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람이 사는 궁극적인 삶의 가치, 목표가 뭘까?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것, 어떤 사람은 해탈하는 것,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마는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중세 이전은 대부분 사람이 부의 원천을 토지에 잡았습니다. 땅. 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왜 그러냐하면 그때 생산물이라는 게 대부분 다 농업이니까, 농산물은 다 땅에서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첫째 땅이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땅을 경작할 농노, 노예가 있어야 되었어요. 그래서 신라시대에도 보면 어떤 훌륭한 사람한테, 국가 유공자한테 임금이 땅하고 노비를 하사하거든요. 그럴 때는 주로 신분이 상승되면 그런 것을 가질 수 있죠. 그래서 신분 상승, 즉, 권력, 왕이 되는 게 목표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 산업화 사회 이후에 오면 부의 원천이 자본이죠. 자본 또는 자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산해 내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노동자, 이것이 부의 원천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하면 자본과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고급기술자를 가지고 있는 거죠. 여기서 핵심의 가치는 돈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사회는 무슨 사회라고 그래요?
정보화 사회다. 지식 정보 사회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요?
창의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창의력을 가진 사람.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런 지식계층이라는 것은 별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인공 지능이 다 해결할 거요. 그럼 기술은 대부분 다 로봇이 해결할 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창의적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든지,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미래사회는 노동과잉 현상이 일어난다.
소수의 창의력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거요.
그래서 애 적게 낳는다.
이런 얘기 하는 것은 과거 역사의 견주어서 하는 말이고,
미래는 사실은 노동력이 남아돌게 됩니다.
그리고 또 80까지 건강하고, 대부분 다 기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80까지 근무해도 크게 문제가 안 되는 이런 사회가 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과거에 기준해서 문제라고 보는 것은 20년 지나면 바른 관점이 아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럼 이런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뭘까요? 앞으로 먹는 거, 이거 누구나 다 해결합니다. 못 먹는다. 이런 일은 없어요. 못 입는다. 이런 일은 없고.
옛날에 봉건시대에는 중세는 먹고, 입는 거, 자는 거, 국가도 해결 못한다. 가난은 국가도 해결 못한다고 할 만큼 어려운 문제인데 이런 것은 다 해결이 되요.
그래서 핵심적인 가치가 뭐냐 하면
행복입니다.
자, 그런 취지로 이런 강좌가 마련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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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요?
거짓말을 잘한다 간교하다. 위선적이고 교활하다. 상대를 모함하고 누명을 씌운다.
다혈질이다 포악스럽다. 자기 말만 한다. 자신의 말이 항상 옳다. 무조건 남 탓한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고 싶고요,
집단으로 나를 따돌리고 모함하려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그 정도 사람이 있다면 안 만나면 되지. 피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냥 안 만나면 되지. 죄를 지었어요? 피하게.
직장 동료의 경우에는 그냥 직장 동료로만 지내면 되죠.
그럼 사표내고 딴 회사로 가면 되지.
자기가 얘기하는 그 정도라면 다른 직장에 가야지. 진짜 그 정도인가 이게 문제이지.
그런 남자라면 이혼을 해야 되고, 그런 직장이나 상사라면 부서를 옮겨야 되고, 정말 그런 직장 동료라면 자기가 부서를 옮기면 되지. 딴 부서로 “이 사람하고는 도저히 못살겠다. 딴 부서로 보내주세요.” 사장이 그렇다. 그러면 직장을 그만 둬야지.
그런 거 보통 있어요. 그거 별거 아니에요.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되요. 우선 정치인들부터 봐요. 그저 이 말했다. 저 말했다를 밥 먹듯이 하고 있잖아요.
아니 아니 그러니까 훌륭한 정치인도, 우리가 선거까지 뽑은 정치인도 그러는데 보통 사람은 너무 그런 게 당연하지. 그래서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안 돼요.
당하기는 뭘 당해요?
