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31년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 자신들의 그리스 지역 동맹국들을 이끌고
27년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리스 세계 전체를 황폐화 시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나고
전후의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승자였던 스파르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며
그 외 테베, 메가라, 코린토스 등의 국력도 크게 감소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는 내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404년.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그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갈 듯 했으나
스파르타는 다른 국가들도 견제하는 등의 목적으로
아테네를 존속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아테네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레우스까지 연결되는 성벽을 해체하고
오랫동안 그리스를 평정했던 아테네 함대를 해체할 것이며
정치제도를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원전 404년부터 아테네에서는
리산드로스의 후견하에 민주정치가 폐지되고
크리티아스 (Critias), 테라메네스 (Theramenes) 등을 대표로 하는
30명의 과두정치인 30인 참주가 시작됩니다.
30인 참주는 기존의 민주주의 법을 말소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법을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결과적으로는 과두정치 체제가 되면서
아테네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시켰습니다.
이에, 모든 아테네 사람들의 권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30인에게 선택받은 자만이 여러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30인은 “정부에 함께 참여할” 3,000 명의 아테네인들을 선택했고
이렇게 선택된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할 권리
배심 재판을 가질 권리, 도시 경계 내에 거주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선택된 3,000명의 목록은 계속해서 수정되었는데
이는 다시 말해, 30인 참주에게 헌신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명한 방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크리티아스가 이끈 30인 참주의 목적은
확고한 정치체제를 만들기보다는
과도기 정부를 수립하여, 반대자들을 제거하고
문제가 된다고 여기는 법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에 반대하는 수많은 아테네인들을
사형시키거나, 추방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주도하게 됩니다.
한 예로, 소피스트 이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가
재판 없이 1500 명을 사형에 처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과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리티아스는
그 잔인함과 비인간성으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는 “최초의 로베스피에르”라고도 불립니다.
이들은 사형의 기준을 두는데 있어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반 시민들도 모두 숙청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을 함께했던 같은 편인 테라메네스가 보다 못해
과도한 폭력과 부당함에 반발하며 반기를 들었는데
크리티아스는 후에 테라메네스를
음모와 반역죄로 기소하여 독을 마시게 했습니다.
또한, 재산이 많았던 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갖가지 이유를 붙여, 재산들을 몰수하였고
몰수된 재산은 30인의 참주와 지지자들에게 배분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의 불만이 생기고 있었지만
30인 참주들은 시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300명의 “채찍을 든 사람들”을 고용하는데
이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경찰 역할을 했습니다.
30인의 참주는 외국인들에게도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외국인들에게 부여되었던
다양한 시민권을 폐지 및 법을 개정했습니다.
아테네에 대한 완벽한 지배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램으로
30인 참주는 자신들의 체제를 표면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누구든 추방하거나 사형시켰습니다.
이들이 아테네를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는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도시에 남아있었는데
이 때문에 대중들은 소크라테스와 참주는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여기게 됩니다.
더욱이 30인을 이끌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은 추후, 아테네가 다시 민주정이 되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는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플라톤은
대중들의 믿음과는 달리
자신의 저서 ‘변명(Apology)’에서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밝힙니다.
한 번은 소크라테스가 30인 참주로부터
‘살라미스의 레온’을 사형시키기 위해
레온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레온은 공정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는 30인 참주들의 눈 밖에 벗어났고
소크라테스와 다른 4명에게 레온을 데려오라고 했던 겁니다.
다른 4명은 명령에 순종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집행하는 행위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 이를 거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레온에게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방편을 귀띔해 준다거나
그를 살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연유 등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참주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40대 시절.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여러 분쟁 중 하나인 델리온 전투에서
장군으로도 활약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후퇴하던 전투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잘 인솔하여 패잔병 피해를 최소화시켰고
이 때문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정점이었던 크리티아스의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에 30인 참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쉽사리 사형을 내리진 못했습니다.
이 시절. 60대였던 소크라테스와 참주 무리들 간에
논쟁이 된 대립의 한 예를 들어보면
참주 무리는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누구에게도 지시를 내리거나
이야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시장에서 음식을 살 때
이야기하는 것은 허락되는지 빈정거리기도 했었습니다.
이 시절의 소크라테스 또한
다른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처럼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아테네의 과두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30인 참주가 과도기 정부를 수립하고, 반대자들을 제거하며
법을 개혁하는 일을 진행하는 동안
이들의 서열에도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민주정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치 체제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바란 30인 참주들은
이들의 손발이 되어줄 ‘참여 정부’의
사람 수를 정하는데 있어서 파벌이 갈리게 됩니다.
가장 힘이 강했던 크리티아스가 이끌던 파벌은
단 3,000명만 “포함되는 시민”에 선택하고자 했고
테레메네스는 5,000명까지 확대하자고 추진했습니다.
과두제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기원전 403년의 2월.
크리티아스의 주도 아래 단 3,000명 만이
아테네의 시 경계 안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배제된 사람들은 아티카 부근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30인 참주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의 눈 밖에 난 수많은 아테네인들은
아테네를 떠나 보이오티아, 코르니스, 메가라 같은
인근에 있는 다른 폴리스로 도망가게 됩니다.
얼마 뒤, 아테네에서 추방된 트라쉬불로스 (Thrasybulus)가
약 70명의 무리를 이끌고, 아테네 북쪽의
언덕 지역인 필레 (Phyle)를 점령합니다.
트라쉬불로스의 무장 위협은 30인 참주 내부에서
파벌끼리 균열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끼쳤고
이때 크리티아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테레메네스를 사형시키기에 이릅니다.
이제 30인 참주는 범죄가 아닌, 파벌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사형시키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과두제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1,5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로운 정치체제에 사람들은 점점 불만이 쌓여갔고
그해 5월 무렵, 필레의 트라쉬불로스 아래로
용병들을 포함한 1천명의 군인이 모였습니다.
트라쉬불로스를 중심으로 저항세력이 커지게 되니
30인 참주는 트라쉬불로스에게
바로 얼마 전에 사형을 시킨 테레메네스 권력 자리를 제안했고
트라쉬불로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에, 30인 참주는 스파르타에게 소규모 병력을 요청했지만
트라쉬불로스의 기세가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금세 반란군은 아테네 주위를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스파르타는 처음에는 30인 참주를 도와주는 듯했으나
이들은 아테네 내분을 보며 염증을 느꼈고
더욱이, 당시 스파르타 동맹에도 균열이 생기면서
더 이상 30인 참주를 도와줄 이들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동안, 아테네 30인 참주의 통치는 폭력과 부패로 얼룩졌고
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이 될수록,
더 많은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점점 높아지는 저항은 트라쉬불로스 반란군에 의해
30인 참주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아테네는 민주정을 잃은 지 딱 1년 만에
다시 민주정을 복구했고
회복된 민주주의 체제는 30인 참주
그리고 과두제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테네는 약 10여년이 지나
기원전 395년에 시작된 코린트 전쟁 기간 동안
페르시아의 지원 속에
함대, 제국, 그리고 장벽을 되찾아
다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여
민주정에서 30인 참주정으로 바뀐
1년간의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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