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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인줄 알았던 저의 선택과 순간들이
알고 보니 운명이나 숙명같은 이미 정해진 것일까요?//
우연이냐 필연이냐 하는 거하고 비슷합니다.
원인을 알면 필연이고
모르면 뭐다? 우연인 거예요.
우연이 따로 있고 필연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원인을 알면 필연이고
원인을 모르면 우연인 거예요.
그런 것처럼
범위를 좁히고 시간을 좁히면
우린 다 자유의지대로 살아갑니다.
근데 시간을 길게 넓히고, 공간을 크게 넓히면
우리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갑니다.
여기 자유의지대로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태어날 때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한국 사람 될 때 한국 사람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여자 되는 거,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들어간 거, 내가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거 아니에요?
학교가 없었으면 안 들어갔을 거고
학교가 있으니까 부모가 ..하니까 들어간 거고,
내가 뭐 하니, 뭐 하니 하지만
다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를 목걸이를 걸어가서 산책을 하면
개는 사람보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옆으로 갔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 하잖아요.
그 찰나 찰나는 개가 자기 선택의 의지입니다.
자기가 선택해서 오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고, 앞으로 가기도 하고
냄새 맡기도 하는데
크게 산책하고 한 바퀴 돌아오는 거 보면
개는 이미 정해진 코스에, 사람이 인도하는 코스로 오게 돼 있는 거예요.
이 자유의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도
크게 보면 아무도 자유의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좁게 보면 너도나도 다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거를 자유의지로 사느냐?
주어진 대로 사느냐?
그런 질문은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떤 정도는 자기가 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요 정도 범위에서는 자유의로 살지만은
요만큼만 돼도 어때요?
주어지는 대로 산다.
그러면 나는 이만한 범위까지는 뭘 하고 살 수 있다?
자유의지로 살 수 있다
이런 정도는 할 수가 있어요.
부처님 정도 되면은
“모든 것을 다 자기가 선택해서 산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만은
그것도 또 뭐, ‘나고 죽는 거’ 이러면 그건 정해져 있죠.
...
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수확을 할 때
미분적 측면이 있고, 적분적 측면이 있거든요.
그 순간순간이 쌓인 게 인생이다.
이게 적분적 측면이에요.
그래서 학문이 다 인생하고도 관계가 되는데
“자기가 찰나찰나 선택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자기의 운명을 만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자기 선택하고 아무 관계없는 게 뭐냐?
태어난 것도 선택하고 관계가 없고
늙는 것도 선택하고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늙는 것도 순간순간 선택해서 늙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요소들이 같이 섞여 있는 게 인생이지.
그러나 가능하면 수행은 뭐냐?
주어진 대로 살려지는 삶에서
가능하면 내가 알아차려서 선택해서 산다.
내가 화가 나면 나도 모르게 화를 낸다.
그럼 화를 내는 거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이 까르마에서 경계가 부딪히면 그냥 화가 벌컥 나버린다.
근데 내가 화가 나는 거를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면 화가 안 나야 된다, 이런 게 아니야.
그러면 화가 나는 것을 내가 알아차리면
이것을 화를 내는 쪽으로 갈 건지
안 내는 쪽으로 갈 건지를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택의 폭을 넓혀 나간다.
이게 세상에, 육조 혜능 대사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다.
그러나 수행자는 세상을 굴린다.”
내가 세상을 굴릴 거냐?
내가 세상을 굴린다는 거는 세상의 모든 반응
세상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내가 그거를 주어진 대로 그냥 굴러가는 게 아니라
그거를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내가 어떤 반응을 하든
내가 알고 반응을 한다.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에요.
...
바닷가에 가서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죠.
무수한 파도가 생기고 사라집니다.
즉 생멸한다 이거예요.
근데 바다 전체의 관점에서 바다를 보면
파도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결이 뭐 한다?
그냥 출렁거릴 뿐이에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예요.
얼핏 보거나 좁게 보면, 찰나로 보면
모든 건 다 생멸이 있습니다.
근데 크게 보고, 넓게 보면
세상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출렁일 뿐이다.
출렁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여러분들은 작은 거는 다 자기가 선택하는 것 같은데
지나놓고 조금 길게 보면 어때요?
어떤 선을 따라서 그냥 온 거 같아요.
내가 선택한 게 별로 의미가 없어 보여요.
고등학교 다닐 때
5월 말 학기 시험에, 또는 10월 말 학기 시험에
70점, 80점 엄청나게 중요하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뭐가 중요해요?
그때 그 월말고사에 70점 받았다고 뭐 다른 인간이 됐겠어요?
크게 보면
여러분들이 까르마, 부모로부터 받은 거에 반응하면서 왔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왜 운명이라고 하느냐?
뭐 날고 뛰어봐야 별 볼 일 없기 때문에
“아, 태어날 때 운명 지어졌구나”
이렇게 말하는데
운명 지어진 거 아니에요.
즉 운명이라는 건 숙명이라는 거예요.
딱 그렇게 밖에 못 산다. 딱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
근데 변화가 쉬우냐?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까르마대로 사는 거예요.
그 까르마대로 산다고 변화가 불가능하냐?
그건 아니에요.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면 변화를 하려면 자각이 일어나야 된다, 자각.
내가 고집이 센데 딴 사람이
“야 임마, 니 고집이 세다, 고집 줄여라”
그러면 잠시 멈출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걸 내가 고칠 수는 없어요.
그건 약간 멈춰 있다가 다시 시작하고, 멈춰 있다가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내가 스스로
“어, 내가 고집이 좀 세네” 이렇게 자각을 하면 어떠냐?