그러면 그 사람하고 싸울 필요 없고, 노동 무슨 위원회 같은데 있잖아요. 거기다가 고대로 사실 대로 적어서 질의를 하면 되요. 그리고 거기서 ‘그건 부당하다.’ 그러면 자기가 다시 또 부당노동행위를 했다 해서 또 고발을 하면 되요. 그 사람하고 싸울 필요는 없어요.
아니, 원치 않아도 해야 되요. 나도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아도 강의가 잡히면 와야 되요. 그러면 그런 거 시정하라고 제도를 만들어 놨는데, 내가 귀찮다고 안하면 그건 뭐, 제도가 있을 필요가 없지.
자기 같은 사람 때문에
지금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거요.
가만히 앉아서 기업주가 다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고,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고,
남편이 다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고,
친구가 다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고
그것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지.
남편도 예를 든다면 밥을 하는데, 자기는 딱 해준 밥만 먹고 그냥 가고 설거지도 안하고 그러면 얘기를 해야지. 그러니까 “밥은 내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라.”든지,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 자식이라도 늘 엄마가 차려주는 것만 먹으면 “오늘부터는 너도 20살이 넘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라.” 앞으로 당번을 정해서 “밥은 네가 해라.” 이렇게 얘기해야 되고 그것을 안 하면 나도 밥을 안 하면 되는 거요.
싸울 필요가 없다는 하는 거지, 부처님이 싸우지 말라고 그랬지, 이렇게 불공정을 시정하지 마라고 얘기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왜 싸워요. 그냥 안하면 되는 건데.
당연하지.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아먹어야지.
자기 권리 찾아 못 먹는 것은
그것을 착한 사람이 아니고
바보라고 그래요.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라고 그래.
악한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의 권리를 침해해도 안 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뺏겨도 안 된다.
내 스스로 “아, 우리 남편 밥해주는 게 좋다. 설거지 내가 하는 게 낫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상관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그걸 하기 싫으면 얘기를 하면 되요. “이러이러해서 같이 사는데 너도 좀 해라.” 이렇게 해서 안 되면 계약을 파기하면 되잖아요.
우리가 계약을 해서 같이 살기로 했는데, 계약을 이행 안하면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면 되는 거지, 싸울 일이 없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되요.
싸우지 마라니까 참고 살아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이것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있고, 자기 도덕관념이 있고, 자기 믿음이 있으니까,
그것을 싸우면 안 된다는 거요.
예를 들면 내가 불교신자인데, 마누라가 교회를 가겠다. 그럼 내가 “오케이. 가라.” 이래도 되고, “아니 우리 같은 종교를 갖자.”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거요. 그래서 안 들으면 “오케이” 하고 인정해 주든지, “그래. 잘 있어라.” 이러고 가든지. 이렇게 좀 약간 뭐랄까? 좀 관계를 심플하게 맺는 게 좋다는 거요. 너무 복잡하게 맺지 마라는 거요.
그 사람 잘못은 아니라는 거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사는 건데,
“나쁜 놈이다. 어쩐다.”
이렇게 내 의견을 상대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고,
상대를 존중해야 되는 거요.
“그래. 너 그래? 그럼 너대로 살아라.” 이러면 되요.
중학교 2학년이 “유학 보내 달라.” “오케이 갔다 오너라.” 이러면 되는 거요. 돈 달라면 “없다” 이러면 되는 거요. “우리 돈이 어디 있노? 네가 무슨” 이렇게 애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요. 내 말의 요지는.
당연하지. 처음에 얘기해 보고, 그래도 시정이 안 되면, 그 사람하고 싸울 필요는 없다는 거요. 그 부당 노동행위로 고발을 하면 되지.
네. 그래 불공정하고 부당하면 그런 것을 시정하라고 제도가 있단 말이오. ‘불공정 부당한 행위를 신고하세요.’ 하는 제도가 있으니 거기 가서 신고하면 되지, 그 사람하고 싸울 필요가 없지. 그 사람 기분 나쁘다고 직장 그만 두고 그럴 필요가 없다. 시정하는데 까지 하고 안 되면 그만 두는 수밖에 없는 거요.
