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간이 왜 사는지
그 삶의 의미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질문 자체가 아주 어둡고, 말 꺼내기가 좀 두려운 질문입니다.
살고 죽는 이야기는 누구라도 생사가 주제가 되면
그 이유를 몰라서 이렇게 망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태어났을까?’ 하는 질문과는 또 틀립니다.
태어난 데도 분명히 원인이 있겠죠.
이게 원인과 결과의 인연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생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면
거기에 맞는 인간의 몸을 받아서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게 순리죠.
그러니까 때가 되어서 어떤 조건이 만들어지면
생겨나고 또 태어났다가
또 때가 되면 죽고 사라지겠죠.
부잣집에 태어나거나 가난한 집에 태어나거나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뭣 때문에 태어났냐? 물어보면
그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내 의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태어난 기회를 부정하는 질문밖에 안 됩니다.
저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을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바다인데
이번 생에 깨우쳐서 다시 안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씩 합니다.
사는 게 괴로우니까 그런 거죠.
그냥 막 영적인 세계에 그냥 자유롭게 머물고 싶은 거죠.
분명히 뭔가 풀어야 할 숙제나 업이 있어서
그것을 풀기 위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이 숙제를 잘 푸시면
다시 이 사바세계에 오지 않도록 이번 생에 공부를 잘해야겠죠.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런 생각을 저는 한 번씩 합니다.
근데 솔직히 죽지 못해 사는 거죠.
자꾸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니까
이런저런 의미를 한 번씩 둬보는 겁니다.
어쨌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람 생명이 존귀한 줄도 알겠는데
살다 보니까 의미가 궁금해진 겁니다.
애들도 그렇죠.
빠르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도 이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내가 왜 태어났고, 또 왜 사는지
학교를 왜 가야 되는지, 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분명히 오죠.
어른들이야 각자 살기 바빠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살면서도
또 어딘가는 그 삶의 의미를 두고 또 그것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애도 키워야 되고, 집세도 내야 되고.
특히 살다가 내 뜻대로 안 돼서 이렇게 힘들 때 좀 더 그렇죠.
‘나는 왜 살까?’ 이런 말이 그냥 나옵니다.
좀 살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았든, 주식을 했든, 코인이든 로또가 당첨이 됐든
예를 들어 번 돈으로 기분이 좋아서 밤새 술 진탕 마시고
오전 내내 자다가 일어나서 속이 쓰리니까
동네 해장국집 가서 이렇게 속 풀면서
‘내가 왜 이래 살까?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열심히 돈 벌었나?’
그런 또 허무함에 또 왜 사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분명히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갑니다.
‘왜 사냐?’는 질문은 답이 안 나온다고 피해 갈 일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두고 봤을 때는
인간은 크게 한 세 종류로 나뉩니다.
제일 먼저 어떤 사람들은
그 사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거는 답이 안 되죠.
아니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데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그러면 답이 안 되는 거죠.
묻는데 묻는 질문 자체의 의미를 말하면 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어쨌든 열심히 계속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헷갈리게 하는 약간 도피성 대답이죠.
사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약간 왠지 설득력이 있고 위로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 사는데 즐거운 사람들은 이런 말이 통하지만
사는데 괴로운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위로도 안 되죠.
그리고 또 단순히 위로받으려고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답을 찾고 싶은 거죠.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 점점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그중에는 더 파고들면
우울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생기니까
그만 생각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데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 봐도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거든요.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
그 사람에게는 자살도 하나의 선택지였던 겁니다.
사는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괴로운 거죠.
뭔가 의미가 있고 목표가 있다면 열심히 해보겠지만
의미가 없는 것을 계속한다는 건, 솔직히 좀 참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시켜서 소금가마를 등에 지고
이 바닷물에 들어가는 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지만
첨벙첨벙 이렇게 한 발 한 발 이렇게 들어갈수록
이해가 안 가거든요.
아니 일부러 바닷물에서 얻은 소금을
다시 바닷물에 들고 들어가면
이게 다 녹아버릴 텐데
이 무슨 의미가 있냐 이겁니다.
그걸 또 떠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남자분들은 또 공감하시겠지만
군대에서는 이런 작업들이 많죠.
예를 들어 흙을 오전에는 저 산으로 옮겼다가
오후에는 또 이 산으로 다시 가져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삽질을 하면서도 의미를 모르죠.
그러니까 의미가 없으면 사람이 미치는 겁니다.
특히 명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 의미 없는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 정말 참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어딘가에도 의미를 못 두고 이렇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이 약물이나 도박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있거든요.
그 의미를 못 두고 사는 게 괴로운데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불륜도 그렇죠.
사는 게 좀 구질구질한데
그 사람 만날 때만큼은 위로가 되고 잊을 수가 있습니다.
애들도 그렇습니다.
공부로 스트레스받으면
게임이나 담배, 술 같은 데 손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든가
태어났으니까 그냥 살라는 말은
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는 의미는 각자 발견하면 안 될까요?
사람마다 모두 업이 틀리니까 각자 알아서 발견하면 안 될까요?
나는 내 자식 키우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고 삶의 의미이다.
이런 부모님들 많으시죠.
자식을 위해서도 무엇이든 합니다.
사는 의미를 거기에 두신 겁니다.
요즘 또 반려동물에게 또 그런 의미를 두시는 분들도 많죠.
