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Q&A 6. 건강과 마음공부/ 현실태와 가능태, 관념태

Buddhastudy 2024. 6. 24. 19:13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때가 되면 해결된다는 말은

어떠한 노력이 없이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명상이나 영상공부를 통해 노력해서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건가요?//

 

 

관점에 따라서 같은 말이에요.

관점에 따라서 다른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중요한 게 있어요.

 

 

--노력이 무엇인지 알기

 

노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노력이라는 것을요

무언가의 쟁취를 위한 인위적인 행위로 받아들이면

삶 자체가 고단해져요.

 

그러나 노력이라는 것을

당연히 자연스럽게 펼쳐져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이면

노력은 더 이상 인위적인 무언가가 아니에요.

 

 

--노력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됨

 

오히려 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됩니다.

결국 관점의 차이가 내 삶의 자세를 바꾸고

내 삶의 자세가 내 삶을 바꿉니다.

 

또 여기서 아셔야 될 건 뭐가 있냐면요.

질문 자체가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이것 아니면 저것

이걸 골라야 될까요? 저걸 골라야 될까요?

내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라는 걸 드러내고 있어요.

그러지 말고 둘 다 하세요.

영성공부도 하고 노력도 하고

왜 두 개 다 고르면 되는데, 꼭 하나만 고르려고...

 

 

--

다음 질문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는 만성 두통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곤도 많이 느끼고 항상 기운도 없는데요.

이런 건강에 대한 부분들도 관념이나 영성공부를 통해서 변화시킬 수가 있나요?)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유는 뭘까요?

몸하고 마음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살핌으로써 몸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아까 그 노력에 대한 질문이나 이런 것하고도 비슷해요.

몸이 안 좋으면 병원도 가시고요.

식단도 조절해 보고

운동도 해보고 하는 과정들 또한 필요합니다.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

 

왜 자꾸 하나를 고르려고 하는 겁니까?

 

현실의 창조라는 것을

단순히 생각하는 힘

아니면 뭐 인식의 힘으로

도깨비방망이 내려치듯이

뿅 하고 바꾸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셨죠?

 

인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전체적인 것이에요.

내 몸이 건강해지는 인식 안에는

병원에 가는 것, 음식 조절하는 것, 명상 수련하는 것

적절한 운동, 관념 분석 재규정, 활력 있는 인간관계 조성,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 등이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외시키지 마세요.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서

이리하면 저리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뻗어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도피에요.

 

노력을 노력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고

당연한 과정으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냥 매 순간 자체가 즐거워집니다, 즐거워져요.

 

삶의 다이나믹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마음 공부를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마음부터 살피셔야 돼요.

 

 

--

다음 질문 들어갈게요.

되게 긴 질문이에요.

 

(존재의 대전제는 인식됨입니다.

이 세상은 의식이 만들어 낸 일종의 생각이며

그래서 모든 물상, 물질은

심상, 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동서양의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용은

인식이 되니까 존재하는 것인데

물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질문이에요.

그러함에도 각종 영화에서 등장하고 12간지에도 나옵니다.

용은 인식은 되지만

보고 만질 수 있는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물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데

이는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2번 같이 붙여볼게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8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죽는 순간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노인으로 생활 마감하는 것과 반대죠.

그러면 왜 영화처럼이 아니라

인간은 아기로 태어나서 노인으로 생을 마감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또 확대를 해보면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낮과 밤이 존재하는 것

중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이론 등은

근현대과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즉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부터 있던 현상인데

이런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 질문드립니다.)

 

 

--물리법칙에 지배받는 현실태

 

본론 들어갈게요.

존재라는 것은 두 가지 양태가 있어요.

양태, 뭐의 줄임말이에요?

모양, .

 

존재하는 방식이

첫 번째 현실태예요.

 

현실태는 물리법칙이 지배받는

이 몸이라는 통로 있죠.

그리고 이 몸에 갇혀 있는 듯이 느껴지는

오감과 의식을 통해 체험되는 형태입니다.

그것을 [현실태]라고 불러요.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사물하고 물질, 외부의 세계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가능태/관념태

 

다른 하나는 가능태 혹은 [관념태]예요.

얘네들도 같은 오감과 의식을 통해서 체험됩니다.

 

하지만 몸에 작용하는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영역이에요.

그래서 감정, 느낌, 의도, 상상 등의 형태나

내면의 의식작용과 같은 형태로 체험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들은

동일한 심상(마음의 상) 즉 의식의 작용이에요.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의 형태를 결정을 해버리는가?

이거는 현실태, 이거는 관념태 아니면 가능태

이 대상들이 부여되는 관념들이 그것을 결정합니다.

 

즉 심층의식으로부터

아까 말씀드린 심층의식

마음 심, 있죠?

이것은 현실이다라고 규정되면 현실태로 체험되는 것이고

이것은 상상, 혹은 관념태라고 규정되면 그리됩니다.

 

 

--인류의 공통 고정관념

 

그런데 아셔야 될 게 있어요.

이와 같은 규정은요

현생인류의 공통 무의식, 공동 무의식 안에 활동하는

고정관념들이 있어요.

즉 공통 카르마를 따라서 발현됩니다.

 

현세에서 용이라는 것은 상상 속의 산물이다라는 관념이

공통 카르마로 작용하고 있다면

용은 단지 상상의 동물이 되는 것이고요.

개는 현실 속의 존재이다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면

개는 현실 존재가 되는 것이죠.

 

반대라면 어떻게 될까요?

반대면은 개가 지금 용의 위치를 차지하고

지금 용은 집에서 다들 한 마리씩 기르고 있겠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릴리가 용이 되는 거죠.

아니어서 다행이긴 해요.

 

 

--물리법칙이라는 상위 카테고리

 

우주의 법칙 등도 예외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현실로 작용하는 법칙이 현실인 이유는요

그것들이 물리법칙이라는

상위 카테고리 안에서 받아들여져 있기 때문이에요.

 

이 물리법칙이라는 건

몸 이전의 상위 관념이기 때문에

그 법칙에 영향받아 나타난 이후에 모든 것은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딴 걸 떠나서.

 

그리고 양자역학적 발견은 조금 다른 관점이 필요합니다.

본래 없었던 것이라기보다는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라는 관념 안에 숨어 있던 것이에요.

이해되시죠?

 

20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이건 뭐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는 거예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던 관념

 

‘20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라는 관념의 형태로 있던 겁니다.

관념의 형태로.

이 또한 뭐예요?

관념태라는 얘기예요.

 

본래 없었던 것이라기보단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라는 관념 안에 숨어있던 것이

20세기를 지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

밝혀진 것이라는 관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에요.

 

 

--현실태도 관념태도 어쨌든 인식된 것

 

그러나 어찌 됐든 현실태가 되든 가능태가 되든

이 모든 것들은 인식된 것입니다.

 

심지어 인식되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뭐를 해야 돼요?

인식되어야 돼요.

 

이를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다와 없다에 대해서 사유를 해보시면 돼요.

있음과 없음.

 

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짐작도 가능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되죠.

없음을 대상으로 삼아볼게요.

얘가 항상 문제예요.

진짜로 없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진짜로 없는 것을 있다, 없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없어요.

결국 없다라는 것 또한

없다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어떤 하나의 상으로 있는 거예요.

 

진짜로 없는 것은요

있다와 없다로 구분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예 엄두 자체가 일어나질 않아요.

 

그래서 상상이 가능한 것은

이미 관념태, 가능태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