자각을 하고도
“뭐 변할 거 없다, 고집이 세면 어때?”
이러고 가면 그만인데
자각을 하면 변화를 하려면 가능하다는 거예요.
자각이 되면.
그래서 이 즉문즉설은 스님의 어떤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이 대화를 통해서 자기가 자각이 된다.
“별거 아니네.
큰일인 줄 알았더니 선생님하고 얘기해 보니 별거 아니네.”
안 그러면
“어 내가 고집이 세네”
이렇게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거고
대화를 해도 자각이 안 일어나면
아무런 변화도 안 일어납니다.
그럼, 스님의 대화의 목표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어떤 자각이 일어나도록
약간 이렇게도 물어주고, 저렇게도 물어주고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면서
자각이 일어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뿐이다.
자각이 일어나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변화라는 게 뭐예요?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죠.
“아, 내가 고집이 좀 세네”
이렇게 자각을 하면
고집을 할 때마다 전에는 그냥 당연하듯이 했는데
“어, 오늘도 고집 피웠네” 이러면
이 무의식의 세계가 어떻다?
주장을 하는 것이 조금씩 약화되는 쪽으로
자동으로 움직여, 저절로 움직여 나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대부분
각오, 결심을 통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려는데
각오, 결심은 일시적으로만 변화를 가져온다.
참는 거 이런 거.
시간이 지나면 긴장이 풀어지면
되돌아가 버려요.
그래서 긴장을 풀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을 유지해라.
내가 지금 어떻다
고치려고 먼저 하지 말고
‘내가 지금 어떤 상태다’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하면 그렇게 살면 되고
‘어, 이건 조금 바꾸는 게 좋겠다’ 하면
그때부터 바꾸는 관점에 서서 계속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그쪽으로 약간 움직여 가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수행을 하는 거다.
그러고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뭐 그럴 수도 있다” 하고 받아들일수록
나의 자유 영역이 넓어지는 거예요.
“남편이 이렇게 잘못해서 너하고 못 살겠다, 너 책임이야” 그러면
이건 내가 결정한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이혼은 남편 때문에 생긴 거예요.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근데 당신이 바람을 피웠다.
그럼 피운 사람하고 내가 살 거냐? 말 거냐?를
내가 결정해야 돼.
그러니까 원망하지 마라는 거예요.
원망을 하면
이게 내가 피동이 되는 거예요.
원망 없으면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거냐?
“아, 딴 사람 좋다니까 그럼 그러세요.”
이 상황에서 나는 이혼을 하는 걸 선택을 하겠다.
그래서 원망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원망과 미움과 원한은
자기의 운명이
자기가 결정을 못하고
남에 의해서 결정을 당하는 거예요, 항상.
변화된 상황.
“우린 이렇게 약속해서 같이 살기로 했는데
상대가 이렇게 했다.”
“니가 약속을 하겠으니까 나는 못 살겠다”
그러면 이 깨진 거는 너 때문에 깨졌다 이거예요.
약속은 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이 변화된 상황에서
나는 어떤 길을 갈 거냐?”
이게 항상 주인 된 자세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잘한다고 자기가 막 하는데
강아지처럼 지가 막 왔다 갔다 하는데
결국 돌아와 보면
주인한테 끌려다니듯이
우리가 지가 막 머리 굴리고 이래저래 하지만은
지나놓고 보면
까르마의 노예, 까르마의 반응대로 그냥 움직이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항상 지켜보고, 알아차릴 때
후회가 적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 중에는
신통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어떤 내가 이런 말을 하거나 이런 행위를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 건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힘
이게 천안통이에요.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이 원인이 뭔지를 예측할 수 있는 힘
이게 숙명통이에요.
즉 원인을 안다는 거는 과거를 안다는 거고
결과를 안다는 건 뭘 아는 거다?
미래를 안다는 거예요.
근데 이걸 자꾸 전생을 안다, 내생을 안다
그건 종교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보면서
이렇게 하니 이렇게 되네
저렇게 하니 저렇게 되네.
이런 몇 번의 수없는 경험을 통해 가면서
자기가 원인 규명력, 결과 예측력을 넓혀 나가면
선택을 할 때 어떤 결과가 생겨도 별로 후회를 안 하죠.
이미 그런 결과를 내가 예측했으니까.
코인 투자를 했다.
그러면 여기는 이익이 많이 남을 확률이 있는 반면에
큰 손실을 볼 확률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결혼을 선택을 했다 할 때는
같이 사는 재미가 있지만은
맞추는 어려움이 이미 예측이 돼 있잖아.
근데 그런 건 생각 안 하잖아요.
내 좋은 것만 그냥 일시적으로 생각하지.
그런 관점에서 조금만 여러분들이
인생을 그렇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뭐 이런 공부 안 해도 다 살기는 사나? 안 사나?
지금까지 살아왔죠?
앞으로 살아갈 거예요.
괴롭게 사는 건 누구나 다 돼.
그건 큰 문제 없어.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괴롭게 살면 되지 뭐” 이러면 돼.
근데 조금 덜 괴롭게 살려면
이왕지 사는 거 조금 덜 괴롭게 살려면
조금 살핌이 필요하다.
그걸 다른 말로 ‘스스로 살핌’이 필요하다.
이걸 갖다 한문으로 하면 뭐다?
자각(自覺)
“이렇구나”하고
자기 상태에 대해서 자기가 알면서 살아야 된다.
그래야 나중에 억울하고 분하고 이런 일이 없어진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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