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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붓다] 십우도, 제일도 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2 무명과 원죄 _ 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괴로움_ 한계상황

Buddhastudy 2024. 5. 27. 19:33

 

 

자기의 무명을 바라본다는 것

자기의 무명을 깨닫는다는 것

이렇게 오염돼 있는 나를 깨닫는 내가 또 다른 한쪽에 있다는 것에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딴 게 아니고

이 자리에 도달하신 겁니다.

깨닫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속에

맑고, 멋지고, 고요한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

 

계속해서 십우도의 제1도인 심우

소를 찾아 나서다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십우도에 1도인 심우에서는

소가 잃어버린 참 자아이고

목동은 그 참자아를 찾아가는 나의 의식을 말합니다.

 

의식이 스스로의 의식을 자각함으로써

내면의 소를 찾으려고 떠나는 과정이죠.

1도의 게송에 보면

우거진 숲과 골짜기를 찾아 헤매다라는 이런 말이 있는데

여기서 우거진 숲과 골짜기는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득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면서

기뻐하고, 고통받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가 있죠.

뭔가 덧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덧없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속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으면서 살고 있는가?

이 최초의 자각, 최초의 물음이

소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 구도의 여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럼 먼저 우리가 욕망의 갈애에 감춰져 있는 이 본성을 보려면

본성은 이 욕망의 그 숲에서 가려져 있잖아요.

그 숲과 골짜기를 벗어나야 그 본성이 보입니다.

욕망의 숲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는 이 욕망에 허덕이게 됩니다.

 

여러분, 욕망의 기본 성질은

[절대 만족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욕망의 완성을 위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찾는 행복은

마음 안에서 찾는 욕망의 달성은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 좋다는 천국이나 아미타 극락세계 간다 하더라도

그 좋은 게 계속 좋다 보면

그 좋은 것도 좋은 게 아니게 되는 거죠.

망각하게 되고 지겨워집니다.

천국에 사는 것도 지겨워진다는 거예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면 그렇다는 거죠.

 

또 다른 즐거움은 없을까?” 찾아간다는 거

이것이 바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욕망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메꾸기 위한 어떤 행위들을 하게 됩니다.

이 현상계를 두고 보더라도

완벽한 선의 경계안에서

그 욕망을 달성하기가 때로는 매우 어렵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비록 살생이나 도둑질 뭐 이런 거는 하지 않더라도

누구한테 사기는 치지 않더라도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불선(착하지 못한)이 있다는 거죠.

괴로움이라는 게 주어진 생로병사의 괴로움도 있지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또한 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으론 분명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이 말을 안 듣고

몸이 안 듣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나라고 하는 에고는 자기의 집착이 워낙 강합니다.

그것이 말라식의 특성이죠.

어떤 일이 생기면

이것이 나에게 이로운 일인가? 해로운 일인가?

번개같이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말라식은, 우리 에고는

계산이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죠.

절이나 성당에서 신부님이나 스님의 좋은 말씀을 들었지만

현실생활에 오면

들었던 그 도리가 108천리로 날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보다 욕망이

불신보다 중생심이 먼저 앞서 달려나가거든요.

 

소크라테스는 그의 저서 <변명>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죽음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악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훨씬 어려운 일이다.

왜냐?

악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은

선보다 더 유혹적이고, 더 강렬하고 더 치명적입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얘기한 것도

인간의 성품이 선보다는 악에 더 기울여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만큼 인간 안에 내재 된 이 본능적인 이 악은

굉장한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장자도 <인간세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훌륭한 일을 성취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일은 고칠 사이도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옛날 고사에 보면

황진이의 유혹에 스님의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잖아요.

 

이런 욕망을 제어한다는 게, 그것을 승화시킨다는 게

정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죠.

 

색뿐입니까?

먹는 식의 문제도 굉장히 강렬합니다.

환경을 생각하고,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며칠 동안 굶은 우리 눈앞에

소고기가 구워지고, 정말 맛있는 양념치킨이 냄새를 솔솔 풍기면

그 초발심은 사라지고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먹어 치웁니다.

 

옛날 <얼라이브>라는 실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비행기가 눈 덮인 산꼭대기에 떨어집니다.

주변은 다 눈 덮인 첩첩산중이에요.

구조대는 오지 않고 내려갈 방법도 없습니다.

날은 춥고 그나마 비행기에 남아 있던 식량, 먹을 것은 점점 떨어져 갑니다.

그러자 생존자들은 어쩔 수 없이

죽은 사람의 살점을 먹습니다.

 

...

 

물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선택한

정말 불가피한 최후의 선택이었죠.

인간성이란 이렇게 유리잔처럼 부서지기 쉽다는 거예요.

 

조선시대에도 뭐 이런 비슷한 기록들이 있죠.

기근과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잖아요.

