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마음은 어디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대 자신을 알라

Buddhastudy 2024. 4. 30. 20:04

 

 

우리는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다.

그 생각들이 쓸모없는 까닭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본질적으로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로 가져온다.

현재에 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급격한 변형은 일어날 수 없다.

모든 경험은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

과거와 미래로 이동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잘라버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느낌과 생명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여기에서의 오류는 만일

마음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마음이라는 독립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우리 자신인가?

 

20세기 가장 유명한 인도의 영적 스승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모든 것을 여는 열쇠는

영적인 심장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심장은 신체적 기관인, 심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자리이며 마음의 근원이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에너지의 원천이다.

 

오늘은 깨달음으로 가는 안내서

<그대 자신을 알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영적인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많은 대답들이 주어질 수 있지만

공통적인 요소들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찾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편안한 휴식과 행복이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을 찾겠는가?

 

행복과 고요한 마음은

우리의 본래 성품이며 자연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경험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적인 영역에서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성품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경전들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구도자를 해방시키지 못하며,

영적 수행이 없이는 참지식에 이를 수 없다.

 

참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계속 찾고 있다.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이며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진정한 탄생이다.

참나 안에 머무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신에 바깥 대상들에 머문다.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평화롭기를 원하는가.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알맞은 약을 먹고 병을 고치기까지는

편안히 쉬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질병이 아니라 건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평화는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서 외부의 근원에서 평화를 찾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을 외부 대상에서 거두어들여, 내면으로 돌리는 순간

당신은 진정한 평화를 맛보고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참된 의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의식 또는 에너지가 마음과 몸 안에 있는 것은

단지 몸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이 다시 심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을 가진 존재들의 모든 생각은

오직 영적인 심장에서 나온다.

그 심장에 관한 묘사는 마음의 개념들에 불과하다.

 

영적인 심장은 충만한 의식 또는 에너지이며

동시에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우주는 마음 안에 있을 뿐이며 마음은 바로 영적인 심장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역사는

영적인 심장 안에서 정점에 이른다.

 

태양이 달에게 빛을 주듯이

영적인 심장은 마음을 비춘다.

 

의식의 진정한 근원이

자신의 참나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상들이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자각하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기절이나 수면, 슬픔 또는 두려움으로 인해

생각이 강제로 멈출 때

마음은 자기의 근원인 영적인 심장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몰입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므로

그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영혼은

깊은 잠을 잘 때는 영적인 심장 속에 머물고,

깨어 있을 때는 뇌 속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피를 내보내는 육체의 심장이 아니다.

경전들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장은

라는 개념이 일어난 곳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즉 가슴의 중앙, 오른쪽 어디에선가 생겨난다.

 

그러나 사실은 가 특정한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 심장은 라고 여겨지는

우리의 온몸과 온 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인 구도자의 수행을 위해

우리는 우주 또는 몸의 특정한 한 곳을 가리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심장이, 참나의 자리로 지적된다.

 

보통 사람들은

영적인 심장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참된 의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내면을 향해야 한다.

 

영적인 심장은

자각의 자리, 혹은 의식 그 자체이다.

 

 

--사람은 왜 고통을 겪을까?

 

우리는 자신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존재감이 생각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어 있을 때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활기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우리가 마음의 본성을 모르고 있는 까닭은

마음의 관심이

마음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탐구가 필요하다.

 

명상이나 모든 영적 수행들은

참나를 깨닫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참나는 늘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무지가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자각이며, 자각은 무지의 부재이다.

마음 조절을 하기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하다.

자각이 없다면 누가 노력할 수 있겠는가?

 

잠을 잘 때나 약물에 취해 있을 때는 노력을 할 수 없다.

게다가 자유는 완전한 자각에서 얻어져야만 한다.

실제 자체는 순수한 자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고통을 겪을까?

왜냐하면 그는 실제 자신이 아닌 것들을

자신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고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을 그치는 것이다.

