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소와 목동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소는 어느 때는 참나이면서 에고이고, 중생심이고
목동 역시 어느 때는 에고이면서 참나이기도 합니다.
--
오늘부터는 여러분들과 함께 십우도를 배워보겠습니다.
먼저 시도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되는데
본래는 십우도가 아니었고 팔우도였습니다.
10개의 그림이 아니라 8가지 그림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 팔우도는 불가의 것이 아니라, 도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겁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누가 제일 먼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하튼 배추도사가 되든 무도사가 되든
어떤 도사께서 그리신 이 그림이
후에 십우도, 목우도, 심무도라고 여러 그림으로 표현돼서 전해집니다.
보명선사의 목우도 같은 경우는
소가 검은소로 그려져 있죠.
이 검은 소가 점차 흰 소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여기서 소는 뭘까요?
우리들의 망상 번뇌의 신념, 중생심, 에고를 말하는 거죠.
우리의 마음을 흔히 ‘심원의마’라고 부르잖아요.
원숭이와 말처럼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날뛰고 움직입니다.
보명선사의 목우도는
이 마음을 깨치고, 잡고, 길들이고
변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그런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날뛰던 번뇌망상의 마음이
점차 목동의 훈련을 통해서 참나 안으로 길들여지고
무화(무와 공으로) 되면서 드디어 본성이 드러나게 되죠.
이 검은소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업습을 말합니다.
업습은 무시이래로 내가 가지고 온 습관들이죠.
수행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이 업습을 여러 수행의 방편으로 고쳐가는 과정입니다.
업습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염불수행으로
어떤 사람은 절수행으로,
어떤 사람은 호흡관법으로 혹은 위빠사나수행으로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자비심에 기초한 육바라밀 행으로 수행해 나갑니다.
이것이 오래되고 익어가면
이 소가 점차 흰 소로 변해갑니다.
마음이 점차 본성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나의 불성(본래면목)이 완벽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12세기 북송시대에는 중국의 곽암선사가
이 그림에 9도 10도를 다시 그려 넣어서 십우도를 완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10이라는 숫자에 주목해야 되는데
왜 10일까요?
11도 되고, 14도, 15도 되고, 또 20도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10에서 끝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0은 예로부터 ‘완전수(완벽한 수)’라고 불립니다.
더 이상의 수가 없다는 완벽한 수가 바로 10입니다.
물론 11, 12, 15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다시 앞에 1, 2 번호들이 붙은 거죠.
그래서 십선업 혹은 화엄경의 십지보살, 혹은 십우도
이렇게 10에서 끝난 것은 10 이상의 수가 없다,
더 이상의 경지가 없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곽암선사가 보기에
도가의 그림은 여덟 번째 단계에서 끝났거든요.
인우구망인 ‘공과 무아’에서 끝났는데, 완벽하지 않다고 본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공과 무아에서만 끝나면
자칫 허무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대승적 경지에서 보면
이 ‘공과 무아’에서 끝나는 것은 완벽하지 않는 거죠.
공과 무아에 이르렀다는 것은
나의 업습을 완전히 제거하고, 본성이 완벽하게 드러난 상태
심윈의마를 완전히 조복하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모든 것이 이치에 맞고, 도에 맞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상태
굉장히 훌륭한 경지죠.
더 나아가야 할 내면수행은 없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라면 뭔가 부족합니다.
뭔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왜냐?
진정한 완성은 개인의 완성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완성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이익중생지 성불’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사바세계에서 고통과 번뇌에 허덕이는 중생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보살이라면, 진정한 붓다라면은
다시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발원을 세우고 세상 속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곽암선사는 그래서 9번째인 반본환원과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입전수수’를 그렸습니다.
입전수수는 ‘세속의 저잣거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중생 제도를 위한 대승적 실천이고
자기 수행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볼 수 있죠.
여러분 [대승적 실천]은 뭡니까?
곧 ‘육바라밀 행위’입니다.
이익중생지 성불에 자비심이 원만하게 완성됩니다.
어디서요?
세속의 저잣거리에서, 중생 속에서 완성됩니다.
여하튼 도가와 불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십우도는
-체계적인 선 수행을 위한 안내서
-혹은 내면의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행
-내면의 참자아를 완성해 가는 안내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면은 이 십우도가 그려진 사찰들이 많이 있잖아요.
여러분도 가끔 보셨을 거예요.
소와 동자가 그려진 그림도 있고, 검은소로 묘사된 그림도 있고
10가지 그림으로 수행해 가는, 소를 길들여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으로 가는, 깨달음을 완성하는
10단계의 수습이라고 할 수가 있죠.
곽암선사가 그린 십우도의 소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첫 번째 ‘소를 찾아 나선다’는 ‘심우’는
우리가 본성을 등진 까닭에 그 본성이 도망쳐 버린
참된 자기를 비유한 것이고
소를 찾는 목동은
그 참된 자기를 찾는 자기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망친 소도 자기이고, 목동도 자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소와 목동은
둘이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 하나이고
또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그리고 이제 점차적으로 이 소는
다른 쪽에서는 ‘에고’ 혹은 ‘중생심’이라고 또 다르게 표현이 됩니다.
망상과 번뇌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 망상과 번뇌의 소를
즉 우리들의 신념을 잡아 길들여 가는 목동은
또 참나, 불성이라고 또 해석할 수가 있겠죠.
소는 어느 때는 참나이면서 에고이고 중생심이고
목동 역시 어느 때는 에고이면서 참나이기도 합니다.
동시적입니다.
여러분 에고의 가장 안쪽이 불성입니다.
