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970년에서 기원전 931년까지
약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고 추정되는
이스라엘 왕국 3대왕 솔로몬은
지혜의 왕, 명군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구약성서에 기반하고 있으며
구약성서는 구전을 포함,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성문화하기 시작해
기원전 50년경까지 기록된 서적이죠.
솔로몬의 치세는 열왕기상 3장에서부터 등장하며
열왕기는 지난 세계사 영상에서 다루었던
다윗이 활동하던 사무엘기 이후의 시대로
솔로몬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내용들로 전개됩니다.
구약성서의 신학적 사관의 경향성은
현대적 의미에서는 역사서라 할 수 없지만
고대 유대인들의 역사성이 높은 다수의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죠.
솔로몬은 지혜와 함께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은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 신자가 아니더라도
지혜로운 심판을 떠올리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시키고
오랫동안 아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끈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통치 기간 가장 큰 흠으로 꼽히는 사건으로는
부하장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강제로 취한 것도 모자라
우리야를 위험한 작전에 투입함으로써 죽게 만든 후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이 있었죠.
밧세바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마음에 담았지만
자신은 살아 나가야 했기에
다윗의 총애를 받아 솔로몬을 품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고, 다윗이 늙어 세상을 떠날 때쯤
아들들의 후계자 다툼이 있었는데
본래는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있었기 때문에
솔로몬이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희박했죠.
하지만, 밧세바는 다윗의 여러 아내들 중에서도 총애를 받고 있었던 터라
선지자 나탄과 함께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아도니야 파가 손쓸 틈도 없이
다윗이 직접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왕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정통 후계자를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내세우는 경우는 많았는데
이 경우는 아들의 처신에 따라 왕위 선택의 평가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이 후일 지혜의 왕으로 불렸기 때문에
당시의 다윗의 선택은 선견지명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약 솔로몬의 치세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왕으로 이어졌다면
다윗의 선택은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치우쳐
아무 후계자나 뽑았다는 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혜의 대명사로 불려지는 솔로몬 또한
그 뒷면에는 이스라엘의 분열을 일으킨 요인이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전 다윗 시대. 왕의 유일한 견제자였던 요압을 제거함으로써
솔로몬의 정적이 없어졌으나
이는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요압 군대의 분열을 의미하기도 했죠.
국내에서 절대군주가 된 솔로몬에게 대적할 자는 없었으며
군대양성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로 이어져
주변의 군사력이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여자를 밝히기로도 유명한 왕이었는데
거대한 하렘을 건설하여 후궁이 7백명, 첩이 3백명이라고 알려졌으며
이는 솔로몬 사후 국가 분열을 초래하는 불씨가 되었죠.
솔로몬의 지혜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두 명의 매춘부가 한 아이를 놓고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는데
누구의 아이냐고 판결을 묻는 에피소드입니다.
모두들 잘 알고 계시는 이야기겠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어느 날 여자 두 명이 솔로몬의 판결을 받기 위해 찾아왔죠.
한 명이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제가 아이를 낳고 3일째되는 날 이 여자도 출산을 했습니다.
하지만, 몇일 후 이 여자는 자신의 실수로 아기를 압사시켰고
모른척하고는 제 아기와 바꿔치기 하였죠.
이에, 반대쪽 여자는
‘저 여자가 거짓말 하는 것’이라고
'살아있는 아기가 제 아이입니다.‘ 라고 주장하는데요.
솔로몬은 판결을 내주겠다면서
아기를 반을 잘라서 반씩 나눠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처음에 발언했던 여자가 깜짝 놀라면서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그냥 이 아이를 주겠다고 했죠.
이에 솔로몬은 아기를 살려달라는 여자가 어머니님을 밝혀냈다는 일화입니다.
현대사회라면, DNA 검사로 해결이 될 문제이지만
당시로서는 ‘지혜의 왕’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에피소드라 할 수 있겠네요.
이 외에도 악마에게 다리를 건설해주면
먼저 건너는 것의 영혼을 악마인 너에게 줄테니
잘 지어달라고 부탁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악마가 다리를 완공하고나자
솔로몬은 사람이 아닌 염소를 가장 먼저 건너게 했죠.
