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그러면 지난주에 유식 심리학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는데 잠깐만 지난주에 공부한 걸 다시 복습 좀 하겠습니다. 그 페이지 보세요. 유식심리학의 의미에 대해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 책에 23페이지 한번 열어 보시면은 책이 없는 분들은 그냥 이렇게 조용히 눈감고 한번 들어보세요. 조용히 눈감으시고, 허리세우시고. 편안하게. 이렇게 숨 한번 잘 쉬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숨 쉬면서 한번 들어보세요. [유식은 말 그대로 오직 식. 즉 알뿐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제각각 알고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동일한 상황과 대상을 서로 다르게 알고 경험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의 경험과 앎이 모두 유식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서로 다르게 알고 경험하는 것을 존중하고 수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식을 모르면 상대를 오해하고, 자기의 경험을 절대시 하고, 상대방과 비교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우열을 가리려고 한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체험이 아닌 관념, 편견, 투사로 변질되고, 갈등, 미움, 질투, 우월감, 열등감등 갖가지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가 유발된다. 그래서 유식의 핵심 메시지는 오직 내가 그렇게 아는 것이지 남들은 나와 똑같이 알거나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것. 각자 다르게 알고 경험하므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알 때 우리는 삶과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갈등과 오해, 그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유식을 알면 이해와 수용과 존중이 일어나고, 유식을 모르면 오해와 갈등과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네. 이제 유식의 의미인데 지난번 제가 마지막에 유식 의미 정도는 정확히 알고 가시라 했었는데 기억이 이제 좀 돌아옵니까? 네. 좋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는 제각각 안다. 이 말이오. 각기 자기방식대로 이해하고 자기 방식대로 아는데 그래서 유식심리학에서 즉, 유식 치료의 목표는 뭐냐? 제각각 아는 이 識식에서 요거를 智지혜로 전환하는 것이 유식심리치료의 목표라고 그랬습니다.
이 識식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전부 다 내가 아는 거와 네가 아는 거와 또 다른 사람이 아는 거, 한 사람도 아는 것이 다 달라요. 우리가 생긴 모양만큼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각각 다른 것을 이 智지혜로 전환하는 것이 유식심리치료의 목표다. 그럼 왜 이렇게 전환해야 되느냐? 이유는 제 각각 아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아는 것을 비교해서 더 많이 안다. 더 적게 안다. 내가 아는 것이 진짜다. 네가 아는 것은 틀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 서로 비교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그런다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이걸 우리 불교에서는 아마 가장 가까운 거를 하려면 알음알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방식대로 자기식대로 이해를 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서로 다른 것을 우리는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경험이니까 서로 수용하고 이해하고 아~ 저 사람 저렇게 할 수 있구나. 아~ 그냥 그렇겠지. 내가 내 머리로는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내가 다 알 수 없다 이 말이오. 상대방을. 우리 속담에 그런 말 있죠? 열길 물속을 알아도 한길사람 속은 모른다. 그랬어요. 평생을 같이 살고도 가끔 가면 너무나 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유식공부를 안 하게 되면 이런 마음공부를 하지 않게 되면은 그 사실을 가지고 그냥 당연하다. 중생심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서 강한 배신감이나 강한 분노나 아니면 그거로 인한 굉장히 제 2차적 반응을 일으키게 되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공부를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아~ 우리는 원래 그렇게 서로 경험이 다르니까 성장과정이 다르니까 배경이 다르니까 조건이 다르니까 그렇게 다르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여유가 생긴다는 거죠. 다름에 대해서 차이에 대해서 굉장히 당황스럽거나 그러지를 않고 여유가 생기게 되고, 그래서 그걸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생긴다. 그래서 마음의 여지가 생긴다 그랬고. 지난 시간에 그러니까 항상 내가 경험하는 건 내가 아는 거에 마침표를 찍지 마라 그랬죠? 여지를 둬라. 남겨둬라. 