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재 33페이지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계율인 도둑질을 하지 말라. 불투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계율에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말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말라.’ 한문본에서는 ‘불투도.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계율을 보면서 혹자는 조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만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다. 무소유인데, ‘도둑질하지 마라.’ “그러면 네거 내거 있다는 거 아니냐. 네거 내거 있으니까 도둑질을 한다든지 하지 말라든지 또는 보시를 하라든지 이런 말이 생긴 거 아니오. 그러니까 불교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데.
불교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가? 역시 불교식대답은 불교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존재의 본질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소유라는 것이 하나의 허상, 관념이라고 보죠.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사유재산이 인정될 수가 없죠.
그러면 누가 써야 되는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써야 된다. 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써야한다는 것이 원칙이죠. 그러면 누가 필요로 하는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의 상황 속에서 들어오게 될 때는 이러한 재화가 있으려면 누군가가 노력을 해야 된다. 누군가는 노력을 해야 이러한 재화가 형성된다. 즉 우리가 사용할 재화가 형성된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은 하지 않고 그 재화만 사용을 하려고 한다. 그럼 노력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재화가 있을 수 있겠느냐? 노력은 조금 밖에 안하고 다 재화는 많이 쓰려고 한다. 그러니 결국은 훔치는 행동이 나오게 되죠.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이 왜 생기느냐? 도둑질이라고 하는 개념이.
노력을 해야 일정한, 즉 노동을 해야 일정한 재화가 형성이 되고, 그래야 그것을 우리가 일정하게 사용은 할 수 있는데, 노동은 안하고 재화를 많이 쓰려고 하니까 균형이 안 맞겠죠. 그런데서 도둑의 개념이 생긴다. 그러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이 말은
‘네가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그만한 노력을 네가 해라.’ 이 말이오.
큰 의미는 그런 거요.
그러니 이게 사유재산의 개념이냐? 아니냐? 와는 차이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더 좁게 말하면 사유재산의 개념도 같이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하는 문제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 이렇게 기초적으로 얘기해 놓고 제가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한 5살, 7살, 많게는 10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가 있다. 어린 아이를 것은 서양에서는 천사다. 이런 개념으로 쓰지만, 동양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것은 곧 뭐다? 어리석다. 이런 개념으로 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 백성이’ 하면 무슨 뜻이다? ‘어리석은 백성이’ 이런 뜻이에요. 뭘 모른다. 이거야. 뭘 모르면 철이 덜 들었다. 이러죠. 뭔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면 “이제 철 들었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철 들었다는 말은 뭐가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말이오. 철이 덜든 이 어린아이는 “엄마 밥” 이러면 밥이 탁 나온단 말이오. “엄마 옷” 이러면 옷이 탁 나온단 말이오. “엄마 장난감” 하면 장난감이 톡 튀어나와요. “내 신발” 하면 신발이 탁 나와요. 이 어린아이는 자기가 원하면 늘 그것은 주어진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엄마 밥” 하는데 밥 빨리 안주면 울어버려요. 그리고 또 그 밥을 줬는데도 먹어보고 맛없다고 중간에 그만 둬버리고, “옷” 해서 옷을 주면 그 옷을 입고 와서 밖에 가서 금방 더럽혀 버려요. 그리고 또 딴 거 내놔라 그래요. 장난감도 한번 쓰고 실증내고 다른 거 내놓으라고 그래요. 어른이 보면 참 좀 답답하죠.
그러니까 애를 야단을 치면 뭐라고 그래요? “저런 애가 뭘 아노? 그것을 야단을 치노? 그러니까 애지.” 이러잖아요. 그죠. 그래서 어린아이는 늘 부모한테도 불평이 많은 거요. 부모한테도. 부모 고마운 줄을 거의 몰라요. 부모 없으면 한시도 못 살면서도 부모 고마운 줄을 모른다. 이거야.
그러다가 이 아이가 점점점점 나이가 들었다. 결혼을 해서 애기를 낳고 산다고 해 봅시다. 그 어릴 때 자기가 “엄마 밥” 하면 밥이 탁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엄마 밥” 할 때 밥을 내주려니까 몇 시간 시간이 들죠. 시장가서 봐와서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해서 준비를 하고, “엄마 옷” 하면 도깨비방망이처럼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빨래해서 말려서 탈의해 그렇게 나온단 말이오.
