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은 제행, 모든 행은 현상이란 말이에요.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근데 이것이 생멸법이다.
근데 생멸이 멸하면
생멸이 멸한다, 이 말이 지금 우리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생멸이 멸한다. 이게 이게 뭘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생멸이 멸한 그 상태?
혹은 자리라는 말을 많이 쓰니까
생멸하는 것이 있고
생멸하는 것이 일어나는 그 자리는 생존하지 않아.
그래서 생멸이 멸한다, 그러잖아요.
생멸멸이 할 때, 생멸멸이 뭐지?
이게 또 확인이 돼야 되는 거죠.
그러면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기억이 떠오르는
지나갔는데 기억이 떠오르는 그 자리
분명히 현상은 지나갔는데 그 현상에 대한 기억이
아침에 눈 뜨면, 반추해 보면 떠오르잖아요.
그것이 떠오르는 이 자리는 생멸이 멸했구나 하고 확인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계속 지금
현상을 통해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공간 자체로서의 기억하는 주체
표현은 다양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자동적으로
옛날에 그 선전의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언제 적 선전이죠? 버킹검이 무슨 옷 선전인가?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하듯이
이렇게 계속 반추를 해보면
“아, 제행상이다.”
근데 “제행무상으로 안 끝나고 그걸 내가 기억하고 있구나”
그러면 그 기억이 떠오르는 이 공간이라는 것이 있구나
그러면 이 공간에 기억만 떠오르는 게 아니고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알고 보면
눈앞에 보여지는 그 모양들도
이 자리에서 지금 이렇게 인연 따라 떠올랐다가 지나가죠.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면 벽이 떠올라요.
근데 제가 이렇게 보거나 이렇게 보거나, 이 자리는 같은 건데
같은 거에 인연 따라
앞을 보면 앞이 나타나고
옆으로 보면 옆에 벽이 나타나고
눈 감으면 깜깜한 제 눈꺼풀
안이 깜깜한 그것이 여기에 나타나고.
그래서 항상 확인되는 것은
제행무상이 일어나는 그 자리.
또 다른 말로 하면
제행_ 모든 현상이 무상한 줄 아는 자리라고 하건, 그놈이라고 하건
아는 것이 또 이렇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기억하는 것이 제행무상도 아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보세요.
부처님께서 제행무상을 말할 때는
부처님이 제행 속에서는 무상으로 말하기가 어려워요.
제행무상이라고 말하려면
행으로부터 나와야 그 말을 할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럼 부처님이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일단 경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제일 첫 번째 사실은
모든 현상은 무상한 겁니다” 하고 말할 때
우리들은 그 말을 가지고
부처님이 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상하지 않은 자리에서 이 무상을 말씀하셨구나.
그러면 열반경에 나오는 이 게송이
제행무상은 시생멸법_ 모든 현상은 무상하게 사라진다.
이것이 생멸법이다. 생멸의 법칙이다.
그런데 생멸이 멸한자리, 생멸하지 않는 자리
이 자리는 생멸을 보고 있는 자리예요.
지금도 마찬가지.
생멸을 보고 있는 이 자리는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생멸이 일어나는 그 자리는
그리고 그냥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걸 남한테 말할 때
제가 ‘기억하는 놈’이라고 했잖아요.
제행무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근데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기억하는 놈’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단어이니까
제가 혼자 앉았을 때는 의식이라는 생각 안 해요.
여러분 앞에서 할 수 없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그래도 전달하려면
지금 21세기 한국인한테는 의식이라는 말을 쓰는 게
제일 무난하기 때문에
이 말을 쓰는 거예요.
인연 따라 쓰고 저는 버리니까
여러분도 이해만 하시고는 붙잡지는 마세요.
그러면 제행무상을 알고 있는 이것을 의식이라고 저는 표현합니다라면
여러분 그냥 따라오시면 돼요.