이렇게 말씀 드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식심리치료에서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수용해 가는 과정이 사실은 이 지혜로 전환해가는 성장해가는 깨달아가는 그런 과정이다. 그것이 치유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그 밑에 줄에 보면요. 그러면 식과 지혜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 식과 지혜 가장 큰 차이가 뭐냐고 나오는데 투사라고 해놨는데. 이거 서양의 심리치료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Projection프로젝션이라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영사기 같은 거 있죠? 보면 뒤에 비추잖아요. 투사해서. 그런데 그냥 더 쉬운 말로 색안경이라고 해두죠. 뭐. 그러니까 내 경험의 색안경을 끼고 모든 대상이나 사물이나 사실들을 내방식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착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 색안경이 그냥 색안경이 아니라 내 생각이고, 내 감정으로 드러나고, 그리고 내 기억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는 거에요. 그 색안경에 대해서 나의 색안경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림자처럼 늘 따라 다니면서 관계 마다 오해와 착각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마치 뒤에 보면 음식물 비유가 나오는데 우리가 음식을 먹었는데 내 피와 살이 되고 소화를 못 시키고 에너지가 안 되면 어떻게 되요? 변으로 대소변으로 나와야 되죠? 내 소화불량이 되면 나와야 되는데 만약 안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변비가 생기고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게 되고 힘겹죠.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우리가 냄새 맡고 우리가 이 감각으로 마음으로 늘 매 순간순간마다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모든 걸 경험하잖아요. 그랬는데 그 경험한 것이 내 안에서 내가 소화가 안됐다. 잘 이해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찌꺼기로 남는다. 음식물 찌꺼기. 소화 안 된 음식물 찌꺼기처럼 우리의 정신적인 것들도 찌꺼기로 남게 돼서 우리가 먹고 소화 안 되면 항상 배가 부르륵 해가지고 아주 불편하죠? 그런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진단 얘기에요. 그래서 음식은 자기에게 맞게 잘 소화를 시키려면 자기에게 자기 양에 맞게 먹어야 되고, 상황에 맞아야 되듯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그냥 막 아무데나 가서 보고 듣고 느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초기 수행을 할 때는 상당히 그런 걸 가려서 선우를 만나야 되고. 이런 건 많이 나오죠. 우리가 어떻게 절도 있게 생활을 해야 된다든지. 신구의 삼업. 내가 행동하는 거 말하는 거 생각하는 거를 어떻게 해야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더 성장하는 그런 길인가 하는 거에 대해서 잘 이렇게 안내를 하고 있잖아요. 그러듯이 우리가 그냥 보고 듣고, 아닌 것 같지만 우리에게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이거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녀교육을 한다든지. 가정에서도 어때요? 애들에게 성장하는 애들에게 함부로 아무거나 TV프로를 그냥 막 보여주고 아무거나 해가지고는 안 된다. 왜? 바로 내가 보는 게 보는 거 자체가 자기가 일부가 되기 때문에 먹는 것이 뭐에요? 지금 여기 물이 있어요.
이거 있으면 지금 저하고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이 물하고는 아주 다르죠. 물하고 서강스님하고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이거 마셔버려요. 이렇게. 마셨어요. 마신 건 뭐가 됐죠? 제 몸의 일부가 됐다. 내 피가 되고 살이 됐어요. 그러듯이 내가 보고 듣고 또 냄새 맡고 이렇게 접촉하게 되면 그것이 뭐라고요? 아이 저거 내 거 아니고 저 사람 거지 하지만 이미 나의 일부가 됐다. 우린 보통 물질에 대해선 내가 삼키면 나의 것인 줄 알지만, 나의 일부가 된 줄 피가 되고 살이 된 줄 알지만, 정신적인 것은 모르는 수가 많아요. 그래서 좋지 않은 말도 내가 하게 되고 듣게 되고 그것이 왜 업을 짓는가? 생각을 한 번 해보셔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어떻게 정신건강을 해치는가? 내가 만약 여기 독이 든 거를 마셔 봐요. 그러면 당장 마시는 순간에 굉장한 해침이 일어나겠죠. 몸에. 그러듯이 불 건강한 소리를 내가 하고 듣고 보고 그런 것들이 다 뭐죠? 나의 정신건강을 해친다. 내가 보고 듣고 하는 순간 나의 것이 되기 때문에. 저 사람께 아니라니까요. 저 사람이 욕했으니까 난 듣기만 했으니까 괜찮지.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능하면 요즘 뜨는 얘기. 긍정심 얘기에요.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보고, 어차피 누구든지 완벽하게 좋거나 완벽하게 나쁘지는 않으니까. 기왕이면 같은 값이면 긍정적인 면을 보고, 그리고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우리가 왜 감사하면서 살고 긍정적으로 보는 긍정적인 삶이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또 행복하게 해주는가?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네. 요기까지 하겠어요.
