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새로운 패러다임/ 깨달음과 시크릿은 하나다

Buddhastudy 2024. 3. 26. 19:51

 

 

제 필명 카멜로는요.

카톨릭의 세례명이에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셨는데

외국 사람인 줄 아신 분들이 꽤 계세요.

 

외국 사람 아니고요.

엄청나게 많은 문의 메일을 또 받았었습니다.

외국인 아니냐, 쪽지도 받고 막 그랬었어요.

한국 토종, 한국인 맞고요.

 

오늘은 편집자님한테 저번에 연락을 받고 제가 준비한 테마가 있어요.

그 테마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제 소개나 그런 부분은 여기서 마치고요, 단축을 하고요

본 내용으로 한번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이 책은

그 제목 자체가 <시크릿을 깨닫다>예요.

 

제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아주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추천해서 보냈던 모든 제목이 까였어요.

모든 제목이 까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또 뭐였냐면요.

이걸 보시면 제 그 모토를 아실 수가 있으실 거예요.

수도자와 공과금이었어요.

 

시크릿이라는 부분하고 그러니까 여기 들어가는 거겠죠

깨달음이라는 부분이

제가 이 부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런 제목을 보내드렸었는데

바로 까였어요.

바로 까이고 지금 아주 좋은 <시크릿을 깨닫다>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오게 된 겁니다.

 

--진제와 속제가 하나다

<수도자와 공과금> 아니면은 <시크릿을 깨닫다>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진제의 차원]

그다음에 [속제의 차원]

속제와 진리의 차원을 하나로써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시크릿을 깨닫다>라는 이 제목이 가장 좋은 제목이 됐죠.

 

여러분들 여기 오신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하나는 뭡니까?

[깨달음]이 되겠죠.

그다음에 또 뭐예요?

[시크릿]

 

잠깐 좀 파악을 해볼게요.

뭐에 더 관심들이 있으셔서 오셨는지

깨달음일까요? 아니면은 시크릿일까요?

깨달음 쪽에 더 관심이 계시다? 들어볼까요?

시크릿은요? 좋습니다.

 

깨달음 쪽으로

정신 세계에서 독서 모임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조금 더 쏠리는 그런 그게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근데 중요한 게 있어요.

[깨달음하고요 시크릿하고요 같아요.]

어느 정도로 갔냐면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다시 말씀드리자면은

깨달음이라고 우리가 여기고 있는 어떠한 초월의식의 상태하고

시크릿을 할 때 사용하는 의식의 상태가 같다라는 거예요.

동시에 또 뭡니까?

일상의식하고, 지금 이 순간의 일상 의식하고 같다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깨달음에 대해서 착각하고 계시는 게 있습니다.

그 부분부터 한번 짚고 넘어가 볼게요.

 

 

--깨달음의 새로운 패러다임

보통 깨달음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해요?

내가 수행해서혹은 노력해서 깨달음에 도달한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수십 년 동안 그런 수행 경력이 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많이 계실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돼요.

이 얘기는 뭐냐면 깨닫고자 하는 공부의 스타일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돼요.

어떤 식으로?

 

내가 깨닫는 게 아니에요.

그게 뭐냐면요.

내가 수행을 통해서 도달한다. 깨닫는다 하려면 뭐가 전제가 돼요? 자동적으로.

내가 전제가 되죠.

 

무엇으로서 전제가 되죠?

독립적 실체로서 전제가 돼요.

독립적인 어떤 실체로서의 나를 갖다가 딱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그게 뭐예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아상이에요.

I am That I am을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이 실체가 막 열심히 노력해서 뭐에 도달을 한다?

깨달음에.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가 없어요. 이유가 뭡니까?

이게 가 허수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솔직히 말해서 얼마나 얼마나 웃긴 노력이에요.

이게 뭐랑 똑같냐면은

꿈속에 나타난 토끼가 막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겠다라고 노력을 하는 것과 똑같아요.

 

결국에 뭡니까?

토끼가 내가 되든, 호랑이가 내가 되든

인간이 사람이 내가 되든

내가 수행을 통해서 도달한다.

그런데 어디 나온 내가? 허수라고 말씀드렸죠?

허깨비예요.

꿈속에 나타난 허깨비예요.

누가?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내가 허깨비예요.

 

이 책은 왜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허깨비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조금 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를 도우려고 밝혀놓은 책이에요.

시크릿하고 연결되기 이전까지의 부분이에요.

 

 

--깨닫고자 하는 는 무엇인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겁니다.

어떻게?

[깨닫고자 노력하는 는 무엇인가?]를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딴 게 아닙니다.

여러분 완전히 뒤집어서 생각을 하셔야 돼요. 완전히 바꾸셔야 돼요.