보람도 느끼고, 왜 사는지 의미가 생겨서
힘들어도 참을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의 위로도 받고요.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은
‘나는 국가대표 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
그러면 거기에 의미를 두면
아무리 힘든 훈련도 견디면서 열심히 뛸 수가 있습니다.
또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면
그 여자에게 줄 프러포즈 반지를 사기 위해서
공사판에 노가다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 남학생도 있습니다.
거기에 의미를 두면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업에 따라 사는 의미를 두고 살지만
그것은 계속 유지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이 성적이 내 생각만큼 안 오르고
운동 선수가 되고 싶어도 체력이 안 받쳐주거나
아니면 자꾸 부상을 당하거나
아니면 또 반려동물이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신하거나
만약에 그 의미를 둔 것이
사라지거나 부서지거나 없어지거나 죽어버리면
또 엄청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그 허무함에 또 한탄하죠.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내가 왜 살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걸’
부모님도 막 원망스럽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삶에서 오는 아주 원천적인 고통을
해결하시고자 출가하셔서 깨우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는데
왕의 지위와 이 부와 명예, 가족과 저 자식까지 다 내려놓고
출가하신 이유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무상함은 쉽게 말하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먼저 인생의 무상함을 직시를 해야 합니다.
삶은 어떤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핑계로 도망만 다니면
그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면 괴롭기만 합니다.
그런 무상함을 피하지 말고
맞서서 이 두 눈 부릅 뜨고, 똑바로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그 실체를 보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뭔지.
언젠가는 사라져서 괴로운 것이라면
이것이 진정한 살아가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
나타나고 사라짐이 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로 여겨왔던 것들이
분명히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지고 파괴될 텐데
그때야말로 진정하게 살아가는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첫 마음
이것이 보리심입니다.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다
이 진리를 알고 싶다
그러니까 깨닫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일으킨 보리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습니다.
처음 먹었던 마음, 초심과
이 마음을 지키는 데 필요한 금강심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변하고 무너져서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거나 또 깨우친 후에는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 진짜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 보리심이야말로
진정한 행복, 없어지지 않는 행복을 알게 해줍니다.
고통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멋진 말로 하면 해탈하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부터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 용맹스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이 구제라는 것이
오늘 하루 먹을 밥을 제공하고
좌절한 사람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해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도움은 또 금방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물론 훌륭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평생 먹여 살리거나
뒤에서 계속 응원은 못 해주죠.
그럼, 그 진정한 그 중생 구제는 무엇이냐?
이 사라지지 않는 행복과 또 그 마음을
그 순수한 본성의 자리로 돌려주는 것
그러니까 마음의 해탈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나는 모든 이들을 해탈하게 해서
그 진정한 깨달음의 행복의 세계로 안내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을 먹었는데
근데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상태를 본다면 아직도 아직 멀었죠.
이 구제가 가능한 것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부처가 되면 되겠죠.
그래서 내가 모두를 위해서 부처가 되겠다고
이 낸 첫 마음이 이 보리심입니다.
그리고 이 보리심을 낸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죠.
착하고, 친절하고, 잘 웃고, 봉사 잘하는 사람이 보살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은 진짜 의미는
그런 이미지보다 조금 더 열정이 있고, 강렬하고
굉장히 현실적인 자비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현실적인 자비심, 사랑 이런 것도 사실 애매하죠.
왠지 ‘모두가 행복해져라’ 이런 좀 애매한 느낌이 있죠.
근데 물론 이것도 굉장히 훌륭한 일이지만
자, 그렇다면 행복이 뭐냐?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이 궁극적인 대답을 하려는데
아직 나에게는 그런 힘과 지혜가 부족하다.
그런 지혜와 힘을, 또 그런 마음을 내기 위해서
이 부처님 법을, 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보살, 이 보리살타라는 말을
깨달음을 향한 이 용맹스러운 마음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말 그대로 이렇게 용맹하지 않으면 가기가 좀 힘든 길입니다.
용기와 꺾이지 않으려는 그 강한 마음이 없으면 좀 갈 수가 없는 길이죠.
그래서 부처가 되는 길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자신을 위함이 아닌 많은 중생을 위해서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것과
또 반드시 이 부처가 될 것이라는 강렬한 결의를 한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승의 길을 가는 이 보살도의 시작입니다.
근데 이 보리심을 가지고 가는 길이, 이 보살도가
워낙 힘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진 아주 강력한 장점을 이렇게 미리 알아두고 있으면
이 정신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간단합니다.
자비심과 보리심의 아주 강력한 장점은
모두를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
이것입니다.
또 아주 빠르게 초고속으로
마음의 평화, 해탈의 길로 이끌어준다
이것입니다.
나는 무상함을 직시하고
보리심을 내어서 그 길을 용맹스럽게 또 기꺼이 간다.
거기에 삶의 의미를 두신다면
더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좀 드렸는데
좀 생각 정리가 잘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년은 또 우리나라 경기도 그렇고
좀 살기가 더 각박해질 거라는 예상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일수록
오늘 이렇게 말씀드린 대승의 보살도를 닦아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새겨서
마음 단속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뭔가 좀 큰 숙제의 답을 찾은 것 같아서
좀 마음이 편해지지 않으셨습니까?
안 그러시다면 제가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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