그런데 투사의 주체는 말씀 드렸죠? 자아의식 때문이다. 나나나하는 거. 그리고 그것은 4번뇌. 아만아애아견아치. 비교하는 마음. 내 중심의 사랑, 생각, 이러한 아치. 나에 대한 어리석음 등등이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참 화두 같은데 [왜 눈은 그냥 단순히 보는 작용만 하는 것인데 안식이라고 했는가?] 유식 이거 조금 깊어요. 설명을 드려야 될지? 말아야 될지? 그러니까 말씀 드렸죠. 원래로 산출하면 우리 눈은 그냥 보는 작용만 해야 되고, 귀는 그냥 듣기만 해야 될 텐데. 실제로 그러하냐? 아니라는 거에요. 눈이 그냥 평범하게 그냥 보여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그냥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들려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걸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걸 듣는다는 거에요.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내가 듣는 게 아니고 편집하고 왜곡하고. 그래서 여기 식 자가 붙었어요. 지혜로운 건 아니고. 바로 누구 때문에? 제7식의 자아의식. 나를 빛나게 해주냐? 나를 영광스럽게 해주냐? 아니면 나를 기분 나쁘게 하냐? 뭔가 나를 드러내는 데 어떤 것이 더 필요한가? 그렇게 해서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런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래서 식 자가 붙었다. 원래 그냥 눈은 뭐에요? 그냥 비추어주는 거 귀는 소리만 들으면 되는데 거기에 식이 붙은 거는 바로 나, 아만, 자아의식의 졸개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5가지 감각이. 그런 의미로 제가 여기다가 그런 하나의 의문을 한번 열어봤습니다.
자~ 그럼 이번 주에는 사성제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는데요. 사성제는 이 책으로는 33페이지 ~ 66페이지까지입니다. 사성제가 뭐냐? 한번 이 페이지를 통해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페이지로는 34페이지인데. 그냥 한번 들어보세요. 사성제가 뭔가? [모든 불교 교리는 붓다가 발견한 깨달음. 즉 삶과 존재의 고통.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책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냥 편안하게 들으시면은 뭔 소리인가? 일일이 다 안 알아도 되요. [그 가운데서 사성제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최초로 설법한 내용이다.] 우리 다 아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다.] 사성제 우리 이미 다 많이 들으셨을 거에요. [사성제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苦集滅道고집멸도의 네 가지 거룩한 길, 방법이다. 이제 치유하는 불교읽기에서는 사성제를 어떻게 보는지 한번 보죠. [치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성제는 마음병을 치유하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원리로서 불교심리치료의 가장 기본적인 원형 가운데 하나다. 그런 만큼 누구나 쉽게 심리치료에 적용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사성제쯤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그 원리가 쉽다고 생각한다.
사성제란 고집멸도 즉, 삶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에는 원인 있으며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은 사라진다는 원리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여 도에 들어가는 8가지 방법이 있다는데까지 알면 사성제를 공부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삶과 인간관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근본차이가 없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앎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무슨 얘기인지 공감가세요. 우리는 보통 불교교리 공부할 때 사성제 그러면 사성제는 고집멸도. 육바라밀 그러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뭐 이러면 나 육바라밀 안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거는 아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 불교에 이런 것들은 이론이 먼저가 아니고 실천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그냥 이렇게 개념으로 용어로 정리해 놓은 거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35페이지 마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성제는 단지 종교적인 개념이나 신념이 아니다. 너와 내가 좀 더 사랑하며 살고, 현재의 순간을 더욱 온전하게 즐기며 머무르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수단이자 실천수행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집멸도의 네 가지 길을 실제 삶과 인간관계의 현장, 일상의 크고 작은 심리상태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들 속에서 체험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냥 사성제하면 고제가 있고 집제가 있고 멸제가 있고 도제가 있다. 이렇게 이해 가지고 아는 게 아니라 실제 우리 일상 속에서 사성제의 원리가 적용 돼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그러면 그 방식이 뭐냐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고성제는 뭐냐 하면은 제가 맨 처음에 20대에 아함경 보다가 삶은 고통이다. 고다. 완전히 이 명제를 듣는 순간에 너무나 크게 공감하면서 정말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20대는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명료하지가 않고 굉장히 방황스럽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내가 누군지. 잘 모를 때거든요. 그런데 일찍이 많은 철학자들이 삶이 뭔가? 인생이 뭔가? 의문은 던졌는데 답을 내린 사람이 없어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을 뭐에요. 안다는 게 이게 차이점이라고 얘기했죠. 본인 자신이. 그랬는데 처음에 아함경을 접했는데 삶은 고다. 이게 너무 명쾌하면서 너무 공감이 가더라는 거죠.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지금 제 나이가 되어가지고 지금에 와서 삶이 고다. 하면 전혀 감각이 일어나지 않는 거에요. 왜냐하면 지금 저에게는 삶이 고가 아니고 삶은 선물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있어서는 아~ 아직도 내가 남은 세월이 그래도 앞으로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훨씬 짧죠. 그러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고통이든지 아니면 어떤 부정적인 우울이든지 뭐가 온다 해도 그래도 고통은 고통으로 받고 우울은 우울로 느낀다 해도 역시 전체적인 거로는 고마운 거에요. 감사한 거죠.