 

내가 실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를 해서

막 노력을 통해서 깨닫는다

불가능해요.

이유는 뭡니까?

허수라고 말씀드렸어요. 허깨이에요.

 

그렇다면 공부 방향을 어떻게 전환을 하면 돼요?

깨달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이 내가 누구인가?

뭡니까?

나는 누구인가죠.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면 그게 깨달음]이에요.

 

그런데 그 앎은 일종의 변성 의식이 아니에요.

변성의식이 뭘까요?

수행 많이 하셨던 분들은 겪어보셨을 거예요.

명상이나 수행을 하다가 여러 가지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 몸에서 떠난다.

 

처음에 몸을 나라고 삼고 있던 상태에서

어떤 수행을 통해서 쑥~ 하고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주시자의 시작이에요.

떨어져 나가기 시작을 해서 뭐를 나로 삼아버려요?

의식을 나로 삼아버려요.

 

그다음 뭡니까?

순수의식, 합일의식, 우주의식

공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모양 또 있어요.

텅 빈 충만, 허공

 

근데 뭐예요?

그 어떤 상을 갖다가 나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뭐가 살아있죠?

내가 살아있죠.

 

책에도 썼고 저희 카페에서도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리는데

여러분, 명상을 통해서 체험되는 어떠한 트랜스 의식의 상태는

깨달음이 아니에요.

그리고 트랜스의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특정한의식의 상태를 또 다른 나로 삼을 뿐이에요.

그게 뭡니까?

검정색 볼펜을 쓰다가 파란색 볼펜으로 바꾼 거에 지나지 않아요.

여전히 뭐가 살아있어요?

내가.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이렇게 어떤 특정한 트랜스 의식, 변성 의식의 상태에 딱 들어가면 어때요?

기분이 엄청 좋아요.

그것을 뭐라고 착각을 합니까?

깨달음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변성의식의 황홀한 상태를, 신비로운 상태를 뭐로 착각을 해요?

지복으로 착각을 해요.

 

이런 건 깨달음이 아니에요.

이런 거는 말 그대로 변성의식의 상태예요.

 

그렇다면 깨달음, 앎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합니다.

여기 남성분들 계시고 여성분들 계시죠?

여성분들, 본인들이 여자라는 사실 알죠?

의심이 필요가 없죠.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레포트를 써내야 돼요?

a4 용지 몇 장으로?

안 그렇죠.

 

남성분들 마찬가지죠.

내가 남자라는 사실 알죠.

똑같아요.

그게 앎이에요.

 

그런데 어떤 앎?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는 앎]이에요.

 

다르게 한번 표현을 해볼게요.

여기 자녀 키우시는 분들

내가 누구누구의 부모다, 내가 누구누구의 엄마고 아빠다라는 사실 아시죠?

똑같아요.

이 앎이에요.

 

지금 앉아 계신 이 순간에 내가 있다라는 느낌, 의심이 듭니까?

안 들죠?

이 앎이에요.

 

어떤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당연함]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것은

속성상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의식의 전면으로 부각되기가 힘들어요.

?

당연해서.

 

여러분 우리 지금 숨 쉬고 있죠?

매순간 숨 쉬고 계신데 숨 쉬면서

아이고 공기의 존재 산소의 존재, 고마워 죽겠네하시는 분

얼마나 계세요?

없어요.

 

우리는 숨을 쉬고 있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데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의식의 전면으로 지각되지 않아요.

이유는 뭘까요?

당연해서.

 

당연한 앎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예요.

깨달음은 바로 그 앎이에요.

뭐에 대해서 아는 앎?

 

일부러 무엇인가라고 썼습니다.

누구인가라고 안 했어요.

이유가 뭘까요?

 

라마나 마하르시 덕에 나는 누구인가 자기 탐구법이 유행을 했습니다.

했더니 뭡니까?

나는 누구인가라고 표현을 해놨더니

나라는 것을 끝까지 무엇과 동일시하냐?

인격적 느낌하고 동일시를 해버렸어요.

 

뭐예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좋은 가르침이 여기에서 또 뭡니까?

제한을 딱 받아버린 거죠.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표현을 하세요.

나는 무엇인가

 

여러분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바꾸세요.

이제까지 내가 깨닫고자 노력하는 식으로 수행을 해오셨다면

헛수고예요.

그게 아니라 이제는 바꾸셔서

깨닫고자, 마음을 내고 있는 지금 이 놈.

이 나는 무엇인가?

그쪽으로 방향을 트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은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지죠.

그렇게 됐더니 뭐에 대해서 알려져요?

신기하게도 나에 대해서 알았더니.

세상에 대해서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