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살면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할 때마다 저보다는 남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얼마 안 살았지만 살아온 것을 돌아보면 제 삶이라기보다는 약간 남의 생각이 좀 많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큰 결정들을 많이 하겠지만 남의 생각이나 의견을 안 들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균형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제가 지금 22살인데 대학을 안 다니고 있어요
대학을 안 다녀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남의 생각을 듣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을 가지 않은 게 저한테는 좀 힘든...//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오늘도 아침에 채소밭에서 작업을 하는데 내가 상치를 땄단 말이오. 그랬더니 “내일 따면 어때요? 날씨 더워서 따면 시드는데요.” 그것도 일리가 있다. 해서 작업하다가 멈추어요. 나물을 여기 심다가 “아, 스님 거기 심는 거보다 여기 심는 게 더 좋은데요.” “왜?” “이렇고 저렇고 그러잖아요.” “맞다.” 나도 매일 영향을 받고 이렇게 사는데.
휴게소 오다가도 “뭐 드실래요?” “이거 먹는다.” “아, 스님 밀가루 음식 건강에 안 좋다는데 밥 드세요.” 이러면 “오, 그래.” 맨날 영향을 받고 사는데. 사람이 다 그래. 그런데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자기는 영향을 받아요.
그런데 우리 인생이 지금 자기가 말한 것처럼 다 그래요.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기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빅데이터라고 들어봤죠. 그죠. 이것을 다 처리하면 자기는 로봇처럼 조정이 가능해요. 여기 있는 사람 다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결정 하고, 이건 좋아하고, 이건 싫어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실제로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입력되어 있어서 그렇게 결정이 나는 거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내가 하잖아. 그죠. 그런데 그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어릴 때부터 그 음식을 먹어서 거기에 길이 들어 있으면 그 음식이 좋아지는 거요. 그러니까 된장찌개 냄새를 맡으면 “흡흡” 하면 구수하게 느껴지는 거는 된장찌개 냄새에 본래 구수함이 있는 게 아니고, 어릴 때부터 맡아서 거기에 습이 들었기 때문에 구수하게 느껴지는 거요.
그러니까 옛날 노인들은 장구소리 들으면 어깨 손에 힘이 들어가 춤이 덩실덩실 나오는 거요. 요즘 애들은 장구 소리 들으면 춤이 안 나와요. 그러면 여기 50~60대는 서양의 팝송이 나와야 어깨가 덩실덩실 해요. 그런데 옛날 노인들은 시끄럽다고 그래. 요즘 젊은 애들은 우리가 구성지게 무슨 이런 도롯또니 이런 거 부르면 젊은 사람들 흥이 안나요. 뭐라고 뭐라고 좌좔좌좔해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조잘조잘하면 그게 노래같이 들려요? 장난같이 들려요? 장난같이 들려. 그게 어떻게 그런 거하고 흥이 나요. 그럼 흥이 나는 거 이것마저도 다 어떻게 소위 습이 들었느냐에 따라서 일어나요. 우리의 감정이라는 게 다 습들이기 나름이오. 어떻게 습관을 들였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그 습관이 들은 거에 엄격하게 말하면 노예생활을 하는 거요. 우리 모두가 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서 인공지능을 만든 거요.
그렇게 작동하도록 해놓으면 그렇게 작동하는 거요. 누구나 다 그래요. 그런데 이 습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 자가 붓다요. 부처라는 것은 극락가고 천당가는 게 목표가 아니고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요.
그러니까 자유라는 게
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고
자기 습으로부터
자기 감정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지는 거요.
우리는 감정의 노예에요.
감정이라는 게 형성되어진 거예요.
원래 있는 게 아니고.
그래서 사람마다 감정이 다른 거요.
여러분들은 지금 결혼생활 하면서 남편의 어떤 것을 보고 싫어하고, 어떤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자란 환경하고 매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버지가 술 먹고 뭐 야단치는 거 어릴 때부터 굉장히 거부반응을 겪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그것을 싫어한 사람은 남편이 아버지 같은 행동을 하면 어때요? 격렬하게 저항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릴 때 어떻게 자랐느냐가 여러분들의 지금 삶을 좌우하는 거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한테 가장 사랑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감정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게 제일 좋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좋은 분유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이런 것을 자식한테 사랑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리고 부부간에 싸우고 짜증내고 성질내고 이러면서. 지금 잘못된 거요.
그래서 우리가 내력이라고 그러죠. 경상도 말로 내력이라는 말 알아요? 자기 아버지 하는 거 아들이 비슷하게 하면 뭐란다? “아이고 그집 내력이다.” 이러죠. 우리 다 내력이에요.
부모 유전자가 자식유전자로 내려가듯이
정신적인 것도 그런 식으로 내려가요.
그래서 누구나 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있어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우리의 목표요.
그래서 자기를 이겨야 된다는 거요.
이때 자기를 이긴다 할 때 그 자기가 뭐냐?
자기 업식, 자기 까르마, 자기 감정을 말해요.
자기 감정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되요.
그러니 기분이 좋다 해도 들뜨면 안 돼.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기 때문에, 감정을 일어나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감정이 일어나지만 거기 들뜨지는 않아야 되고, 감정이 가라앉지만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아야 되요. 그것을 알아차림이라고 그래요.
기분이 좋다고 막 “헤헤” 이런 게 아니라, “오, 기분이 좋게 일어나구나.” 이 기분이 좋게 일어나는 것도 그냥 하나의 까르마에 불과한 거요. 그냥 그렇게 까르마가 작동할 뿐이에요. 그렇게 습이 들어서 그렇게 작동하는 거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배운 것 하고 똑같아요.