제행무상인데 제행무상인 걸 보고 아는 것은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근데 이 의식은 모양이 없어서
모양으로 이거다 저거다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할 수 없이 말을 하면
이 의식은 생멸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리 자체라고 표현할 수는 있어요.
그러면 생멸이 멸했다.
의식의 입장에서는 불생불멸이다.
저는 오늘 아침에 진짜로 했거든요.
아침에 진짜로 눈 뜨면
할 일이 이것밖에 없어.
계속 확인하는 거예요. 계속 확인해.
왜냐하면 눈 떠서 할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러면 눈 뜨자마자 또 시간은 흐르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는데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아는 것은 흐르지 않아.
이게 지금, 계속 틈날 때마다 확인하고 확인해 들어가는
가장 존재의 기본 모습인 거죠.
시간이 흐르는데
흐르는 것을 아는, 또 흐르는 걸 보는 그거는
흐르지 않아.
그리고 시간을 보는 그 의식 공간 속에
모든 현상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하여튼 뭔가가 흐를 때
딱 흐르는 놈과
그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공간 자체
그것이 딱 구분이 되면서
나중에 하나가 되는데
일단은 구분이 되면서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이 흐르는데
그 흐르는 것이 일어나고 있는, 혹은 그 흐르는 것을 보고 있는
공간 자체가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 몸도 흐르는 것 안에 들어가요.
흐르는 것 중에는 내 몸도 포함돼요.
그러면 내 몸도 포함된 이 전체가 흐르고 있어.
근데 이거를 아는
흐르는 것을 보고 아는 놈은 흐르지 않는데
근데 이거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느낌상으로는
이것이 이 눈에 보이는 전체를 다 안고 있는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구나.
그리고 눈만 감으면 사라져버리는구나, 이것들은.
근데 사라져도 지금 할 수 있어요.
눈을 감아보세요.
눈 감으면 조금 전에는 보였는데 지금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대신에 저는 지금 제 눈꺼풀에
빛이 반짝반짝하네, 뭔가가.
조그마한 아지랭이 같이, 맞아요?
그거 보고 있잖아요.
이 보는 놈은 그대로다 이거예요.
눈 뜨셔도 되는데
보는 놈은 그대로 있어.
눈이 보는 건 아니고 눈을 통해서...
그러니까 지금 말을 하자면
이 의식 공간 자체가 이 눈을 통해서 보는데
눈을 뜨면 이것이 나타나고
눈을 감으면 까만데 뭔가가 약간의 빛의 점 같은 것들이 좀 이렇게 흩어져 있죠. 그죠?
그 망막의 세포들이거든
망막 신경들.
망막 신경들은 약간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요.
신경세포들이.
신경세포 자체가 빛이에요. 안 그래요? 여러분.
어떤 때는 반짝반짝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 망막 자체가 황금빛으로
황금의 눈처럼 동그란 이런 게 또 뜨기도 하고
하여튼 뭐 별의별게 그냥 나오는데.
그러니까 여러분 중요한 게 보세요.
보이는 그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것이 나오더라도 보는 놈은 그대로다 이거예요.
이게 불생불멸
생멸멸_ 생멸이 멸하는 그 자리는
그걸 보는 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점이 확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점이 확실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조금 전에 육조스님도 마찬가지로 ‘청정을 구한다’고 그러잖아요.
‘사람들이 청정을 구하면 그게 망념이다’
조금 전에 설명했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에 떨어진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보여지는 것에서 뭔가 신비한 거를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것들은 전부 현상이다.
본질은 보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현상인데 현상은 다양하다.
별의별 게 다 있다.
저는 요즘은 그 상당히 공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꿈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래서 그 꿈의 일종으로
이런 지식도 공부에 도움이 돼요.
뭐냐 하면 꿈에서 어떤 세계가 펼쳐지잖아요.
꿈꿀 때마다 다르잖아요. 이해되세요?