20대 같으면 괴로우면 죽어버려야지. 이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굳이 내가 일부러 애써서 죽으려고 안 해도 때가 되면 내가 죽고 싶지 않아도 원든 원치 않든 가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현재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이 순간이 굉장히 복되고 감사한데. 그런데 삶은 고다. 이래가지고 고성제를 삶은 고다. 이렇게 설명 되가지고는 와 닿지가 않는다. 지금 굉장히 사랑해서 너무 인생이 행복하고 좋아죽겠는데 거기다 대고 삶은 고다. 아이고 뭐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가르침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것도 사랑하다가 사랑이 실패해서 깨어져서 죽기 직전에 그 대목을 읽는다면 어때요? 아~ 하고 공감이 또 되겠죠.
그런데 고성제. 이건 진리라 그랬거든요. 제라고 붙으면 진리입니다. 영어로 설명되어있죠? 진리. truths of suffering 진리라고 했는데 진리는 괴로운 사람이나 슬픈 사람이나 누구한테나 통용이 돼야 진리이지. 누구한테는 해당이 안 되고 누구한테는 해당이 안 되면 진리이겠어요? 그러니까 아~ 제가 생각하기에 고성제는 뭐냐?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는 [고를 자각하는 거다. 알아차리는 거다.] 고통이 있으면 고통이 있다. 내가 지금 고통하고 있으면 고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고성제다. 고성제의 핵심은 잘 들으세요. 자각하는 거다. 고통을 알아차리는 거다. 내가 고통하는 순간에 고통을 알아차리고, 내가 즐거워하는 순간에 즐거움을 알아차리고, 내가 질투하고 있으면 질투하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있는 거에요.
내가 당연히 알지 그걸 모를까요? 몰라요. 여러분 생각 안 나세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연세 들어도 마찬가지에요. 누구 좋아하면 자기가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 모르죠? 어떨 땐 알려고 하는데도 부정하잖아요. 또 질투하는 것도 “내가 언제 질투했어?” “화났냐?”고 그러면 “내가 언제 화가나?” 하고 더 화를 내죠. 그런 경우도 많고. 그러니까 실제로는 우리가 그때그때 일어나는 거를 자각을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고성제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리는 거에요. 자각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 하시면은 아~ 이게 인생이 괴로운 순간이 있는 사람이나. 결국은 우리가 순간순간 굉장히 천국에 있는지 행복하고, 그러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이렇게 되는 거지. 매 순간 매일 1년 365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까? 불행한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이게 다 통용되는 거는 이거는 삶이 고다. 이거보다는 고통을 자각하는 거다. 요 좀 두고. 그 다음 집성제입니다. 그러면 고통을 먼저 자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나? 그 고통의 원인이 뭔가? 이걸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상제라고 하는 거는 이미 말씀 드렸듯이 부처님께서 성도 깨달음을 이르시고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신 겁니다. 당신 제자들께. 이게 심리 치유적에서 보면 이게 진단이에요. 우리 병원 가 봐요. 병원 가면 맨 처음에 뭐죠? 고제에서는 뭘 하냐? 어디가 아픈지. 아픈 거에 대해서 일단 뭐에요? 증상에 대해서 진단을 내려야 되죠. 증상을 알아야 돼.
