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다봤을 때는 항상 문제가 많은 게 아이였어요. 그거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랬거든요.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참 인격이 됐어 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없어요. 요즘 아이들은 다 버릇이 없습니다. 버릇이 없는 것을 뭐로 대했냐하면 회초리로 대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회초리가 통하는 시대가 아니에요.
과거에는 다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다자녀에서는 부모가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어요. 낳아놓으면 저희들이 알아서 다 서열이 정해졌어요? 안 정해졌어요? 저절로 서열이 정해졌어요. 그래서 인욕할 줄도 알고, 타협할 줄도 알고, 화합할 줄도 알고 다 되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하나내지는 둘을 낳다보니까 전부다 왕자 아니면 공주만 다 낳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금지욕엽 키우다보니까 절대 상전 중에 상상전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도 그 아이들은 사춘기라는 게 오게 되어있어요. 사춘기의 욕구라는 생기는데, 그 욕구라는 게 뭐에요? 육체적으로도 오지만 정신적으로도 뭔가 혼란의 혼돈기가 오는 부분이 사춘기입니다. 부끄러운 건지 모르고 체면이 뭔지도 모르고 윤리가 뭔지도 모르고 도덕도 뭔지 몰라요. 난 지금 용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맹스러운 사춘기 아이를 어른의 잣대에 갖다 맞추려다보면 절대 맞아지지가 않죠. 어떻게 해야 되나요?
측은지심을 일으켜서
내려가 줘야 되요.
아이의 수준에 내가 맞추려고
애를 써야 되는 거죠.
그럼 역지사지로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어땠을까? 지금 7080세대들이 주로 교육세대 이셨습니다. 당시에 교복세대에 있던 분들이 호크 잠그고, 모자 반듯하게 쓰고, 가방도 반듯하게 들고, 멋있다는 것은 어른들이 봤을 때는 다 맞는 건데, 지금 7080세대들이 학교 다닐 때 모자를 똑바로 쓴 일이 있나요? 삐딱하게 썼죠? 호크를 잠궜 나요? 풀어버렸죠. 가방을 이렇게 들었나요? 옆구리에 끼었죠. 그리고 있는 대로 본인들이 세상을 주름잡을 것 같은 용맹으로서 세상과 결졌던 것이 과거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시대가 변했어요. 시대의 환경이 변했거든요. 그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호크를 잠궜던 그 시대에도 그것을 거부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데, 요즘은 교복 세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들 나름대로 멋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과거에 교복세대에 맞추려다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제 생각 같아서는요, 이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그렇게 해보는 것도 한 때야.
그리고 네 스스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 돌아오게 기다려봐 줄줄 아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를 속여서 잘못된 화장품을 발라서 화장독이 염려가 되거든 어머니 입장에서 아이의 수준에 맞는 화장품을 사다 줘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번 발라봐. 그리고 그렇게 하고 밖에 나가는 게 그렇거든 엄마 앞에서 한번 해봐. 그리고 엄마 입장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저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화장만 잘해도 밥 먹고 살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아는 것만큼 세상이 보이는 거 아닙니까?
왜 어떤 건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 라고 하는 편견으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인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이 저한테 그래요. “스님이 안 낳아 봤으니까 그렇지. 낳아봐라.” 그럼 제가 그럴 때마다 하는 얘기가 “서울 가본 놈하고 안 가본 놈 하고 이야기하면 안 가본 놈이 이기는 거야.” 나처럼 안 가본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내 자식을 가까이 두고 보다보면 이기적 사고를 통해서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지만, 안 낳아봤기 때문에 원론을 이야기 할 수 있고, 객관성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모쪼록 아이를 내 기분에 맞추려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의 생각을 따라 동조해 주고, 그리고 같이 가다보면 그 아이가 어느 순간이 되면 “엄마, 이것도 철없는 짓이었고, 이것도 문제가 있는 짓이었네.” 라고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절대 사춘기 때 보여지는 그 부분이 인생이 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비난을 하기 보다는 동조해 줄 수 있는 부모님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보다 폭 넓은 사고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보다 폭 넓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고,
인내로서 참아주시고
동사섭으로서 끌어안아줄 수 있는
멋진 부모님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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