그러면 그런 세계가 꿈꿀 때만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의식은 신통방통해서
소위 말하는 육도윤회 중에서 천상계가 있잖아요.
천상계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그 부처님 이전에 그 오래된 인도 전통에 의하면
무슨 천 무슨 천해서 인간보다도 더 맑은 세계가 있잖아요.
그 아무리 맑은 세계가...
옛날에는 그게 어떨까 궁금했는데
지금은 궁금하지가 않아.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계의 체험을, 경험을 보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어떤 사람이 어떤 뭔가를 통해서 그런 세계를 체험했다 하고
보고하는 것이
요즘은 정보가 워낙 공개되어서 별의 별 세계를 다 보고를 해요.
그러면 그것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된다.
무슨 소리냐?
그런 거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꿈을 꾸니까.
그러면 내 꿈에도 별의별게 다 나와.
근데 재미있게도 그런 지식을 알면, 그런 지식이 꿈에서 나타나
아니 그 장자가 나비 꿈을 꿨다하면
그 뒤로 나도 내 꿈에서 나비가 돼서 훌훌 자유로운 그런 꿈을 꾼다, 이거예요.
그런 정보를 들으면
그런 정부가 꿈으로 또 나오니까.
아 충분히 있을 수 있네.
근데 헷갈리지 않는 건 뭐냐 하면, 정법이라는 거는 뭐냐 하면
그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해도 이해가 되고, 오케이.
그러나 문제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제행무상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제행무상을 아는 이 자리.
그러면 그 어떤 꿈의 내용,
찬란한 오색찬란한 내용이 일어나더라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어디서 나타나는 거예요?
여기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 손바닥을
이 자리가 부처님 손바닥이야.
지금 우리가 부처님 손바닥에 있어.
그러면 여기서 그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다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프리카 가서, 동물의 왕국이 갑자기 가서
아니 돈 내고 아프리카 여행 패키지 끊어서 가면
따라만 가면 나타날 거 아니에요.
정말로 사자가 얼른 막 쫓아다니고 하는 것이 나타날 거 아니에요, 그죠?
어디서 나타나느냐 이거예요.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의 공간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타난다, 이거죠.
항상 포인트가
불생불멸의 이 자리하고
이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하고
그 둘은 확고하게 가려볼 줄 안다.
이것도 열반경에서 나온 소리 같은데.
열반경이 참 비유가 엄청 많네요.
열반경에 거위왕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거위의 왕이 있는데
이 거위왕은 물에다가 우유를 섞어서 주면
우유만 쏙~
이해되세요?
섞어주면 우유만 쏙 빨아먹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상과 본질이 항상 같이 돼 있어요.
이게 같이 돼 있어요.
같이 돼 있는데 정확하게
물과 우유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물과 우유를 구분할 줄 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정법이 아니라면
까딱하면 별세계를 내가 안내할 수 있다 그러면
그쪽으로 따라갈 것 같아.
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통을 구한다는 거죠.
뭔가 특별한 것.
이게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다 이거죠.
그 모든 신통이 제행무상이다, 이거예요.
상황 이해됐어요?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신통은 뭐냐?
그 모든 것이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할 때
이 여기, 지금 의식 공간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보세요.
공부라는 것은
의식 공간에 대한 감이 계속 익어가는 거예요.
의식 공간에 대한 자기 감이 계속 익어간다.
물과 우유를 완벽하게 구분하듯이
현상과 본질을 일단은 철저하게 본질에 대해서 감각을 익혀간다.
그래서 익어 있는 현상은 줄이고
설어 있는 본질은 늘려간다.
근데 이것이 점점점점 공부가 진행이 되면
나중에는 재밌는 현상이 그 뒤에
설은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을 설게해 가면
가면 갈수록 나중에 하나가 돼버려요.
중도라고 하는
우리가 말하는 중도의 어떤 그런
중등에 대한 또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완성될 때 이것이 하나가 돼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농담 비슷하게
중도, 불이, 연기
이것이 또 ‘일심’하고도 같은 말이거든요.