그리고는 ‘내가 꼭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 적은 없잖아’ 면서
낚시왕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 명의 아기를 두고 다툼을 하는 두 사람 앞에서
반으로 자르자고 함으로써 진짜 어머니를 찾아낸 일화나
악마 마저도 속였다는 이야기들로 인해
솔로몬은 오컬트 계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컬트는 역사적이나 과학적인 가치와는 무관하게
매니아적인 요소로서
여러 신화나 전설 등의 문헌으로 전승되는
영적 현상을 탐구하는 단어인데요.
중세 유럽 때 오컬트는 마술과 더불어 악마적이고 이교적인 것으로 탄압받는 소재였는데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다양한 관심
이슬람 및 타 문화와의 교류 등으로
많은 이들에게 흥미를 보이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오컬트 계에서 솔로몬의 이름은
악마학 ‘솔로몬의 72악마’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솔로몬 왕이 72 악마를 봉인했다는 뜻을 의미하죠.
72라는 숫자는 황도 12궁을
다시 6개의 구역으로 나눈 숫자로
상징적으로 전방위적인 악마의 지배자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솔로몬은
악마들을 놋쇠로 만든 항아리에 봉하게 되는데
시대가 흘러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보물인 줄 알고는 항아리를 열었다는 이야기죠.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로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어린 시절
무천도사의 스승이
피콜로의 전신인 대마왕을 마봉파로 항아리에 넣었지만
시간이 흘러 빠져나오게 되었다는 내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등장하는 유대인의 전설에서는
솔로몬의 반지는 마법의 반지로
지혜의 원천이자 정령을 지배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하는데요.
이뿐만 아니라, 녹색 비단으로 된 마법의 양탄자를 이용해
궁정 내에 어디든 다닐 수 있다던가 하는 무슬림들의 인기 캐릭터로
코란에서는 솔로몬, 즉 술래이만은 선지자로 간주됩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치세에는 아버지 다윗 왕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다윗은 군사와 외교적인 면에서 국가의 단단함을 유지해갔다면
솔로몬 왕은 내정면에서 치적을 보였으며
대표적으로 예루살렘 신전의 건설이었죠.
신전이라 하면
이집트나 그리스에도 많은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신들의 집, 혹은 신의 집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야훼를 믿는 일신교였기 때문에
한 명을 위한 신이었다고 할 수 있죠.
유대인은 신전을 예루살렘에만 지었으며
성서에서는 이를 성전이라 부릅니다.
다른 문화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신전이라 하면
그리스 로마처럼 신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은 십계명으로 신상을 만들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죠.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무렵에는
성소의 장소를 지정할 때는 성막을 옮기며 사용했었고
이후 다윗이 신전을 세우려고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이 제1성전을 짓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건축 과정과 성전의 세부에 대해서는
구약 열왕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모든 돌은 돌을 다듬는 곳에서 크기에 맞게 잘려진 다음 운반되었기 때문에
공사현장에서는 큰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었죠.
예루살렘 신전을 완성한 솔로몬은
이제 자신이 거처할 왕국을 축조하는데
자신과 함께 많은 후궁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곳이라
신전을 능가하는 대형 건조물을 짓게 됩니다.
신전과 여러 건축물을 지을 당시에는
고대 페니키아의 중심이었던 티레에서 히람 왕이 보낸 기술자가 와서 도왔으며
목재로 쓸 엄청난 양의 백향목을 벌목하는 등
서로 무역을 하는 경제적 교류도 활발했죠.
하지만, 많은 건축물들을 쌓아올리는데는 노동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과 이민족의 반감을 쌓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강제 노동과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는
이스라엘의 분열을 예고하게 되죠.
140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두오모 성당 지붕 건축으로 잘 알려진 브루넬리스키를
콩쿨 대회에서 이겼던 기베르티라는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기베르티는 초기 르네상스 때의 조각가이자 금속공예사였으며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중에서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라는 작품을 제작했었죠.