그런데 아니는 아이가 필요로 한 것을 쓸 때 그 뒤에 엄마가 많은 노고를 한다는 것을 모르죠. 그러면 이것을 해주다가도 제 아이라도 때로는 답답하단 말이오. “아, 이런 철딱서니가 없는 게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오. 그때 엄마를 생각해 본다. 어릴 때 자라면서 부모한테 “엄마 나한테 뭐가 있어?” 이렇게 큰소리쳤는데, 애를 키우면서 가만히 보니까 “야, 우리 어머니 참 고생 많이 했겠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생긴다. 감사함이 일어난다.
왜 감사한 마음이 일어났을까요?
사실을 사실대로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오.
왜 감사하는 마음이 안 일어났을까?
그 전에는? 몰라서.
그럼 왜 지금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까?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참 노고가 많았구나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철이 들면 엄마의 그 노고를 알고, 엄마의 은혜를 알죠. 그런데 늘 엄마는 고마운 존재인데, 아빠에 대해서는 조금 늦어요. 왜 그럴까? “밥” 할 때 밥을 주는 것은 엄마였고, “옷” 할 때 옷을 주는 것은 엄마였지 아빠가 아니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훨씬 더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야 그때 뭐가 보인다? 아버지가 보인다. 그 엄마 뒤에 있단 말이오. 아버지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밥상이고, 한참 지나야 그 밥상 뒤에 엄마가 보이고, 조금 더 눈을 떠야 그 엄마 뒤에 아빠가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부부가 싸우면 거의 어린아이는 십중팔구는 엄마편이 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를 갈면서 이렇게 자란단 말이오. 그런데 나이가 다 된 성년에게 물어보면 딸들도 나이가 다 들어서 결혼해서 이렇게 보면 아빠가 더 문제 같아? 엄마가 더 문제 같아? "아이고 우리 집은 엄마가 문제야. 엄마가." 이런 단 말이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옛날에는 늘 엄마가 억울해 보이고 그랬는데, 커서 보니까 엄마가 잔소리가 많고, 집착이 많고, 고집이 세고, 오히려 아빠가 불쌍해 보인단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요까지 알고 죽죠. 그래서 겨우 사람이 은혜를 안다면 부모 은혜를 아는 선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 엄마아빠 뒤에 즉, 내 앞에 있는 밥상, 밥상 뒤에 엄마, 즉 엄마가 활동하는 부엌, 그 뒤쪽으로는 우리가 안 본단 말이오. 그 뒤쪽에 있단 말이오. 밥을 지으려면 그 쌀은 쌀가게에서 가져왔을 거고, 그 가스는 가스 집에서 가져왔을 거고, 그 채소는 채소가게에서 가져왔을 거고, 그 생선은 생선가게에서 가져왔고, 그 냄비는 또 양푼점에서 가져왔단 말이오. 엄마가 만든 게 아니오.
쌀가게 가면 쌀가게에서 쌀이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오. 농부한테서 왔단 말이오. 농부는 뚝 떨어진 게 아니란 말이오. 땅이 풀리면 벌써 밭갈이를 하고, 논에 물을 대고 못자리를 하고, 이렇게 해서 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매고, 농약 치고, 온 여름 그 뙤약볕에서 일을 해서 가을이 되면서 추수해서 거둔 거란 말이오.
농부들은 아침에 먼동이 붕 틀 때 일어나서 해가 빠질 때까지 허리도 한번 제대로 못 펴고 거꾸러져서, 그렇게 해서 하루 편안하게 잠잘 날 없이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그렇게 그 농사지어서 오늘 우리가 먹고 사는 거란 말이오. 그럼 농부만 고마우냐. 아니다. 농부가 거기에서 쟁기질을 하려면 그 쟁기는 대장간에서 왔죠? 대장간에서는 석탄은 탄광에서 왔을 거고, 숯은 공장에서 왔을 거고, 쇠붙이는 제철소에서 왔을 거고. 거기가면 또 다른데서 왔겠죠.
그들이 뿌리는 비료는 비료공장에서 왔을 거고, 거긴 또 다른데서 왔을 거고. 그들이 뿌리는 농약은 농약상회, 농약공장을 거쳐서 또 다른 갖가지 화학공장에서 왔을 거고. 이렇게 다 하나하나 추적하고 따라가 보면 이게 마치 그물처럼 연결되어서 처음에 나 하나는 그물 코 하나 같고, 조금만 보면 옆에 옆에 연결되고 연결되고 해서 이 그물이 끝도 없이 이렇게 계속이 된단 말이오.