일심, 한계의식
그래서 하나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나가 참 하나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이구나 하고
제가 느낀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본질이 확인되고 확인되고 확인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부가 본질이죠. 그렇지 않나요?
법화경 이런 데서 말하는
본질이 자기의 고향인데
자기 고향을 두고 현상에 미혹되어서 집을 나가서
거지 아이가 되었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데 40년이 걸리더라
이런 말이 법화경에 나오거든요.
그런 말들이 이해가 되는데
아, 이거는 자기한테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옛날에 나도 그랬었지, 옛날에는 나도 집을 나갔었지
그리고 집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
근데 집에 돌아와서 본질이 익어지면
이거는 비유로서 이렇게 말을 했지만 사실은 아니네.
왜냐하면 본질이 익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체가 다 손질이라서 전체가 다 부처님 손바닥이라서
내 딴엔 미혹되어서 집 나갔다고 했지만
나간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가 되는 거예요. 결국
다시 말하면
집이 본질이고
집을 나간 객지가 현상인데
처음에는 집 자체를 몰랐다가
그리고 집을 발견하고
그리고 집에 정착하는데
집에 정착하는 시간이 하여튼 법화경에는 40년 걸렸다는 거예요.
근데 정착하고 보니까
애초에 우리 집이 다 우리 집이라서
천하가 다 우리 집이라서
내가 나간 적이 없었네. 착각했던 거네 하고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집을 나간 적이 없다’ 이 말은
모든 것이 집안의 소식이다가 되잖아요.
그래서 이 의식 공간의 입장이 정말 되면
이 세상에 다 나의 바운더리야
집을 나간 적이 없다, 이 말 이해 되죠?
집을 나간 적이 없이 다 나의 바운더리에요.
그러면 이 나의 바운더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뭐냐는 거예요.
모든 현상이 좋건 싫건
미추_ 아름다운 것이건 추한 것이건, 모든 것이 다 내...
그래서 여러분 ‘하’라는 말은 감탄사라는 거 아시겠어요?
우리 말에 ‘하’는 감탄사.
그러니까 늘 발견하고
하- 늘 하니까
하-늘을 하늘 하늘처럼
하아 나네
이 하나, 하나라는 말의 어원이
우리 한국말이 얼마나 신비한 말이에요.
하나라는 말의 어원이
‘하’는 감탄사고
‘나네’하는 거예요.
‘하- 나네’의식 공간 입장에서는 이것이 정말로 이어지면
이것이 정말로 익어져서 이것이 확실하게 확실하면
바운더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하, 참 신통하다.
나네 나네 모든 것이 나네’
이게 하-나, 하나야.
그러니까 하나의 뜻이 참 기가 막히지 않나요?
이거 이거 맞지 않나?
그래서 아까 여기 조금 전에 육조스님이
인간이 첫 번째 단계에서 현상으로부터
“아 이것이 제행무상이구나”라는 걸 알아차리고 빠져나오는 것은 1차적인 관문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진리네, 본질이네, 의식이네” 하는 그 관념에서 나오기는
이 현상에서 나오는 것보다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거예요.
법상이라고 여기서도 아주 경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상으로부터 나오는 것보다
법이라고 하는 상으로부터 나오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근데 법이라고 하는 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 할 때
법이 있으면 ‘법이구나’ 하고 알아채는 나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법이 있으면 ‘이게 법이다’라고 하는 나가 있을 거 아니에요
법이 있으면 아상이
법상이 있으면 반드시 아상이 같이 있어요.
이해되나요?
그래서 아상을 완전히 내려놓으려면 법상을 내려놓아야 해요.
그러니까 이게 어려운 게
제가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가끔씩 여러분한테
우스갯소리처럼 질문을 던지잖아요.
‘아미타불’이 계시고 ‘나’가 있으면
아직 불이법이 아닌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 않아요, 따로따로 있으니까.