1438년에 열린 피렌체 공의회에는
서방과 동방의 신앙적인 합일을 찾기 위해 이루어진 것인데
이 작품을 통해 공의회를 기념하고자 했습니다.
시바 왕국은 B.C 950년에서 B.C 115년까지 존재했던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던 나라로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무렵인 기원전 10세기에는
시바 왕국의 지배자는 마케다라는 여왕이었습니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을 찾아와
지혜를 시험해보았다고 열왕기에 등장하는데
역사가들은 이 당시 고대 이스라엘과 아라비아 사이의 상업적 교류가 있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간의 필수 무역로인 팔레스티나에 위치하여
외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거죠.
독일의 화가 ‘콘라드 비츠’의 1435년작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서는
필리그리로 장식된 황금색을 배경으로
작품 속에는 주변인들이 없으며
마치 은밀한 침실에서 만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에티오피아의 전설에서는 이 둘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에티오피아 시조인 메넬리크 1세라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그리고, 솔로몬의 행적으로는
‘솔로몬의 노래’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22번째 권으로 ‘아가서’라고도 표현하죠.
성서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목적으로 인해
진지한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거라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아가서는 선정적인 내용들도 포함된
‘사랑의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실제 그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솔로몬의 아가라’라는 문구로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솔로몬을 저자로 보고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시인만큼
그 내용도 노골적으로 육체적 유혹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남녀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에서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니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구나’부터 시작하여
그 수위가 점차 높아지면서 19금으로 치닫아지기도 합니다.
성서에도 이러한 사랑노래가 담긴 점에 대해서
일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들은 인간에 관한 시라고 말하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의 사랑을 표현하다고 생각했죠.
유대인들은 이 책을 유월절에 유대 회당에서 크게 낭독하는데
유월절은 유대의 최대 명절로
발효시키지 않은 빵 축제날의 날입니다.
고대 히브리 노예시절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나면서 서둘러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발효시키지 않는 빵을 들고 나섰던 거죠.
솔로몬이 사랑에 능통하고 여성의 심리를 잘 이해하는 데는
그만큼 여성으로 둘러싸인 생활을 원인으로 꼽기도 합니다.
하지만, 낭만이 가득하고 풍요로운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국가 전체가 흔들리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솔로몬에게는 후궁과 첩이 수백명이 될 정도였는데
여자들이 대부분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들을 위한 신전을 더더욱 많이 짓게 되었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속되는 신전 건축은 노동력의 착취로 이어졌고
부담스러운 부역과 세금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솔로몬도 나이가 들어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스라엘의 군사력, 경제력은 훼손되어 있었으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서로 세력 다툼을 한 끝에, 결국 나라가 분열되죠.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유다지파와 벤야민 두 지파는
르호보함의 통치 아래 남유다 왕국이 건설되었으며
나머지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지지하며 북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 중심으로 대부분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가 안정적으로 이어져갔지만
이스라엘 왕국은 10지파의 연합체여서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을 선택했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오랫동안 싸움이 이어졌고
먼저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유다 왕국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친아사리아 정책을 펼쳤으나
아시리아는 쇠퇴하게 되고
신바빌로니아가 침입했을 때는
이집트에게 원정을 요청했지만 무시되면서
유다 왕국은 멸망하여,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죠.
오늘은 고대 이스라엘 11번째 시간으로
지혜의 왕,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 솔로몬에 대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교육용 책에서, 두 여자의 아기 일화로 자주 등장하는 솔로몬이기도 하지만
오컬트 계에서도 솔로몬의 72군주라는 캐릭터로도 등장했는데요.
지혜로운 판결로는 유명한 군주이기는 하나
수많은 후궁과 처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다수의 무리한 신전건축물을 위한 국정운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받고 있기도 하죠.
솔로몬의 사후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며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남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기원전 597년, 586년 두 차례에 걸쳐
유다 왕국의 국민은 신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하죠.
기원전 538년 신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모세의 법률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유대교를 토대로 크리스트교가 탄생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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