증상을 알아야 치료를 하죠. 집은 원인이에요. 이 증상의 원인이 대체 어디서 왔나? 원인을 진단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몸에 이게 진단서에요. 우리 중생은 어떻게 해요? 육도윤회를 돌면서 고통 하잖아요. 그러니까 육도윤회를 돌면서 고통 하는데 요거 이제 다음에 육도윤회는 이 책에 제일 뒤 파트에 있는데 앞당겨서 사성제 끝나고 육도윤회부터 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육도윤회는 우리가 전생에 뭐로 축생으로 있다 현생에 인간 받고 내생에 이런 어떤 교리적인 측면도 있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은 우린 하루에도 육도를 다 도는 순간이 있어요. 찰나찰나마다 왔다갔다 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돌지만 특별히 개인적으로 성향에 따라서 지옥에 더 오래 가있는 사람, 지옥이 단골로 찾아오는 사람. 축생마인드에 있는 사람. 아수라의 질투의 화신에요. 질투 늘 즐겁게 있는 천국에 있는 사람, 이게 정신의 주된 정신. 자기의 상태는 또 좀 다르죠. 사람마다. 그렇게 돌고 있는 상황에서 이 증상을 내가 주로 어느 심리상태에 있냐는 거죠. 그리고 그거에 대해서 내가 지금 현재 괴롭고 있는 그런 심리상태에 가장 큰 원인은 뭔가? 이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이 뭔가를 참는 거고. 그 다음 멸도에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멸도에서는 그럼 원인을 알았으니까 그 원인을 치료하면 원인을 제거 치료하면은 도. 드디어 도에 이른다. 이 말이오.
이거는 결과이기도 하고 치료하는 과정 방법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요렇게 되겠습니다. 오늘은 아마 집제까지 우리 생각해보죠. 방금 말씀 드렸듯이 고제는 고통을 자각하는 거. 집제는 이 고통 증상에 근본원인을 찾아보는 거다.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가 그럼 저 원인을 찾기 전에 하나 생각해 봐야 될게 밑에 보세요. 통증과 괴로움의 차이 그랬어요. 통증과 괴로움의 차이가 뭐냐 하니까 우리가 영어로 들여다보면 통증에 대해서 엄밀하게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양의 명상 심리치유자들 중에 많은 여러분들이 영어로 두 개로 구분합니다. 저는 이걸 번역을 해서 통증이다. 통각이다 해서 통증하고 괴로움. 두 개로 구분했어요?
요 통증을 영어로 pain이라 하고 어떤 사람 거꾸로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공부할 때 이 명상심리치료 이쪽에서 요 두 개를 구분해서 쓰는 사람 많아요. 그 다음 괴로움은 suffering이라 그랬는데. 그러니까 이 폐인 통증은 일차적이 고통이에요. 그러니까 이 폐인을 우리가 너무 뜨거운 걸 만지면 뜨겁고,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대면 괴롭죠? 괴롭고. 아니면 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을 했다. 갑자기 내가 잃어버렸다. 그러면 내가 굉장히 슬프죠. 그런 것들에 대한 그냥 있는 사실에 대한 괴로움 폐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이건 2차적인 괴로움이에요.
뭐냐 하니까 내가 뜨거운데 손을 데었으면서 손이 지금 너무 뜨거워서 데었으니까 화상을 입어서 아프다 이 말이죠. 그럼 그 통증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통증을 막 괴로워하다가 순간적으로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면 “내가 저 인간 때문에 그랬다. 쟤만 아니었으면. 쟤만 아니었으면 안 그랬을텐데 쟤가 그랬다.” 이유를 다른 대상을 다른 이유에서 차는 거에요. 갑자기 내가 통증이 일어난 걸 치료하거나 여기에 대해서 알아차림 하면서 이걸 어떤 대책을 세우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게 아니고, 치료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이유를 찾아가지고. 우리가 여기서 보면 이유를 찾는 건 맞는데 이유를 잘못 짚은 거에요.
일단 이유를 찾아가지고 그 다음에 그 대상을 원망하기 시작 합니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을 잃었거나 뭔가 했을 때 그거를 내가 굉장히 슬퍼하고 굉장히 아파하고 괴로워하는데 포커스가 있는 게 아니라. 갑자기 대상으로 이동해가지고 그 대상을 원망하는 쪽으로 분노하는 쪽으로 아니면 질투하는 쪽으로 이동시키는 거에요. 내 직접 내 안의 괴로움을 보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 밑에다가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이렇게 적어 놨는데. 첫 번째 주 강연을 보신 부산에 계시는 불자님이라고 하는 분이 저한테 메일을 보내셨더라고요. 그 첫 번째 강연을 들으시고 질문하기를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한 부분하고, 그 다음에 그 제가 이 자각을 할 때에 마음이 몸에서 떠나면 안 된다 그랬죠?
