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해져야

방향이 정해지고

그 방향에 따라

어떤 방식과 어떤 수단을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