13:32 (두 번째 질문)
나도 얘기하면서 들으니까 조금 모자라 보여요.
그런데 왜 그게 누명이에요? 내가 지금 농담을 했는데, 자기들이 느낄 때 “쟤 좀 모자라는 게 아니냐.” 느끼는 것을 내가 규제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거요.
하지 않는 말을 했다고 그러면 방법은 두 가지에요.
“나 그런 말 안했다.” 하고 확인해 주는 방법이 하나 있고,
그러면 놔두면 되요.
아니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고 자기가 왜 이상한 사람이 되요? 어떤 사람이 나보고 “법륜스님이 아들이 있다.” “없다” 이래도 “있다” 이래요. 그러면 놔두는 수밖에 없지. 그게 조금 시정을 해야 되겠다. 심각하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고발하면 되고, 고발해야 될 거 아니오. 그러니까 이게 고발을 했을 때, 명예 훼손이 되느냐? 이것을 따져봐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법륜스님이 애인이 있는 것 같더라.” 이거 고발하면 명예훼손이 될까? 안 될까? “같더라” 이러는데 어떻게 명예 훼손이 되요. 명예 훼손이 안 돼요. 그런 것은 조금 비난을 받아야 되요. 인터넷 들어가 봐라. 스님 욕하는 글 얼마나 많은데, 내가 “남북 간에 평화롭게 가야 된다.” 그러면 “빨갱이다. 종북이다.”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 것은 고발해도 명예훼손이 안 돼요. 그런데 “법륜스님이 아들이 있다.” 이러면 이것은 고발하면 그것은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가 딱 봐서 법률적으로 명예훼손이 되거나 뭐가 될 것 같으면 신고를 해서 딱 끝을 보는 경우도 있고, 내버려 두는 경우도 있고. 딱 잡아서 바로 딱 신고를 해서 돈을 받아내요.
그러니까 함부로 사람들이 욕을 못하는 거요. 막 하다가. 그런 것처럼 그렇게 해도 되고, 그 다음에 그런 길도 있고, 그 다음에 해 봐야 명예훼손이 안 되는 것도 있고. 그 다음에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고, “아이고 넌 지껄여라. 개는 짖어라. 기차는 간다.” 이렇게 해도 되고 그것은 자기 선택이에요.
그것 때문에 자기가 화가 나고, 잠을 못자고 이러면 자기만 손해요. 개짓는다고 잠 못 자는 거 하고 똑같은 거요. 그런데 선택이다. 이 얘기요.
그런데 자기의 문제는 뭐냐 하면 아까도 처럼,
내가 기업에 들어가면 기업주가 나를 다 배려해서 해주기를 원하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가 나를 다 해주기를 원하고,
이러면, 결혼 안했죠? 결혼하면 큰일이오. 못한다. 자긴. 못산다. 그러면 남편이 다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고, 애를 낳아 놓으면 애가 지가 알아서 다 크기를 원하고, 이러면 못 산다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돼요.
규칙이 있고,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고, 법률이 있고 이러잖아요.
거기에서 어지간 하는 것은 수용하고 살아요.
“아이고, 사람이 다 그렇지 별 사람이 있나.” 이렇게 수용하고 살고,
딱 법에 어긋났거나,
나한테 주어진 권리라면
말로 먼저 해야지. 무조건 고발하면 안 좋고. 아시겠어요?
말로 먼저 “이거 시정을 하세요.”첫 번째 말하고,
두 번째 안 되면 상사한테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하고 또 재차 시정하고,
고 자료를 딱 모아놨다가
그래도 안 되면 고발을 하고,
이것은 고발을 하는 게 뭐,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고,
이것은 내가 조금 귀찮지만
우리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우리 사회의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해줘야 돼.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면 “미친놈이구나.” 그러고 지나가도 되고, “나는 괜찮지만 딴 아이들을 저러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럼 딱 잡아서 고발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러면 고발을 하고, 그 증언하고 좀 귀찮아요. 그런 과정을 내가 거쳐줘야 돼. 왜? 그래야 이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 시정을 한단 말이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고발을 하면 보복이고, 복수고.