그러니까 우리가 괴로움 통증 자체를 2차적 괴로움으로 안 넘어가려고 하면은 내 안에서 일어난 고통, 육체의 이 고통을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안보고 그냥 어떤 대상으로 이동을 한다고요. 그런데 이 분의 말씀은 육체적 고통하고 정신적 고통을 분리시키라고 했고. 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에서. 그러고 분리하라고 했는데 이 부분이 제 설명하고 혼동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어서 지금 제가 여러분한테 프린트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잡아함경하고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의 아함경하고 초기 상원부 경전에서 잘 설명이 되어 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요. 저 혼자 읽어봤더니 6분 이상 걸리더라고.
그리고 또 이해하는데 조금 너무 복잡해서 제가 그냥 두 개를 합쳐가지고 제식으로 편집해서 맞추어서 바꾸어가지고 왔습니다. 한번 잘 보세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게 뭔가? 이거하고 관련이 있는 겁니다. [마음공부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그랬는데 원래 그런 범부하고 불자하고의 차이. 범부는 뭐에요? 마음공부를 전혀 관심이 없고 하지 않는 사람으로 두고. 불자는 아~ 마음공부를 시작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을 대변해서 제가 해놨습니다. 한번 보세요. [범부하고 공통점이 뭐냐 하면 삶에서 오는 즐거움, 괴로움, 이런 것이 올 때에 즐거움 괴로움을 같이 느낀다는 거죠. 경험한다는 거죠.]
즐거움도 경험하고 괴로움도 경험하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중성적 느낌도 경험하는 것에서는 공통된다. 어떤 사람은 오해해가지고 수행을 잘하면 감정이 아예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느껴요. 경험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차이는 뭐냐? 페이지 보세요. [차이점. 범부_괴로움에 처하면 고민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타인과 세상을 원망한다.] 이랬어요. 그래서 이중고통을 겪는다 이거지. 그러니까 괴로움의 현실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오는 삶에 어떤 그런 고통이 있죠. 그 화살 하나 맞았어요. 그런 다음에 그 사실에 대해서 또 뭐에요?
이걸 누구 때문에 누가 그렇게 했다. 누가 이렇게 했다 해서 연이어서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 맞고 연이어서 두 번째 화살에 또 다시 찔리는 것과 같이.] 그러니까 원망을 하고 비난을 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이중고통을 겪는다. 이랬어요. 이게 범부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범부는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며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내가 괴로움을 경험하면 즐거움을 갈망하게 되는 게 집착이라는 겁니다. [저항하는 습기하고 즐거움을 갈망하는 습기가 잠재적 성향으로 자리를 잡아서 끊임없이 내가 삶에서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냥 그 괴로움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자각하는 게 아니라 도피해서 즐거움을 갈망하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이것이 범부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범부는 왜냐하면 괴로움에서 도망가는 거, 그거밖에 모른다는 거죠. 마음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는 알아차리는 훈련을 못했으니까 모르는 거죠. 그냥 괴로움의 휩쓸려 사는 거지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자는 어때요? 마음공부를 한 사람은 괴로움에 처하면 고민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타인과 세상을 원망하지를 않기 때문에 이중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괴로움이 있으면 내가 괴로움을 그냥 알아차리고 그 괴로움 상태를 자각하는 거에요. 누구를 원망하고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럴 찰나가 아니라 그냥 아~ 내가 괴로워하고 있구나. 괴로움이구나. 슬픔이구나. 아니면 외로움이구나. 이런 거를 자각을 한다. 그래서 그 차이가 있다.
그래서 괴로운 순간에 막 안 괴로워하려고 상상을 한다든지 즐거움을 상상하고 그런 것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괴로우면 그 괴로움의 찰나에 그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걸 갈망하는 그런 습관이나 그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 그 찰나를 부정하는 저항적인 그런 잠재적 성향이 없다는 거에요. 그런 걸 자꾸 업으로 쌓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자는 괴로운 경험에 저항하거나 분개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도피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하는 습기와 즐거움을 갈망하는 습기가 잠재적으로 붙여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불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도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린 벗어나는 길을 안다. 어떻게 알아요? 알아차림을 통해서. 마음 수행을 통해서. 명상을 통해서 참선을 통해서 우리는 안다. 이 말이죠. [그러므로 불자는 즐거운 느낌과 접촉하더라도 탐욕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또 즐거우니까 내가 이걸 더해야지. 차이가 대표적 차이. 만약 꽃을 봤다. 이러면. 어디 공원이든 아니면 산이든 꽃을 봤다.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만약에 마음공부를 제대로 잘한 사람은 “아~ 꽃이 참 아름답구나.”하고 체험을 하죠. 그런데 범부는 꽃을 꺾는다. 체험을 하다 말고 꽃을 꺾어서 내가 가지고 가야지. 또 사랑을 한다. “아 저 사람 좋은 사람이구나. 좋은 벗이구나.” 하면 그냥 그 참 좋은 벗이란 체험을 통해서 내가 즐거운 거죠. 내가 꽃을 보고 행복해지잖아요.