일부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이라든가 인육을 먹었어요.

 

인간의 먹는 문제, 성의 문제가...

욕망이 정말 강렬한 거죠.

여러분 한 며칠 굶어봐요, 눈에 뵈는 게 있을까요?

초근목피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먹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의지가

그만큼 무섭고 치열하다는 거죠.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선행을 하고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염원과 달리 우리의 일상은

그것을 매우 쉽게 무너뜨리죠.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의 이러한 상황을 [한계상황]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고,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불가피하게 죄에 빠져드는 상황에 인간은 노출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들 중생이 아무리 발부둥 치고 노력해도

인간은 이러한 환경에서 혹은 수많은 유혹에서

나오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거죠.

 

이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말하는 고통은

인간은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 고통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려고 죄에 빠져드는 상황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거예요.

부처님도 이 점을 주시하셨습니다.

 

인간의 이런 욕망과 고통으로 끊임없이 윤회를 돈다고 봤기 때문이거든요.

죽음과 싸우면서 그 안에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

한계상황에 내몰린 존재

그것이 우리 중생들이고, 우리 인간들입니다.

 

붓다는 이런 한계상황을 넘어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관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분석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고요하게 관하여 보면

간단하게 마음과 육체로 나눌 수 있겠죠.

 

이 중에 마음은

수동적인 감각의 마음과

능동적인 사고의 마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감각, 후자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먼저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감각을 한번 보죠.

감각은 늘 어떤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시각은 빛깔과 색을

우리 청각은 소리를, 우리 후각은 냄새를,

미각은 이 맛을, 촉각은 감촉을,

생각은 어떤 법을

각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거죠.

이거를 [반연]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에 딱 넝쿨처럼 딱 붙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대상들은 늘 변화합니다.

우리가 늘 한 소리만 듣고 한 빛깔만 보는 게 아니잖아요.

한 느낌만, 한 감촉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따라서 이 변화하는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감각자신도

파도치는 바다의 물결처럼 늘 술렁술렁 요동칩니다.

 

이 속에서 붓다는 일체가 무상한 [연기의 법]을 관하셨습니다.

그 무엇 하나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거죠.

 

그럼 그런 감각에 의해서 펼쳐지는 의식은 어떨까요?

우리의 능동적인 사고는 어떤가요?

의식 또한 고정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5가지 감각 기관의 구멍을 통해서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 정보를 파악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느라

이 의식은 굉장히 바쁩니다.

 

부처님은 이 속에서 [무아]를 관하셨습니다.

감각적인 대상과 사물에서는 무상을 관하셨고

마음에서는 그 또한 실체가 없는 무아를 관하셨습니다.

의식이라고 불리는 이 나 역시

고정된 어떤 실체의 것이 아니라

[연기적 자아]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거예요.

 

우리 인간은 자존감, 혹은 자존심이라 불리는

이 자아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내가 있다는 이 자아의식

이 자아의식에 의해서 자기와 세계가 나오고,

여기서 너와 나의 이원적인 대립의 세계가 완성됩니다.

 

나와 타인, 나와 대상이 대립하는 세계 속에서

나는 고뇌하고, 헤매고, 고통받고, 투쟁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즐거움과 행복도 느낍니다.

그러나 행복이든 불행이든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모두 상대적이죠.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라는 자아의식이

수행을 통해서 완전히 정화되었다면

나에게는 세계도, 자기도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서

무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아가 된다는 것은

공에 머물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충만한 지복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고 없음에 걸리지 않고, 행복과 불행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고, 마음을 오히려 잘 부리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는 여행길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거죠.

생각과 감정이라는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는 상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과 감정이라는 마음의 지배에서

선보다는 악에 지배당하기 쉽습니다.

악이라는 표현은 좀 거칠고 불선함이라는 표현이 좀 옳겠네요.

착하지 못한 상태에 쉽게 젖어 듭니다.

 

여러분 인간이 불가피하게 빠져드는

불선한 행위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고통받는 중생이 되었을까요?

 

붓다는 이렇게 얘기를 하죠.

비구들이여, 착하지 못한 온갖 법이 있으니

그것들은 모두 무명으로 근본을 삼고 있다.

따라서 무명을 근절하면

착하지 못한 온갖 법도 근절하게 된다.”

 

여기서 무명이란 뭡니까?

알지 못하는 상태, 모르는 상태,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 무명이야말로 모든 악을 낳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이 무명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도는 거죠.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

크게는 내가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

자기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다음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상태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깨뜨려 보지 못하는 상태가

곧 무지, 무명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문 열고 나갈 때

바로 차에 치인다고 했을 때, 문을 열고 나갈까요?

악행을 하면 그 인과가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투철하게 알면

나쁜 짓을 할까요?

생명을 살상하고 함부로 죽이고 그것을 먹는다면

나 역시 내 몸으로, 내 육체로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할까요?