이때 그러면 불이법이 되려면
요 이분법이 불입법이 되려면 하나는 버려야 된다, 이거예요.
근데 버리는데
실제로 버릴 수 있는 걸 버려야 된다, 이거지
그렇잖아요.
그러면 아미타불하고 나 사이에
무엇을 버릴 수 있느냐, 실제로는.
아미타불 없어도 나는 살지.
이제는 알고 버려야 된다. 이거예요.
“이게 본질이구나, 이게 진리구나, 이게 의식이구나” 하고
뭐라도 남아 있으면
아직 둘이다, 이거지.
근데 그것이 가장 알기 쉬운 상징은
평생동안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사는데
아미타불에 내가 귀의하는 한은 아직은 아니야.
둘이야 둘.
그러니까 하나를 버리자.
그러면 아미타를 버릴 수 있어요? 나를 버릴 수 있어요? 이렇게 되는 거죠.
뭘 버릴 수 있어요?
나를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버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미타불을 버려야 돼.
그럼 아미타불을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아미타불을 버리면 나도 없어. 그죠, 원리가.
없잖아요. 나도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돼요?
전체가 다 하나하나가 다
이게 ‘아-나’, ‘아-나’, ‘하나’ ‘하나’
그러니까 전체가 다 나가 될 때 이게 아미타불이라 이거죠.
그거를 상징해서 아미타불이라고 불렀다는 거죠.
아미타불의 원래 뜻은
아미타가 화신, 보신, 법신을 묶어서
기독교로 말하면 삼위일체, 화신 보신 법신
아미타를 묶어서 아미타라고 이름을 불렀다는 거예요.
그러면 묶어서 하나가 된 거
이때 마지막 남는 하나는
이게 다 나야, 그냥.
정말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
그게 아미타불이라는 거죠.
근데 이거를 이론으로 알아서는
이론과 이론을 알고 있는 나하고
여전히 나누어져 있어서
결국에는 공부는 익힌 다음에는 버려야 해.
버려야 되죠.
행하려면 버려야 현실에서 행할 수가 있죠.
그래서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처음 공부한 사람은 [산은 산이다]
근데 본질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본질이기 때문에 [산은 산이 아니다]
근데 그렇게 되면 본질적으로 치우쳐서
뭔가 이게 본질이라고 붙잡고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본질을 버려서 자기로 돌아오는 거죠.
그래서 ‘하’ 그러니까
김 아무개가 나가 아니고, 하나가 나다 이거예요.
‘하-나’가 진짜 ‘나’다 이거예요.
이렇게 공부가 그러면
이때 하나가 됐을 때는 [산은 산이다]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산은 역시 산이구나.
산은 산이다에서
산은 산이 아니다로 갔다가
산은 역시 산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이거는
본질을 발견했을 때 육조혜능 스님은
본래 무일물이라고 표현한 것이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표현이에요.
한 물건도 없다.
본질자리에는 생멸멸이
한 그 자리 자체에는 한 물건도 없다.
이거는 본질을 말했다, 이거예요.
근데 이게 공부의 끝이 아니라
그 본질이 또 있어.
본질을 버려야
모든 것이 다 하나가 되는 쪽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에는 본질을 발견하고 본질을 버려야 되는
공부 과정이 그렇다 이거예요.
본질을 발견했을 때는 산은 산이 아니었다.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이 본질을 버리면 산은 역시 산이다.
이거는 본질하고 현상이 구분되지 않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 것.
그래서 오늘은 첫 시간 주제가
응무소주이생기심 할 때
마땅히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고 할 때
머물지 말라고 한 것은 본질을 말한 거예요.
근데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은
본질을 버려서 현상으로 다시 돌아 나와라.
그래서 현상의 본질이 되는
현상과 본질이 하나가 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중도로.
공부는 현상에서 살다가
본질을 발견하고
본질을 버리고
현상으로 돌아 나오는 중도로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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