그런데 불교나 교회에서는 복수는 하지 말라고 그러잖아. 그지?
내가 피해를 입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피해 입을 것을 막기 위해서 이것을 고발을 하는 것은 그건 복수가 아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지. 자기는 보면, 사회 정의를 위해서 노력할, 자기를 좀 헌신할, 그런 준비가 별로 안 되어 있어.
나를 왕따 시킨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 전체를 왕따 시켜버려요.
그것은 누구나 다 있을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가 안했는데 엄마가 나보고 했다고 모함한다.” “학교 선생님이 내가 안했는데 나를 했다고 오해한다.” 사람이 살면서 약간씩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늘 일상사에 있는 건데, 그 모함이 나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하면 그것은 고발을 하고, 그 다음에 그렇지 않는 정도가하면 첫째 항상 시적을 요청해야 되고, 시정이 안 될 때는 방식은 이것이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그러면 내버려 두는 게 제일이고, 이것은 꼭 시정되어야 될 일이다. 하면 고발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자기는 고발도 안하고,
그냥 그걸 가지고 그 사람을 원망한다. 이 말이오.
좋은 방법은
내버려 두는 것과
법에 저촉 될 정도로 심하면 고발을 하는 거요.
고발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고발하는 것은 보복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시정하겠다. 이러한 문화를 바꾸겠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 자세가 필요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주로 불평불만만 하고, 시정을 위한 행동을 안 해요. 그러니까 전쟁 안 나기만을 바라지, 전쟁 나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의사를 밝혀야 된다. 미국 사람들은 신문에도 났지만 대통령도 그렇고, 상원의원도 그렇고, 청문회 할 때, ‘한국에 만약에 북핵을 없애기 위해서 군사적 공격을 하면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심각하다.’ 이렇게 평가를 하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요? ‘미국 아니잖아. 죽어봐야 한국 사람이잖아.’ 이런 사고가 있는 거요.
우리도 여러분들이 중동에서 지금 시리아에서 얼마 죽었다 해도 별로 신경 안 쓰잖아요. 우리가 아니니까. 그런 것처럼 미국은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미국은 전쟁을 365일 매일 하고 있는 나라 아닙니까. 그죠. 전 세계에서.
그런데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전쟁을 안했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겠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미국 사람은 늘 전쟁을 하는데, 저희 나라에서 안하고 남의 나라에서 하기 때문에 돈이 좀 들 뿐이지, 다른 것은 별로 걱정 안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사를 밝혀야 되는 거요. ‘이 땅에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안 된다 그래도 외국에서 볼 때는 “일부, 한국 사람들 중에 진보 세력이 그런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보수 단체들이 일어나서
우리도 북한 안 좋아하지만, 전쟁은 안 된다.
군사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이 보수 세력이 그렇게 말해야 되는 거예요.
산업화에서 성공해서 우리가 나름대로 부를 축정해놨는데,
이것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 수가 없다.
전쟁은 안 된다. 이렇게 말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런 노력을 안 하잖아. 안 해 놓고 폭격이 일어나 전쟁이 일어났다. 그럼 엄청나게 사람 죽고, 재산 다 날리고, 난민이 되어 국제 사회를 떠돌고, 그때 가서야 “아, 그때 좀 막을 걸.” 하면 후회해봐야 소용없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실천적인 행동을 잘 안 해요.
작년에 우리가 처음으로 혁명적인 행동을 했죠. 주말에 놀러 안 가고, 그 추운데 광화문에 가서 주말마다 촛불을 들었잖아. 그죠. 그랬더니 이런 큰 변화가 왔잖아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또 그만이에요. “다 잘하겠지.” 맡겨놓고 그 다음 태평이에요.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런 위험이 있는 데도 우리가 태평이란 말이오.