 

당연히 안 하겠죠.

그러나 우리는 무지, 무명에 휩싸였기 때문에

설마 나에게 이런 인과가 오겠어?” 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무지와 무명으로 인해 무엇이 옵니까?

고통이라는 과보가 오고 윤회가 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고통의 근본 원인을

무지와 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이

상대라 불리는 타인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지하고 무명합니다.

다만 뭐예요?

안다고 착각할 뿐이죠.

 

예컨대 상대가 정말 밉고 싫어서 뺨을 한데 때렸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는 거죠.

그러나 나는 밉다고 믿어지는 상대의 참모습을 알고 있나요?

상대는 내 마음에서 그려진 하나의 표상일 뿐입니다.

생각의 이미지입니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나의 믿음입니다.

나의 견해일 뿐이라는 거죠.

 

상대의 참모습은 여러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근원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거죠.

부모님이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부인, 자식이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내 마음속에 채색된 표상화된 상대를

마치 상대 그 자체인 것처럼 우리가 간주하는 거죠.

그리고 그 속에서 상대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혹은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무지, 무명 때문에

우리는 죄의 불선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본문으로 돌아와서

-목동이 기르고 있던 소는 왜 도망친 것인가?

-왜 나는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는가?

-나는 왜 오류를 범하고, 불선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인가?

-왜 탐욕과 분노로, 때로는 시기와 질투로 움직이고 있는가?

크게는

-왜 이 세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서로 죽고 죽이는가?

-소는 왜 도망쳐 버렸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서양에서는 [원죄설]을 얘기합니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가

그의 자손인 현생인류에게 모두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원죄설이죠.

이 원죄설을 하나의 교리로 명확히 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담에 의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렇게 해서 죽음이 전 인류로 퍼져나갔다고 얘기를 합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원죄설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죠.

-인간이 짓는 죄의 근원은 원죄이며, 그 본질은 신에 대한 반역이다.

-두 번째, 그 결과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얻게 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세 번째, 신의 벌로서 인간은 죽어야 하는 몸이 되었다.

 

이 원죄설과 대비해서 불교의 관점은

이미 앞서 소승이 언급했듯이

붓다는 모든 죄와 고통을 낳는 근본 원인이

십이연기를 통해서 부처님은 무명을 깨달으셨습니다.

 

대승기신론에도 이런 글귀가 있죠.

모든 중생은 무시이래로 무명에 훈습되는 요인 때문에

마음이 생하고 멸하게 된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죄악의 근본 원인을

아담의 원죄에서 찾고 있지만

부처님은 무명에서 찾고 있는 거죠.

무명이 우리의 원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죄의 근본이죠.

 

그런데 이 무명은 무시 이래로 존재하는 거예요.

이 무명은 모든 개인이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이 무명의 본질은 궁극적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원죄설과 무명

이 둘의 차이점은 뭘까요?

기독교나 이슬람은

인격적인 어떤 존재로서의 유일신을 세웠다는 점이고

그 신에 대한 반역에서

인간은 원죄를 갖게 되었고 어리석어졌다는 거죠.

 

불교적인 시각은 그와 다릅니다.

애초에 어떤 고정불변한 신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불교적인 무명은

연기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사성제의 도리에 어두운 것이고

대승적으로 말한다면 진여의 이치(자성)를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와 사제 이치를 모르는 것은 뭐예요?

인과의 어둡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원인이 있고

역으로 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생긴다는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무지, 문명이라는 거죠.

 

즉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이 무지 무명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 빠진다고 봤습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통해서 무명을 발견했고

스스로의 엄격한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

이 무명을 없애고 무상정각을 이루셨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거죠.

 

그리고 석가가 중시했던 것은 [관법]입니다.

관법은 법을 관한다, 진리를 관한다.

다시 말해 존재를 관찰하는 것이라 알 수 있습니다.

 

이 관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고통을 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자기와 자기 주변의 세계에 모든 존재를 관함으로써

진리를 통찰하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죄에 빠지는 원인, 소를 잃어버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요?

기독교는 원죄에 있고

불교적인 시각에서는 무명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명은 무시이래로 존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무명에 의해

나는 탐욕과 분노라는 번뇌에 얽힌

매우 오염된 존재임을 우리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무명으로 오염된

자기에게만 눈길을 주면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그저 욕망에 휘둘리는 오염된 존재이고

욕심이 많고, 쉽게 화내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혐오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무명을 바라본다는 것

자기의 무명을 깨닫는다는 것

이렇게 오염돼 있는 나를 깨닫는 내가

또 다른 한쪽에 있다는 것에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딴 게 아니고

이 자리에 도달하신 겁니다.

깨닫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속에

맑고, 멋지고, 고요한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고요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목동이 길을 나선 것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