결국은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 그물에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밥한 숟가락 떠먹을 때 그 밥한 톨에 이 세상 만민의 노고가 그 안에 있는 게 보인다. 이 옷 실타래 하나 속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베 짜는 여인의 피땀이 보인다. 그걸 훤하게 알게 되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즉 밥도 먹고, 이렇게 안경 끼고 보고, 신발 신고 다니고, 옷 입고, 마이크 쓰고, 이 자리에 앉고, 차를 타고 하는 게 그 어느 하나에도 이 수많은 사람의 그 노력이 들어있지 않은 게 없다.
그럴 때 내가 그 수많은 사람의 노고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눈을 뜨게 되면 사실이 그렇다. 사실이 그런데 우리는 오직 좁혀서 자기만을 보면 밥알 밖에 안 보이고, 겨우 어머니 얼굴이 보이고, 아버지 얼굴이 보이고, 지역 사람 얼굴이 보이고, 눈을 점점점점 떠나가면 만 중생이 다 보인 단 말이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어린아이 같아서 고마운 줄 모르고 투정을 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지만, 눈을 뜨고 다 보는 사람은 마치 어른이 되어서 부모를 생각하면서 고마워하듯이, 일체중생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이렇게 형성된 줄 알면 그 물건이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있으니까, 엄마의 정성이 들어있으니까, 아내의 온갖 정성이 들어있는 줄 알게 되면 소중한 줄을 알게 된다.
“이거 소중하다.” 이렇게 안 해도 알게 되면 어떻다? “참 소중하다.” 알게 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알게 되면 “아껴 써야 되겠구나.” 이렇게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이 ‘아껴 써라. 소중하게 여겨라. 고맙게 생각해라.’ 이렇게 가르친단 말이오. 손님이 와서 돈 주면 애가 덥죽 받죠. 그럼 부모가 뭐라고 그래요? “고맙다 그래. 고맙습니다. 해. 고맙습니다 해.” 왜 고마운지 모른단 말이오. 그냥 “고맙습니다.” 이렇게 한단 말이오.
그러니 이게 강제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모든 게 다 건성이죠. 그래서 입에 발린 소리로는 잘하죠. “감사합니다.” 속으로는 하나도 안 고마우면서. 그런데 그것을 보여줘야 되요. 아이가 밥투정을 하면 밥이 어이해서 생기는지. 아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이 뭘 하는지를 보여줘야 된단 말이오. 하나하나 이렇게 보여줘야 돼. 그러면 저절로 사람이 “감사합니다.” 이런 말음이 들고, “아, 참 소중하네요.” 이런 생각이 자기 속에서 일어난단 말이오. 저절로. “이거 아껴 써야 되겠네.” 이렇게 일어난단 말이오.
왜 그렇게 일어났냐. 모르겠어요. 깨닫게 되면 그건 다 실험을 해보면 그래요. 누구나 다, 살인 강도나 간첩이나 어떤 사람이라는 사람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규정하든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감사합니다.” “소중하다.” “아껴 써야 되겠네. 이건 다 자동으로 나오는 얘기란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이 ‘물건은 참 소중하다. 아껴 써야 한다. 고맙게 생각해라. 중생의 은혜를 갚으려고 해라.’ 이런 말은 도덕적으로 훈계로 하는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사실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까지 알면 성인이라 그래. 그러니까 자기 밖에 모르면 범부라고 그래. 어리석은 중생. 범부중생이라 하고, 부모님 은혜는 아는 수준. 이웃의 은혜까지 아는 수준이면 현인이라 그래. 이게 모든 사람, 내가 얼굴을 알거나, 내가 얼굴을 모르거나, 이 나라 사람이거나, 저 나라 사람이거나, 모든 사람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면 뭐다? 성인이다.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잘하고, 음식도 깍듯이 대접하고 이러잖아. 그죠? 그러니까 만중생의 은혜인 줄 알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식당을 한다면 식당에 오는 손님이, 내 안경을 만들어준 사람이고, 내 옷을 만들어준 사람이고, 내 차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이렇게 전깃불을 밝게 해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어느 날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하고 이렇게 안했지만, 그렇게 한 사람이 찾아왔어. 나를 늘 살게 해 준 사람이 찾아왔단 말이오.