이게 실천적 행동을 안 한다는 거요. 그것을 두려워하라는 게 아니에요. 두려워하라는 게. 이게 둘이가 싸워서 전쟁 날지도 모르는데, 대신에 전쟁의 위험도 높아졌지만, 뭐도 높아졌다? 타협의 기회도 높아진 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려워할 게 아니라, 전쟁의 위험은 낮추고, 타협의 기회는 높이는 쪽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돼. 정부는 정부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이렇게 활동을 해야 되는 거요.
내일 아침부터 학교 앞에 일인 피켓시위부터 하란 말이오. ‘전쟁 결사반대’ 이런. 예를 든다면 이렇게 우리가 어떤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된다. 그 사람의 행동을 자세히 보고, 이게 정말 누가 봐도 나쁘다. 그런다면 그 변화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거냐를 생각해야 되고,
안 그러면 내가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은 쟤하고 별로 관계없는데 나만 좀 민감하게 대응한다. 그러면 내가 조금 대범해야 돼. “그래, 그럼 헛소리 하면 네 입만 아프지.” 이렇게 탁 버려버리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네. 하하하.
우리가 같이 지내보면 좀 극단적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종교를 믿어도 자기만 옳다고 극단적이고, 안 그러면 국우적이거나 극좌적이거나 이런, 극단적인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분란을 많이 일으키는데,
항상 정치는 이 극단적인 사람들 소수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왜 그럴까? 그 사람들이 행동을 해요.
글을 쓰고, 보는 앞에서 이런 강의 장에도 지 맘대로 안 되면 손들고 악을 쓰고,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좀 혐오스러운데도 불구하고 행동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쏠림현상이 생기는 거요. 원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사람이 신사고 합리적이고 사유가 치유치지 않는 사람들은 인격적으로는 참 좋은데, 이 세상의 변화에 크게 기여를 못합니다. 뭘 안하기 때문에? 행동을 안 해요.
옷에 흙탕물 튀길까봐 다 조심하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노야 가지마라.’ 이러면서, 돈도 안 내고, 그럼 그 극우든 극좌든 돈 내는 거 보셨죠? 조선일보에 얼토당토않은 광고를 내는데도 돈을 엄청나게 내고, 또 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극단적인 사람들은 행동도 하고, 시간도 내고, 밤잠 안자고 댓글 달고, 그 다음에 돈도 내고 이렇게 하는 거요.
그러니까 숫자는 인구 퍼센테이지는 몇 퍼센트 안 되는데, 사회를 여론을 주도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비난하는데, 비난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도 자기의 의사를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평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 인터넷 SNS공간에서 막 밤잠 안자고 댓글 달고 욕설하는 사람이 판을 치잖아요. 그러면 자꾸 사회가 그런 식으로 쏠려가는 거요. 그래서 아주 욕설도 하지 말고, 합리적인 의견을 많이 다뤄야 되는 거요. 그런데 욕설이 많고 합리적인 견해는 10에 한명, 여러분들은 이렇게 보고 더럽다고 안 들어가 버리잖아. 그것도 한 개인은 방법이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인데, 자꾸 자기의사를 그럴수록 더 많이 붙어서 의사를 표현하고 이래야 되는 거요. 그래야 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질문하신 분은 조금 더 그것을 방관자적으로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 형으로 좀 전환을 해보면 좋겠다. 그런 사람에게 “나 너 자꾸 헛소리 하고 다니지 마라.” 막 욕을 하고 이러면 웃으면서 “그래도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이렇게. “에이, 더럽다.”고 피하지도 말고, 악쓴다고 거기에 같이 악쓰지도 말고, 웃으면서 계속 얘기하는 거요.
그러면 지는 성질내고 나는 웃으니까 누가 힘들까? 자기가 힘들겠지. 그러면 길게 보면 승리한 거요. 에너지가 지가 많이 드니까. 배가 고파도 지가 더 고프지. 이런 관점으로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이런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씀을 좀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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