차가 앞에 장벽이 막혀서 못가는 게 아니잖아요.
빨간불 켜지면 못가잖아.
그것은 왜? 그렇게 습이 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신심명에 보면 첫 구절이
지도무난이오.
지도, 지극한 도라고 하는 깨달음의 길은
무난, 어렵지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때 사랑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을 말해요. 좋아하고 미워하는 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해요. 좋아하면 죽어도 해야 되고, 싫으면 죽어도 안 해야 되고 이래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요. 그런 감정적인 문제부터 모든 게 다 영향을 받아요.
그런데 자기가 영향 안 받는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사람은 다 영향은 받는 존재요. 자기만이 그런 게 아니라.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속박을 받고 살아가요. 그러니까 세뇌란 말이 있잖아. 세뇌된 것에 속박을 받고, 그 다음에 감정에 속박에 받고 사는 거요. 한국 사람들은 특히 감정에 속박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을 뭐라고 그래요? 기분파라고 그러잖아요.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꼈던 결혼반지도 빼서, 내 법문 듣고 기분이 좋으면 결혼반지도 빼서 보시함에 넣어버려요. 그리고 스님한테 보시하려고 100만원 뒤에 호주머니에 넣어 왔다가 법문 듣고 기분이 나쁘면 안주고 그냥 가져가버려요. 기분파요. ‘기분파다’ 이 말은 그만큼 감정에 좌우되는 존재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누구나 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목표다. 자기 목표도 알겠어요. 그런데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자기에게 좀 집중해서 말하면 자기가 어떤 결정을 할 때, 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즉, 자기가 결혼을 하려는데, 이 남자가 마음은 딱 맞는데 돈이 없어. 그러면 내 속에서도 너무 가난한 게 좀 마음에 걸려요. 그런데 부모가 반대를 하면 갈등이 생겨요. 그런데 부모가 반대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까? 원래 자기도 거기 조금 걸려있었을까? 걸려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갈등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린 욕심 많은 거요. 서로 감정적으로도 맞아야 되고, 돈도 있어야 되고, 지위도 있어야 되고, 인물도 잘나야 되고, 요구가 많다보니까 다 사람들이 한 가지씩 문제 제기를 하는 거요. 내가 감정에 맞는데 딴 사람은 인물을 보고 인물이 못생겼다. 부모는 재력을 보고 재력이 문제라고 하고. 다 문제제기하면 자기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자기에게 원래 그런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보고 결혼하라고 자꾸 부모나 어떤 친구가 중매를 자꾸 하면 “아, 힘들어죽겠다. 너무너무 부모님이 강요한다.” 이럴 때 내 속에도 거기에 대한 미련이 있다는 얘기요? 없다는 얘기요? 있다는 얘기요. 그래서 부모핑계 대는 거요. 내속에 미련이 없으면 부모가 아무리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네네. 생각해 보죠.” 이래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 문제니까.
절에 있어보면 젊은 애들이 부모가 와서 막 난리를 피우면 부모걱정해서 따라가요. 집에 가고 싶은 게 있으니까 거기 걸려들어요. 아시겠어요? 나는 절에 들어와 있는데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부모가 와서 내 보는 앞에서 “내가 약 먹고 죽는 꼬라지를 보려고 그러나?” 이래도 뭐, 아무렇지도 않아요. “약 드시면 장례는 치러드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
첫째, 자기에게 원인이 있다.
두 번째, 남의 의견을 묻고 자꾸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책임을 안 지려는 게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잘못되면
“엄마가 하라고 그랬잖아.”
이 얘기 하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거예요.
그런 습성 때문에 그런 거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그건 그 사람의 얘기고,
결정을 하면 누가 결정한 거다? 내가 결정한 것이고,
책임은 누가 져야 된다? 내가 져야 돼.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 “남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말 하면 안 돼. 누구나 다 받아요. 남의 영향을 받고 결정했든 안 했든, 예를 들면 엄마가 하라고 그랬든, 강요를 했든 어쨌든, 결혼하면 누구 책임이다? 내 책임이지.
예를 들어서 누가 나를 납치해서가서 강제로 내 몸에다 마약 주사를 한 1년 넘으면 내가 마약 중독 됩니까? 안 됩니까? 그래도 이 마약은 내가 책임져야 되요? 그 범인이 책임져야 되요? 처음에는 강제로 맞았지만, 내가 중독된 뒤에 내가 경찰에 발견되어서 풀려났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강제로 줬지만 이제는 내게 되어버렸어. 내 업이 되어버렸어. 그럼 내가 찾아서 마약을 맞겠죠. 그럴 때 이 책임이 경찰한테 있어요? 끊는 책임은 나한테 있어요?
어릴 때 내가 자랄 때 부모가 성질이 이렇고, 부모가 저렇고, 환경이 이러고 저러고 해서 내가 이런 업이 생겼다 하더라도 현재 이것은 누구 거다? 내 업이다? 부모 업이다? 내꺼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누가 해결해야 돼? 내가 해결해야 돼.
그러니까 어떻게 남이 결정했다 이렇게도 하지만, 그런 영향을 받아서 결정해도 결정한 것은 다 누가 한 거다? 내가 한 거요. 앞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돼. 어떤 결정도 결정하면 누가 결정한 거다? 내가 결정한 거요. 누가 책임을 져야 된다? 내가 책임을 져야 된다. 결정을 자기가 자꾸 미루고 이런 것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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