불성의 가장 바깥쪽이 에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현상계하고 절대계가 딱 나눠서 설명할 수가 없어요.
하나로 뭉뚱그려서 봐야 됩니다.
몸의 가장 안쪽이 영성이고, 영성의 가장 바깥쪽이 육체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둘을 분리해서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이 현상계나 에고나 다 무상한 것이라 말하지만
우리가 깊게 보면 모두 법신의 현현(나타남)이에요.
비로자나불의 화신인 겁니다.
서양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신의 현현, 하나님의 현현, 알라신의 현현이 누구예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나는 신의 현현이에요.
내가 신의 자식이 아니라 내가 신입니다.
먼저 심우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소를 찾아 나서다’입니다.
게송에 보면
어느 날 목동이 기르고 있던 소 한 마리가 외양간에서 도망칩니다.
목동은 도망친 소를 찾기 위해
들판과 우거진 숲과 골짜기를 찾아다닙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를 찾아 나서다’의 심우도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죠.
소는 왜 도망쳤는가?
사실 소가 도망친 것은 아니고
우리가 본성을 등진 까닭에, 소를 잃어버린 것이죠.
이 말은 바꿔 말해서
나의 참된 고향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왜 이 세계에 떨어졌는가?
가장 깊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불안한 기분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누구나 여러분들도 저도 가끔은 하지만
답을 ‘이거다’ 하고 명확하게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마술도 트릭이 있지만, 그건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붓다나 예수 많은 성현과 수행자들이
이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그러나 경전을 읽어봐도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아리까리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뭐 ‘그럴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믿는 것과 앎은 다릅니다.
진정한 앎이 일어나려면 결론은 뭘까요?
진정한 답은 누가 얘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깨달아야 된다는 거예요.
듣고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고
내가 직접 체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이게 최선의 답입니다.
붓다나 많은 철학자들도 ‘이거다’라고 결론 지어서
속시원하게 말씀을 못하셨어요.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무겁고도 두려운 질문이자,
굉장히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더 근원적인 질문이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 모양은
과거에 웅축된 (전세의 수많은)모습이 오늘 드러난 거거든요.
우리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저 과거 너머에, 미지의 세계에서
불쑥 이 세계에 던져져서 삶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작게는 하루에 한 번씩 일어납니다.
잠에 들면 그 무엇도 없잖아요.
그러다 아침에 눈 뜨면
의식이 펼쳐지면서 세계가 내 눈앞에 나타납니다.
나와 내가 아닌 세계가, 정말 복잡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세계에 망연히 서 있는 나 자신,
나는 누구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예컨대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나에 대해, 이 우주에 대해, 존재에 대해,
모든 존재의 존재 방식에 대해 근원적으로 뭐라고요?
무지합니다.
우리는 무지하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원적인 무지 아래
또 다른 무지들이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무지 속에서 우리는 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참된 자기를 잃어버렸고
참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로 또 역시 더 많이 무지해졌다는 겁니다.
잘못을 범하는 오류에 빠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동이 없는 소는 단속이 되지 않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꼴리는대로 살지 않겠습니까?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참나가 없는 소는
감각적인 세상에 미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진실로 여기며 삽니다.
무사한 것을 진짜로, 무아인 것을 그 어떤 고정된 실체로
사유하게 됩니다.
근대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참 젊은 나이에도 20살이 넘자
자신이 인지하는 인식하는 감각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의문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가 쓴 이 ‘방법서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황금이나 금강석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구리나 유리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또 이런 경구도 있어요. 이런 문장도 있어요.
“예전부터 내 마음속에 들어온 일체의 것이 꿈에 본 환영처럼
참된 것이 아니라고
나는 가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는 자기 존재까지도 의심합니다.
데카르트를 이런 의심을 ‘방법적회의’라고 부릅니다.
불가에도 이런 사유는 벌써 예전부터 있었죠.
십이연기의 ‘역관’이라든가 ‘순관’이 있잖아요.
이런 사유는 철학을 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더 넓게는 존재와 인생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
참나를 발견하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이 세상은 꿈이나 환상이며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끔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현실생활에 묶이죠.
<매트릭스>라는 영화도 그런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의 헐리우드 영화이고 액션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곳곳에 굉장히 많은 상징적 기호들이 그 영화 안에 숨겨져 있죠.
굉장히 명작이라고 저는 봐요.
존재의 실상과 그리고 현상계의 허망함을
네오는 파란 약이냐? 빨간 약이냐?의 선택을 통해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진실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파란 약을 먹음으로 해서
사실은 허구임을, 뇌에 전기적 자극에 의한 한상임을 알게 되고
거기서 네오는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허구성과
그 허구성에 묶여 허우적대는
자기의 오류를 알아챌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오류를 알았다는 건 뭐예요?
자기 오류를 앎과 동시에
네오는 아직도 많은 존재들이
자기처럼 깨어나기 이전에의 나처럼
진실이 아닌 오류 속에서 사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내가 오류에 빠졌을 때는 몰랐는데
내가 오류 밖으로 나와서, 오류 전체를 조감하면서
모든 중생들이 다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여러분, 바둑도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있잖아요.
하수는 바둑알만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고수는 바둑판 밖을 벗어나서
바둑판 전체를 조감할 줄 압니다.
전체 판 모양을 보는 거죠.
그러나 감각적인 욕망에 빠지면
눈앞에 보이는 바둑알만 따라다니다 보면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현상에 묶이고 감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첫 번째 무지는
현상계와 현상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쾌락
그리고 고통의 잘못된 번뇌와 소지장 속에
나는 어떻다고요?
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