그렇듯이 좋은 벗을 보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할 텐데. 갑자기 어떻게 되요? 범부는? 저 즐거워하니 내 친구여야 돼. 나만의 친구해야지. 그래서 집착을 내는 거죠. 소유권을 두잖아요. 내 친구다. 이런 소유를 하려고 그래. 사랑을 해도 마찬가지다. 이건 내 사람이다. 내 여자다. 내 남자다. 내 친구다. 이 물건도 내 거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이렇게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금방 어떻게 되요? 거기서 취하려고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말이에요. 고거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화살이라는 거 이해 되셨죠? 그냥 우리가 뭔가에 접촉하고 경험할 때에 경험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한다고요? 소유권을 투사해서 내 것을 하려고.
꽃을 보면 그냥 감상을 하는 게 아니라 꺾고 싶고, 친구를 보면 좋은 벗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요건 나만의 친구로 해야지, 이렇게 해서 묶이고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고. 그것을 괴로움에 이차적인 고통에 근본 원인이다. 이렇게 생각해. 자~ 그 다음 밑에 한번 보세요. 참고로 또 여러분 가운데서도 질문을 하나 보내주신 분이 있어요. 혹시 이 가운데 나는 질문했는데 이러실까 봐 답변 미리 드릴게요. 금강경에 여래실지실견하는 파트가 나오는데요. 요 부분은 오늘 요거보다는 나중에 뒤에 다른 공부할 때 관련해서 설명을 더 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 제가 그 답변은 나중으로 미루고요. 이제 그거하고 관련해가지고 또 아~ 대통령선거를 누구를 하하하. 뽑았으면 좋겠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어떤 분을 찍어야 할지 현답을 부탁드린다는데 굉장히 재미있고도 실질적인 질문이죠. 우리 뭐? 불법을 많이 공부해도 현실적으로 할 때 가끔 연결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제 일주일간 고민을 해봤어요. 순간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뽑으랄까? 그건 농담이고요. 아~ 그럴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구를 뽑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구하는 겁니다. 누구를 뽑느냐? 하는 건 참 이차적이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범부의 중생의 우리 입장에서는 다 제각각 알고, 제 각각의 견해가 있고, 입장이 있거든요. 그 입장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때로는 뭐에요? 부부관계도 안되고 자식관계도 안되죠. 친구도 안 됩니다. 굉장히 나하고 뜻이 잘 맞는 친구라 할지라도 그런 거 뽑는데 일치할 수 없어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옛날에 그런 일로 괜히 나하고 상관없는 가족끼리 괜히 식사하다가 어떻게 되요? 공양하다가 정치 얘기하다 보면 나중에 감정이 붙어가지고 미운 생각에 말 안하고 숟가락 놓고 밥안먹은 적도 있어요. 왜 그래요? 그냥 그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되죠? 주관적인 견해. 투사가 들어가거든요. 내 경험에서 뭘 한다고요? 색안경을 끼고 있어요. 그래서 엉뚱한 사람끼리 감정이 상하기도하고 그래요.