생각은 형상, 색깔, 시간, 공간, 모든 개념과 교훈들로 된 우주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늘 자기 앞에 있는 세상을 보고서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세상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을 뿐이다.

세상은 분리된 실체로 보일 때의 세상으로서는 실재하지 않지만

참나의 현현으로서는 실재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참나,

즉 실재를 깨닫지 못한 채 현상만을 본다면

오직 망상만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세상은

당신 마음의 결과물이다.

 

먼저 마음을 알고, 그 뒤에 세상을 보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이 참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신은 내면에 있는 신성으로서, 자신에 의해 경험될 수 있다.

신에 대한 최고의 경배는

신이 우주를 구성하는 8겹의 형태 안에

현현하는 빛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8겹이 형태란

다섯가지 원소, 태양, , 그리고 모든 생명을 말한다.

또한 신을 분리되어 있지 않은 존재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면 경배를 하는 자와 경배를 받는 자를 나누는 구분이 지워질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것을 신으로 봄으로써

습관을 깨뜨림으로써

무엇이든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를 그치고

유일하게 실재하는 주체인

신으로 여김으로써 얻어진다.

 

우리는 신을 경배하면서

동시에 이원성을 보는 자신을 탐구하여 본질을 발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형상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형상 없는 근원을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탐구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토대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가 만나는 하나의 지점은 깨달음이다.

이것은 신비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장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깨달음이다.

 

신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비존재도 필연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단지 인식하는 기관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귀머거리에게는 아무 소리도 없으며,

장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그저

신의 어떤 측면을 인지하거나 파악하는 하나의 기관에 불과하다.

 

그대가 이 세상과 이 몸을 경험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듯이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이 진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자신의 감각적인 경험은 실재라고 말하면서도

그것만은 비실재라고 말하는가?

신이라고 해서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은 눈, , 귀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신에게도 그것들이 있는데

신이라고 왜 그런 것들이 없겠는가?

 

신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왜 웃지 않는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겪어야 하는 경험들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몸은 개인의 카르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몸은 몸을 생기게 한 카르마가 남아있는 동안에만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몸이 겪고 있는 카르마의 경험들에

집착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운명은 자유 의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자유 의지가 그 근원이다.

그것은 그 결과를 초래하고 운명을 만든다.

 

바람직하지 않은 운명이 작용하고 있을 때는

마음도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운명과 같은 길을 걸으며, 선한 생각들은 바람직한 운명을 낳는다.

 

충족되어야 할 욕망들이 남아있는 한, 환생 역시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지적으로 확실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환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들과

수많은 집착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미래에도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은 강하게 뿌리박은 그런 집착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삶들의 기억들이 남아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들이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다.

 

죽을 때 마음은 생명력을 끌어모아, 자신을 새로운 몸과 연결시킨다.

참나 지식을 얻기 전에는, 몸에 대한 동일시가 끊어지지 않는다.

 

관계들은 카르마에 따른 유대들이므로

키워지고 발전된 관계들은

많은 생애를 거쳐 계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기억들은 지워진다.

왜냐하면 그런 기억들과 집착들, 걱정들의 짐이

현재의 짐에 더해진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둘 필요도 없고, 가정에서 도망칠 필요도 없다.

포기는, 가족 관계나 가정 등 외부적인 것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들과 애착,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의무는 수행하는 것이며

꾸준히 자기 탐구를 실천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정확한 태도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모두 지적인 개념들이다.

개념은 깨달음이 아니다.

 

당신은 지성을 버리고 떠나야 하며

참나의 직관적 통찰 안에서 확고해야 한다.

 

일단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이러한 개념들 중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확고함을 확실히 하기 위한 도움으로서도 필요하지 않다.

 

깨달음은 충만한 의식이며 이와 같은 생각들에 의해 뒤얽히지 않는다.

또한 해방과 참나 지식에서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 해방된 사람의 육체는 화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몸은 신의 성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