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83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

Buddhastudy 2016. 5. 24. 05:34



 

앞에 질문은 구체적으로 자기가 안해야 될 말을 어떤 말을 했는지를 말해 봐요. 한 예만 들어서.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말을 했다는 거는 그게 속마음이라는 얘기요. 속에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속에 불만이 있으면 농담 삼아 하는 말 속에도 농담 속에 뼈가 있다. 이런 말하잖아. 가시가 있다 이런 말하듯이 나오는 거고, 자기가 좋으면 상대가 좋으면 이렇게 좋아하는 표현을 안 하려고 자제했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든지 하니까, 그건 꿈하고 똑같아요. 꿈에 여러분들 이성적으로는 외간남자를 좋아 못하잖아. 바깥에 현실에서는 좋아하면 안 되잖아. 꿈에는 좋아해요? 안 해요? 좋아하잖아.

 

꿈에 좋아하다가 눈 떠 보면 꿈이고 그러죠. 그런 것처럼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거는 우리가 의시가하지 못하게 나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3가지 말을 합니다. 주로. 이럴 때, 무의식적으로 했다. 나도 모르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했다. 나도 모르게 했다. 또 뭐라고 했다? 습관적으로 했다. 이런 말 쓰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의식하지 못했다는 얘기요. 의식하지 못하고 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다. 습관적으로 했다. 나도 모르게 했다. 이 모른다는 게 의식이 몰랐다는, 그게 우리들의 잠재된, 무의식에서 나온, 다른 말로하면 속마음에서 일어난 거기 때문에 그건 자기가 속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그건 고쳐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거를 보고, 후회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 이런 게 내 속에 있었구나.’하고 아는 기회로 삼으면 되지. 나도 모르게 탁 튀어나올 때, , 내 마음에 이런 불만이 있었구나. 이런 좋음이 있었구나. 이런 게 나도 의식하지 못한 내 내면에 숨겨진 게 있었구나 하고 자기를 자각하는 기회로 삼으면 오히려 수행에 도움이 되죠. 그걸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는 하나의 기회로 삼아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자기 말 속에 조금 어패가 있는 게 동서를 이렇게 아랫동서를 좀 지켜봤더니 문제가 참 많은데, 이게 하면 좋아지나? 하면 좋아지나 봐도 별로 개선되는 게 없다. 그건 벌써 아까 옆에서 질문 한 거 하고 똑같이 그 동서를 고치려고 하잖아. “저건 니 잘못됐다. 고쳐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자체가 벌써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는 그 인간대로 살지, 내 생각에 맞춰서 사는 게 아니에요. 그가 나하고 자란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을 하겠어요? 어떤 건 들고 어떤 건 안 들지. 그러니까 그건 자기대로 사는 거요.

 

그러니까 애를 때리는 게 문제면, 동서가 애를 야단을 쳐주기를 바라지 말고, 애를 안 데리고 가든지, 애를 때리면 내가 딱 그냥 내 애니, 니 애니 따지지 말고, 애를 딱 잡아서 때리는 건 안 돼. 알았지?” 이렇게. 그래도 말 안 들으면 다음에 뺨 때기를 한 대 딱 때리고, “그래, 때리니 너는 기분 좋으나?” 울면, 그래 봐라. 니도 누나 때리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동서가 뭐라고 뭐라고 하면 그래, 교육상 했다.” 동서한테 욕 얻어먹으면 되고, 남편이나 다른 사람이 와서 막, 얘기를 해도, “, , 애 교육상 제가 좀 했습니다.” “바보야, 왜 그렇게 하냐?” 고 남편이 그렇게 하면 여보, 미안해. 그런데 교육상 그렇게. 다 조카이고, 내 아이인데 교육상 했다.”

 

이럴 때 내가 나를 정직해야 되요. 내가 그걸 보고 화가 나서 때리면 그건 싸움이 되요. 내가 그때 애들끼리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린 애들이 크면 어른이지 애라고 할 거 뭐 있어요? 그죠? 애 때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고 그냥 지나가도 되고, 아무리 어린애지만, 저건 좀 아니다 싶으면 내 애, 니 애, 따지지 말고, 딱 불러서 야단을 치면 되지. “얘야, 그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란다.” 이렇게 딱 하면 되지, 그걸 지 엄마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고, 그런 거 자체가 잘못된 거요. 그런데 자기가 그때 항상 자기를 봐야 돼. 그때 자기가 지금 화가 나는 거를 참고 있거든요. 스님이 야단치라하면 자기 성질을 부려버린단 말이오.

 

참고참고 참다가 성질을 부려버리면, 자기가 득점을 못하지. “아따, 그 형님 성질 더럽다. 애 키우는 사람이 남의 애라고 막 때린다.” 이렇게 인식이 되면 사이가 더 벌어지지. 그러니까 야단을 쳐줘도 그 성질을 내지 말고, 자기가 성질이 딱 나면 방에 가서 절을 해야 돼. 그걸 보고 성질이 나면, 어쨌든 아무리 부당해도 성질이 나면 누구 문제다? 내 문제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성질이 나는 게 아니라, 애들은 있을 수 있지만, “아이고, 우리 조카가 저렇게 버릇 들면 나중에 나쁘겠다.”하면, “얘야, 그렇게 때리는 거 아니란다.” 내 애를 때렸기 때문에 성질을 내지 말고, “그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란다.” 얘기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더 방법을 연구해보고 이렇게 해야지.

 

저그 엄마가 알아서 해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잘못하면 애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는 거는 것도 다 성질내서 그렇잖아요. 애들끼리 소소한 거 갖고 애를 두드려 패고, 니 애는 잘했나하고 서로 책임전가하고, 그러면 싸움이 붙으면 평소에 불만이 다 나옵니다. 아시겠어요? 애 처음에 상대편 애 나무라다가, 그 다음에 그래, 네가 그러니 너도 그렇지이렇게 시작해서 평소에 불만이 다 튀어나오면 대판 큰 싸움이 되거든요. 이제 나중에 더 커지면,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꼴이 나니까, 그건 성질이 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야단을 쳐야죠. 타일러 줘야 되고, 야단을 쳐야 된다는 거요.

 

자기가 성질이 스트레스가 나니까 이 바보야, 왜 맞고 있냐? 때려버리지.”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그렇지. 아이고 참, 그게 어른이야? 어른?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그러면 그건 기독교식이지. 용서해 준다는 건 기독교식이야. ? 용서 안 해주는 거 보다는 해주는 거 보다는 낫나? 안 낫나? 훨씬 나아요. 해결은 돼. 그러나 거기에는 용서해준다는 말 속에는 상대가 잘못했다는 게 전제가 되어있어. 그러니까 불교식은 상대가 잘못했다는 그 자체를 버려야 돼. 서로 다르지. 상대가 잘못한 거는 아니야. 서로 다를 뿐이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용서해준다는 말의 이전의 문제로 돌아가야 돼.

 

서로 다른데 내가 내 중심을 갖고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고 생각한데서 화가 나고, 그래서 내가 네가 틀렸지만, 내가 봐주겠다. 불쌍한 존재니까. 아이고 여북하면 그러겠냐? 봐주겠다.” 이런 거는 이미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전제 위에 서 있거든요. 공의 입장에 있는 게 아니고, 서로 다른데. 그러니까 상대가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가 나를 중심에 세우고 보니까 저게 잘못된 거로 보이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나를 버리는 게 수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