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16] 모든 것이 하!나~구나 | 모든 현상이 새롭고 새롭다(제행신신)

Buddhastudy 2024. 7. 3. 18:46

 

 

/이로써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은 명료해진다.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이 순간뿐이며

진리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 평상의식, 평상심뿐이다.

그래서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이다./

 

평상심 이러면

조금 전에 본 것처럼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경험상으로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밖에 없죠.

 

근데 이 순간이 어떻게 지금 드러나고 있는가?

현상은 찰라생 찰라멸이고

그 찰라생 찰라멸하는 현상이

생겼다 사라지고 있는 이 공간 자체

공간 자체는

현상이 찰라 생멸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런 표현은 또 한번 처음으로 써봅시다.

아는 공간

지금 이게 아는 공간이다, 이거죠.

근데 아는 공간이 따로 있지 않다.

그걸 뭐라고 따로 잡으면

우리가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에 떨어져요.

 

꿈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꿈속에 있는 사람이 꿈 밖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감은 있는데 아무리 미세한 감이라도

그거는 꿈속의 감이에요.

 

정말로 딱 끊어져서 알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거

이것도 하나의 아주 중요한 안목이에요.

그래야 쉬어져요.

알 수 없어야, 알 수 없다는 걸 알아야 쉬어지지

끝내 이걸 잡으려고 하면 쉬지를 못해

 

다른 비유를 한다면

영화 속에 있는 사람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알 수는 없다.

됐나요?

그래서 진짜 알 수 없다는 걸 알아야 쉰다.

쉰다, 쉬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보조국사는

다만 꿈속의 사람이 꿈 깬 세계를

불해_ 알 수 없다는 걸 알면

그것이 견성이지

꿈속의 사람이 꿈 밖의 세계를 봤다

이게 견성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

우리로 하여금 정말로 딱 쉬워지게만 할 수 있는

끝내 구하거든요, 저거를.

 

하여튼 중도가 미묘한 게, 일반인들은 아예 본질을 몰라요.

본질을 먼저 확인하라고 다그쳐서 방점을 찍게 하고

그다음에는 본질에 대한 집착을 또 놓게 해 .

놓게 해서 활발발하게 살아야지

계속 집착하고 있으면

본질에 또 집착하고 있으면

본질이 본질이 아니다, 이거예요.

 

본질은 다만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진짜 견성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비유를 하면

하여튼 여러분, 이 현상 속은 영화 속이에요.

영화 속의 인물이

영화감독에 대해서 알려고 막 바둥바둥하다가 끝내 모른다.

그게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기 때문에

이런 걸 강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이다./

딱 같이 있는 거

이 순간 현상과 본질이 이렇게 같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매 순간 물들지 않는 새로운 현재가 솟아난다./

이게 참 복된 소식이에요.

놀라운 일은 제행무상이지만.

 

조금 전에 제행무상 봤잖아요.

제행무상하고 같은 말은

제행이 신신新新이에요.

 

그릇에 물이 반쯤 들어있을 때

반밖에 없네하면 제행무상

반이나 있네하면 제행신신

모든 현상이 날마다 새롭고 새로워요.

모든 현상이 찰라멸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찰라생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의 눈이

멸에 가 있으면 무상한 느낌이 들지만

신에 가 있으면 아연생기가 넘치고, 할 일이 넘치고.

 

제가 여러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중에 한 분이 성천 유달영 선생님 만나서

그분하고 함께, 그분이 제 직속상관

돌아가실 때까지 15년간 직장에 있으면서

매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그러니까 온갖 걸 다 봤죠.

 

근데 재밌는 게 이분께서 제가 근무했던

고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성천문화재단 세웠을 때

이분 나이가 80이었어요.

95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장례까지 제가

호상을 했으니까, 장례위원장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15년간을 그분을 모셨는데

지금 제일 큰 저의 소득은 뭐냐 하면

80세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그 인생을

그렇게 활발하게 살아가시는 모습

그리고 아주 15년간 굉장히 행복하게 사셨어요.

 

그분이 그 돈을 쥐고 있었으면

그렇게 못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돈을 사회에 환원해서 문화재단을 세우고

거기에 고전 아카데미를 열고

그리고 당신이 교장 선생님이 되어서 항상 여기 앉으셨어요.

항상 여기 앉으셔서 모든 수업을 그분이 다 듣고 있어

 

그러면 좋은 강사 모셔서 좋은수업 듣지

교장 선생님이니까 사람들 모아서 끝나면 차 마시고, 대화하고.

또 선생님 선생님 그러잖아요.

그리고 사람도 아주 갈수록 더 멋있어지더라고요.

 

80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여의도 사셨는데

집 앞에 나가면 작은 공원이 하나 있어요.

그러면 참새하고 비둘기한테

지금은 비둘기 모이 못 주게 하지만

그때는 참새한테 모이 주고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고전을 열어서 강의를 함으로써

사람들한테 이 고전을 먹이로 또..

 

진지 드셨나 그러잖아요.

