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생명체의 형태는 물론이고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까지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전공학과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은
이런 시도가 합당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과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세계관을 수정하든지
과학과 대립하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만은 예외다.
불교는 계시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이며,
외부에서 주어진 도그마가 아니라
부처님에 의해 발견된 진리로
현대 과학과 방법론을 같이 한다.
또 뇌과학에서는
자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아설에 근접하고 있다.
행동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착각은
뇌의 전두엽에서 형성되고
몸으로써의 내가 있다는 착각은
두정엽의 쐐기전소엽에서 유래한다.
이렇게 자아는
뇌에 형성된 신경회로에서 만들어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진화생물학에서 붓다의 진리를 발견하는 책
<눈으로 듣고 귀로 읽는 붓다의 과학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부처님과 찰스 다윈의 공통점
찰스 다윈의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환경에 적합한 놈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주장한다.
부처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겪어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통찰한 분이었다.
불교에서는 현대 생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과 짐승 모두 가련한 중생일 뿐이다.
인간의 몸은 적자생존을 통해서
장기간에 걸쳐 개량된 유전자에서 발현된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하에서 생겨난다.
신 것에 대해서 특히 침을 많이 흘리는 반응은
인간의 몸에 원래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몸, 그리고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DNA에 각인된 무조건 반사의 한 예이며
거시적으로 진행된 연기의 결과물이다.
만약 사막 한가운데 붉은 선인장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화려하고 신비롭기에 ‘인공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아마도 조물주가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인공적인 느낌은
배경과 주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착각일 뿐이다.
밋밋한 모래사막이 배경이 되었기에
주제인 선인장이 인공적으로 보일 뿐이다.
인공적이라거나 화려하다거나 신비롭다는 느낌 역시
실제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생각이 만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보는 시점과 거리에 따라
화려해지기도 하고 밋밋해지기도 한다.
이 물질 세상은 조물주가 만든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모습들이
원래 이랬던 것이 아니다.
자연과 먹이와 포식자와의 관계 속에서
굶거나 다치거나 먹히는 위기를 만나
많은 개체들이 솎아질 때
적절한 변형이 일어나서 살아남은 모습이다.
모든 것은 변하며 조건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몸도 환경과 욕망과 투쟁의 조건이 모여 빚어지고
그런 조건의 변화와 함께 진화한다.
진화론은 생명의 몸에서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거시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통찰이다.
--자연선택이 빚어내는 우리의 몸과 마음
다윈 진화론의 장점은
실증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화 현상을 해석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맨체스터 지방에 살던 흰 후추나방이 검은 후추나방으로 진화한 것인데
산업혁명 이전에는 흰 나방이 많았으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의 검은 연기로 인해서
맨체스터 지방의 나무와 벽들이 검게 그을게 되자
눈에 잘 띄는 흰 나방은
대부분 포식자인 새들에게 잡아먹히고
검은 나방만 살아남아서 맨체스터 지방에 널리 퍼진다.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며
겉보기에는 흰 나방들이 새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몸을 검은색으로 변화시킨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선택을 통해서 솎아진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자연선택 이론과 함께
다윈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성선택이다.
내가 지금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유는
나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조상들이 살아남아서
임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임신했다는 것은
2세를 낳을 능력을 갖출 때까지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춘기 이후에 인간종 내에서 벌어지는 성선택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은 식욕의 원천이고
성기는 성욕의 뿌리다.
나의 몸이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는
식욕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자연선택과
성역에서 성기로 이어지는 성선택의 길에서
나의 조상들이 모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조상들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강력한 식욕과 음욕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원리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 번뇌에 닿아 있다.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입과 성기가 달린 육체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짐승과 반대로 사는 길이다.
--인간의 몸에서 털이 사라진 이유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몸에서
털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진화생물학자들의 의견은
털이 사라져야
진드기나 벼룩과 같은 기생충이 서식하지 못하기에
매끈한 피부가 자연선택되었다는 이론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기생충의 위험이 크건 적건 간에
털 없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선호도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통계 조사를 근거로 이를 반박하기도 한다.
또한 옷을 입으면서 털의 필요성이 없어져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등
다양한 이론들이 속속 제기되었으나
모두 반례가 제시될 수 있기에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침팬치나 고릴라의 경우
몸 전체는 검은 털로 덮여 있지만
손바닥이나 발바닥, 얼굴이나 항문 주변에는 털이 없다.
이곳은 민감한 부분들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대뇌피질의 면적이 넓어야 한다.
피부에서 털이 사라지면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그를 관장하는 대뇌피질의 넓이도 늘어날 것이다.
영장류 가운데 인간에게만 특히 발달한 대뇌피질을
‘쐐기전소엽’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인간의 몸통과 사지에서 털이 사라지면서
새롭게 발달한 대뇌피질일 것이다.
MRI 장치로 뇌를 촬영해 보면
자아의식이 일어날 때 이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육단심의 원천이다.
육단심이란
고깃덩어리인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몸통과 사지의 피부에서 발생하는 촉감으로
내 몸의 윤곽을 그려서 육단심을 만들어내고
이를 토대로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육단심이 남보다 확고하게 형성될수록
다시 말하면 몸과 사지를 담당하던 대뇌피질이 넓어질수록
사회적 관계 맺기에 능숙하고
남보다 많은 자손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뇌피질 가운데 그런 부위가 넓어지기 위해서는
온몸의 피부가 민감해져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의 몸을 덮던 털이
점차 사라진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진화생물학으로 분석한 인과응보
악하게 살면 불행이 온다는 인과응보의 이치도 없고, 내생도 없다면
목숨을 마칠 때까지 악을 마음껏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생존의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악행을 했어도
이를 목격하고 처벌하는 자가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남들은 나의 악행을 보지 못했어도
내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았고
아무도 나의 악행을 처벌하지 않아도
나의 양심이 나를 처벌한다.
나는 표정과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며 진화해 온
가장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기에
나의 뇌를 형성하는 유전자에는
나를 위하는 본능뿐만 아니라
종족의 유전자를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 역시 각인되어 있다.
정신 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이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드는 본능
초자아는 양심에 해당하며
자아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현실에 맞추어
본능을 실현케 하는 영민한 조정자다.
각성의 상태에서 초자아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동물적 본능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는다.
내가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
나의 초자아는 나 스스로를 처벌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런 초자아가
나로 하여금 죄책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실수를 하게 만들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하거나
나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자아의 의도와 달리
초자아로 인하여 불행이 초래되는 것이다.
나를 파멸로 모는 어떤 사고나 불행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진화 과정에서 나의 유전자에 각인되고
교육에 의해 습득된 나의 양심이 나를 처벌한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자업자득의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나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나에게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은 선이나 악의 업을 내가 목격했고
그에 따른 뿌듯함이나 죄책감이
내 마음속에서 익어가다가
미래의 언젠가
자기 처벌 또는 자기 보상이 일어나면서
행복과 불행의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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