그러니까 식당 하는 사람은 밥을 따뜻이 정성을 기울여서 대접을 하고, 돈을 주기 때문에 대접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약방을 하는 사람이면 나를 늘 돌봐준 은인이 찾아왔으니 그 사람이 아프니 어때요? 관심을 갖겠죠. “아, 그러세요. 아스피린 한 알 먹으면 되겠습니다.” 이렇게도 하지만. “그런데 아저씨, 아스피린 한 알은 오늘 하루만 낫고 아저씨 같은 경우는 근본적으로 나으려면 다른 약을 드셔야 되는데요.” “뭐가요?” “스트레스를 받아서 목이 자꾸 아프다 그러고. 머리도 아프다고 그러고. 눈도 침침하다고 그러고.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고. 화병이란 말이오.
“그러면 오늘 저녁에 요거 한 알 드시고, 내일 부터는 매일 저녁마다 정토회관에 가서 강의 들으십시오.” 돈이 중심이 아니란 말이오. 어떻게 하면 이 사람 병이 낫느냐. 그러니 돈을 갖고 와도 돈을 받지 않고 치료될 수 있는 데를 가르쳐줘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결핵환자라든지 이런 제3세계 사람들 같으면 그 사람이 돈이 없더라도 약을 줘야 된단 말이오.
그런 사람들이 식당을 하고, 그런 사람들이 약방을 하고, 그런 사람들이 의사가 되어야 되고, 그런 사람이 집을 지으면 그 살 사람을 생각해서 정성껏 지을 거고, 그런 사람들이 자동차를 만들면 탈 사람을 생각해서 정성껏 만들고, 그런 사람들이 옷을 만들면 입을 사람을 생각해서 정성 것 만들고. 이게 되어야 세계 경쟁력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거요.
정말 제품이 제대로 나올 거요. 원료가 나쁘면 나쁜 수준에서 나올 거고, 좋으면 좋은 수준에서 제대로 나올 거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정신상태. 허황한 이런 상태로 절대 기술이, 제품이, 일본인이나 독일인이나 이런 사람보다 앞서갈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인간의 삶의 자세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국민성들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방향 길이 일본 사람들하고 비교해보면 덜 성실하다. 그러기 때문에 제품이 덜 매끄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야무지지가 못하다. 돈에 미쳐서 얼렁뚱땅한단 말이오. 멀쩡한 사람보고 거짓말해서 약을 준단 말이오. 멀쩡한 사람보고 수술을 시킨단 말이오. 왜? 수입을 받아야 되니까. 건물을 짓는데 들어가야 할 설계도대로 안 집어넣고 철근을 적은 것을 집어넣고, 시멘트 가루를 적게 집어넣고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 제대로 안되죠.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여기까지만 가면 눈이 어떻게 되어있나. “아, 재화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거다. 그러면 어떤 물건이 값을 얼마로 먹일 거냐는 거기 인간의 노동이 얼마나 투여되었느냐. 이것으로 정해질 수 있다.” 이런 노동가치설 같은 게 나오겠죠. 그런데 이것은 눈이 아직도 좀 덜 되었을 때 나오는 학설이오.
그 벼가 자라기 위해서는 지렁이가 땅속으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고, 그 공기를 따라 갖가지 박테리아가 활동을 하고, 그 박테리아들이 갖가지를 분해시키고, 그것들이 식물에 흡수가 되어 곡식이 된단 말이오.
또 하늘에서는 태양이 내리쬐고, 또 바람이 불어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곡식이 자라는 거지, 사람들만 해서 자라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 세상에 그 어떤 물건도. 그러니 사실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그 미세한 생물까지도 다 내가 이렇게 생존되는데 다 기여를 하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모든 생명에 의해서 내가 그 그물의 끝자락에, 그 그물의 세세한 부분에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이, 나아가서는 저 태양마저도 저 별마저도, 이 공기마저도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다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게 붓다란 말이오. 깨달음이란 말이오. 성인하고는 틀립니다. 성인은 사람의 은혜만 고마울 줄 아는 거고, 사람 죽이지 마라. 사람의 은혜만 생각한다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만중생을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자, 합장을 한번 해보세요. 따라하세요.
물 한 방울 속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밥 한 톨 속에도 만민의 노고가 깃들어 있고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 짜는 여인의 피땀이 설여 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네. 이게 수행자가 가져할 삶의 태도다.
이것을 우리가 간략하게 줄인 게 밥을 먹을 때,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분들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매사에 차를 한잔 가져와도 기사가 차를 태워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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