진지.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眞知를 먹고 살아요.

그게 그런 뜻이에요.

한자 말이에요.

진지 드셨습니까?” 할 때 진지예요.

인간은 진지를 먹고 산다, 이거예요.

 

진지를 나누는 그런 재단을 하셨고

그리고 주말에는 당신이 농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무궁화 농장이에요.

무궁화를 길러서, 지금 그 무궁화가 청와대를 비롯해서

전국의 무궁화는 이 농장에서 많이 나갔어요.

이분이 농학자인데 왜 무궁화를 전공했는가?

독립운동 하면서, 워낙 나라사랑에 대한 그 마음이 깊어서.

 

하여튼 그 이분을 보면 제행신신을 아주 느낄 수 있어요.

나이 80에 새로 창업해서 매 순간순간을 청년처럼 사셨어요.

문화재단을 창설할 때 당신이 써놓은 모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린 문화재단이 막 탄생했으니까

어린 솔 모종이 구름을 어루만지는 심정

 

이게 그분이 문화재단을 만들면서

우리한테 당신의 모토라고

그 문화재단이 지금도 계속

아드님이 물려받아서 이어져 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솔모종 한 부를 심지만

거기서 보이는 거예요.

얘가 낙락장송이 되어서 구름을 어루만진다.

상황 이해되죠?

 

우리 공부가 그런 거예요.

지금 이 매 순간순간

찰나생 찰나멸하고 있는 이 속에

일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있다

 

보세요.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죠.

지금 상황 이해되세요?

 

경험적으로 현상은 인연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공간 자체

아는 공간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

그 자체는 여여부동하게 항상 이렇게 있잖아요.

 

그러면 이 안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현상의 입장에서는 부분밖에 모르지만

이 본질 자체는 모든 공간을 다 포함하고 있고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

상황 이해되세요?

 

본질을 깨닫는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이

다 하-나네.

그 나를 깨달으면

전체가 다 시공간을 다 포함해서

다 나가 돼버리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알게 되면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진다.

진지가 된다.

 

그래서 제가 가끔 이런 예를 들어 드리는데

삼국유사의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화음악을 달통하고 돌아와서

한국에서 화엄종을 세우잖아요.

그때 부석사에서 화엄을 강의하실 때 10명의 제자가 나오거든요.

화음십철이라고 해요.

10명의 제자를 길러서

10명의 제자로 하여금 화엄십차를 만들게 해.

 

그때 신라시대니까

지금 경상도 신라의 영역에 있는 화엄십찰,

범어사, 해인사, 부석사, 갑사, 해서 그 십찰이 지금도 있어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가서 세운 절들이에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지통이라고 하는 스님

의상대사의 제자, 지통

지혜 지, 통할 통.

이 지통 스님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지금 남아 있어요.

그 지통 스님이 화엄학을 배운 뒤에

태백산에 들어가서 미리암이라고 하는 암자를 세워요.

초막이죠, 암자.

거기서 실참에 들어가.

화엄학을 달통해도 깨달음은 아니죠, 교학이니까.

근데 깨닫는 것은 수행을 해야 되잖아요.

 

화엄학을 달통하고

밤에 수행에 들어가서

태백산에 가서 미리암이라는 암자를 지어서 거기서 딱 정진을 하는데

당신이 손수 칼로 미륵불을 새겨서 그 암자에 모시고

그 방에 딱 앉아서 정진을 하는 거예요.

 

근데 하루는 인기척이 나서

이 미륵불을 보고 딱 앉아서 정진하고 있는데

뒤에서 무슨 인기척이 소리가 나서 이렇게 딱 보니까

멧돼지가 그 뜰로 이렇게 지나가는 거예요.

태백산에서 수핼하고 있으면 멧돼지 출연하는 거는 다반사지.

 

근데 그날따라 멧돼지를 딱 보는 순간, 딱 끊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끊어졌다라고 하는 표현이

우리가 본질을 체험할 때, ‘이거다라고 하는 감이 왔을 때

끝내 본질은 알 수 없는 거기 때문에

오히려 끊어졌다고 표현하는 게

모른다로 가야지 맞는 거지

자기가 이거다 저거다하는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 거예요.

이 현상의 흔적이.

 

그래서 딱 끊어지면서

끊어졌을 때, 말하자면 동서남북이 하나가 되고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딱 이분이 돌아서서 멧돼지를 보는 순간 딱 끊어졌는데

그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하-나구나하는 걸 딱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미륵불한테 3배 올리고, 급히 스승을 찾았어.

기록이 남아 있어요.

의상대사에게 가서 자기 공부를 점검받았다.

그때 뭐라고 말을 했느냐?

그 미륵불 앞에서 지통 스님이 정진하다가

멧돼지를 보는 순간 끊어지면서

과거의 자기 전생이 멧돼지였고

현생이 지통 스님이고

그리고 자기의 내생이 미륵불이라는 거를

한순간에, 이것이 하나라는 것을 자기가 터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고를 한 거예요, 의상 스님한테.