그런데 식을 알게 되면 달라지죠. 유식을. 왜? 우린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거에요. 완전히 깨달음에 일으키기 전까진 서로 다른 견해가 있고 입장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누구를 뽑느냐는 이차적인 문제고 그것은 그렇게 대단히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내가 권리가 있을 때 그 권리를 행사하는 거라는 거죠. 그 권리를 행사했을 때 각각의 식에 근거해서 각각이 가장 나름의 자기의 견해에, 자기의 앎에, 자기의 입장에서 충실하게 권리를 행사하면 그게 전체적으로 보면 어때요? 다수의 의견이 되는 거죠. 그게 다시 의견이 되기 때문에요. 너무 많이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만약에 20대가 오늘날의 어떤 직장 문제라든지. 이런 취직이라든지 등록금 문제나 고민해보거나 따져보면 뭐겠어요? 그들이 투표하는 참여율이 낮기 때문이죠. 누구를 뽑느냐? 중요한 게 아니라 열심히 참여하게 되면 그들을 위한 정책이나 이런 걸 자연스럽게 내놓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시골에 있는 사람이 많이 참여하게 되면 또 그들을 위한 정책이 나올 거고. 왜? 정책 하는 입장에서 보면 유권자의 어떤 비율이나 투표 참여도에 의해서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런 걸 너무 많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참구할 사실은 요즘은 미디어가 너무 발달해서 옛날처럼 순전히 내 느낌으로 나의 필요로 하면 좋은데, 옆에서 요사람 뽑아. 저 사람 뽑아라. 이렇게 선전 저렇게 선전. 천수경에 나오죠? 이간질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굳건하게 정말 내 입장에서 순전히 이렇게 잘 생각해보고 나의 가치나 나의 어떤 의미로 내 순전하게 하면 좋은데 갑자기 옆에 사람, 옆에 사람 자기 입장에서 해라해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데만 많이 휘둘리지 않으면 좋겠다. 누구든지 자기입장에서 하니까 나는 순수히 내 입장에서 내 경험에서 내 느낌 판단으로 하면 참 좋은데, 그런데 많이 휘둘리게 되면은 결국은 좀 복잡해지죠. 그러니까 그러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예. 자~ 이제 요번시간 고집멸도를 하는데 고통은, 고통에 대해서 한 가지 이 시간에 이해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자~ 앞에 거 다 잊어버렸다 쳐요. 요것만 알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고통에 대한 겁니다. 고통이 뭐냐? 하는 거죠.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살면서 고통은 때로 피할 수 없어요. 왜? 제각각 알고 제각각 이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 부딪치고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내 예상대로 내 기대대로 인생이 와 주지 않는다는 거에요. 우리가 뭐 언제 괴로워요? 모든 내 삶이 내 예상대로 내기대도 이루어지면 내가 고통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데 서로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난 어쩔 수 없이 내 식대로 이해되니까요. 그러니까 그때 이 고통이 참 의미가 중요한 건데요. 고통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뭐겠어요?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되요?
때로 상대와 세상과 관계없이 제가 첫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더불어서 이웃과 전체 이 생태계 우주와 함께 환경과 더불어서 소통할 수 없을 때 고통이 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 성장 깨달음을 위한 거름이고 신호고 방편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책의 39페이지 보면 고통을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는 하나의 뭔가 재고해봐라 이거죠. 이 식이 뭔가? 이게 노란 불 빨간 불 들어왔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해보라는 그냥 신호에 불과하다는 거에요. 고통이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그 고통 때문에 죽으라든지. 고통이 엄청나게 내 인생에 실패라든지. 내가 뭐 잘못된 인간이라든지.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뭐에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이해한, 내가 경험한 그 식에서 뭔가 재고해봐라. 다시 생각해봐라. 이런 뜻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수정을 요구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괴로울 때 내방식대로 그런 어떤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괴로우면 어떻게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성제를 이해했을 때 항상 고통이 현실적으로 뭔가 내 예상하거나 뭔가 틀려서 어떤 갈등이 오거나 괴로움이 올 때는 부처님께 법당에 와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 제가 뭘 몰라서 지금 괴롭습니까? 제가 뭘 알아야 되겠습니까? 뭘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뭘 수정해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바꾼다는 거죠.
“부처님께 이런 것도 올리고 백일기도도 올렸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줍니까? 부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이런 게 아니라 우리는 뭐에요? 공부하는 마음공부를 한 불자로는 바꾸어야 되요. 고통이 왔을 때 뭐라고요? 아~ 뭔가 내가 예상 못했나? 뭘 생각을 내가 좀 잘못했는가? 착각했는가? 그러니까 내가 실패한 인생도 아니오. 내가 무슨 죄인도 아니오. 잘못한 것도 아니오. 뭔가 나의 앎과 나의 경험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거죠. 고통은 하나의 내 인생의 신호등이다. 그러니까 뭐에요? 찬스기도 하죠? 괴로움이 찬스입니다. 내가 행복하고 수정만 하면 어때요? 행복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거죠. 오늘은 이번 주에 는 요 고통의 의미를 지난주에는 유식의 의미였고 오늘은 고통의 의미를 잘 알고 가시고 다음 주에는 그 고통이 어떻게 원인을 멸할 건지 멸제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스님법문 > 서광스님_치유하는불교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6회 육도윤회2 (0) | 2013.04.28 |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5회 육도윤회1 (0) | 2013.04.28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4회 사성제2 (0) | 2013.04.21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2회 유식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0) | 2013.04.14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1회 치유하는 불교읽기란 (0) | 2013.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