 

그랬더니 스님께서

화엄십찰 중에 하나를 너가 맡아라하고

인가를 했다,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와요.

그 한국 기록이니까 참 귀한 기록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엄연히 이 공성과 각성이 이 자각이 있다, 이거예요.

이걸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이것의 공간을 우리가 느낄 때는

이것과 소통할 때는

시공간이 끊어진다라고 표현을 하는 게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최상의 방법이고.

 

그리고 재밌는 것은

이 자리는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지난 60년 기억, 우리가 죽을 때 뭐라 그래요?

죽을 때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그러잖아요.

자기 일생이.

그런 이야기 많죠.

 

눈을 감을 때 일생이 주마가 뭐예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는 경치는, 주마등은

그 찰나 간에 그 몇십 년이 순식간에 쫙 펼쳐진다. 이 말..

필름이 다시 돈다 이 말이잖아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들의 본성에는, 우리의 본질인 이 자리에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이 다 저장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았을 때

그런 묘사가 있거든

부처님께서 당신의 전생과 내생을 관했다

그런데 당신의 전생 내생만 본 게 아니고

일체중생의 전생 내생을 같이 봤다하는 그런 기록이 있거든요.

 

그럼 뭐겠어요?

개인으로서의 문제가 아니고

본질에 접속되는 순간

우리가 본질과 접속하는 순간

그 본질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다 저장이 되어 있어서.

 

왜냐하면 놀랍게도

지금 하-나 할 때

저의 입장에는 이 세계가 나밖에 없거든요.

여러분은 제가 꾸는 꿈속에 등장한 지금 인물들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의 또 입장에서는

이 세계, 제가 지금 이 현상에 등장한 한 명의 인물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의 의식 공간하고, 저의 의식 공간하고, 이 많은 의식 공간들이

지금 하나하나면서

그러니까 하나다 이거예요.

우리가 지금 같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어요.

 

화엄에서는 중중무진이다

중이라고 말할때는 23중 할 때

지금 여기가 30명이 있으면 30

그리고 나가면 또 중중무진

의식과 의식이 중중무진되어서

하나면서 이렇게 또 많은 것으로 나뉘어 있어서.

지금도 이 속에서 우리가 살고는 있는데

이거를 처음에는 감이 오거든요.

그런데 그 감을 잡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제가 지금 여러분께 드리는 충고가

이거다’ ‘저거다하는 그 감을 고집하면 집착하면

어디까지나 그 감은 현상계 속에 있는 거지.

 

그래서 역설적으로

익어지면 익어질수록

모든 것이 이 하나가 들락거리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이거를 참 설명할 수는 없구나.

그리고 설명하는 순간, 나는 오히려 현상계의 함정에 빠지구나 하는

그걸 자각하게 되는 공부가 또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 감사한 일은

최근에는 한 분 두 분 알아채는 분들이 나오세요.

그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 알아채고 3년 전의 법문을 들어보니까

그때 이미 다 이야기를 낱낱이 교수님이 다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는 3년 전이나 지금까지

까맣게 그 말인지 모르고 있다가

이제 알고 나니까

싱겁게도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시네요.

이렇게 또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나오고 있어서

기쁜 일이죠.

이렇게 알아채는 분들이 나온다 이거야.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이제 들어보면 그동안에 저는 왜 그렇게 고구정녕하게

고구정녕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입이 쓸 정도로

입이 하도 말을 해서 입이 쓸 정도로

고구_쓴 입이 정녕 아주 돈독할 정도로

말씀을 다 하셨는데 왜 저는 못 알아들었을까요? 하면서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엉뚱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죠.

도를 엉뚱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의 핵심은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라는 거예요.

 

하여튼 우리들은 우리들의 고집에 의해서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불법을

이데아, 이상으로 삼아서 추구하는 공부 태도가

너무너무 당연한 거예요.

 

초심자들은 자기는 몰라도

아마 제가 보기에는 99%

모든 초심자는 불법을 이상으로 삼아서

공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이상을 추구해요.

근데 불법은 뭐죠?

지금 여기, 자기에게 없으면 불법이 아니에요.

 

그러면 나는 지금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잖아요.

따라서 완전하고 완성된 자기가 되어야만이 불법이다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요.

거의 뭐 99% 대부분이.

 

그래서 현상과 본질을 착각한 거예요.

현상을 완전하고 완성된 존재로 해야만이

이게 불법이다, 라고 착각하고 추구하니까

현상에서는 상대성이 현상의 법칙인데

현상에서 절대를 찾으면 찾을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끝내 못 찾거든요.

근데 그렇게 찾는다, 이거예요.

 

그러다가 법문을 듣고, 듣고, 듣고, 하다가

현상과 본질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이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에 내가 빠졌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깨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놀랍게도

우리 전체가 다

이렇게 요 모양 요 꼴로 현상이

요 모양 요 꼴로 본질이 불법이에요.

 

현상을 바꿔서 완성된 본질을 얻는 게 아니라

요 모양 요 꼴로 본질은 완벽하다

이게 깨달음이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