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30] 진리를 버려야 하는 이유 | 분리감을 극복하라

Buddhastudy 2024. 8. 21. 19:46

 

 

육조단경을 공부하는데

결국은 깨달아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자

,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이 목적이고

고통이 소멸되려면 깨닫는 것이 한번 필요하다.

 

그러니까 꿈속의 문제는

깨어야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꿈속에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보고 있는

보고, 듣고, 하고 있는 이것

지금 작용하는 주체

이것에 대한 자각이 분명했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거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요.

아니 안 변해요, 아예.

영원한 현재예요.

 

그리고 이것 속에 이것의 크기는 무한대죠.

이게 남자예요? 여자예요?

남녀 없죠.

무슨 동그라미예요? 네모예요?

모양도 없잖아요.

어디까지라는 게 없잖아요.

이게 지금 보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게 나가 아니고 뭐가 나냐 이거예요.

진짜 나는, 본래면목, 나의 본래면목은.

 

그러니까 이것은 실제로 몸은 태어난 게 있지만

그러니까 언제 죽겠지만

이것은 태어난 적이 있을까요?

좀 그렇잖아요. 이게 어떻게 태어날 수 있어요?

오히려 세상이 이것 속에서 태어났지.

이게 뒤집힌다고요.

 

그리고 실제 지금 보는 것은 김 아무개가 보는 게 아니고

이것이 보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기독교에 있는

순간순간이 성경 체험이다, 이거예요.

불자는 순간순간 부처님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부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놀라운 사실을 수용하는 데는

첫 번째, 부처님이 하신 것처럼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에요.

여러분, 천상천하에 의식 하나밖에 없어, 맞아요?

근데 그 의식이 나예요.

이 의식이 남이 아니고, 이 의식이 나예요.

그러니까 천상천하에 나밖에 없어.

그리고 나 안에 인연 따라 지금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는데

펼쳐진 것 중에는 내 몸도 있어.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한번 써봤는데

이런저런 많은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런 것을 지금 머리로는 이해는 해요.

근데 이것이 실천이 안 돼.

그러니까 실감이 안 느껴져.

 

안 느껴지기 때문에 잡다한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는

이렇게 딱 알맹이를 압축해서

계속 내가 안 잊어먹고 이걸 반복해서

이 말을 더욱더 실감나게 하다가

어느 순간 이제는 간덩이가 부어서

진짜 그렇네.

그러면 지금 보는 게 이거고

지금 소리 들리면 듣는 게 이거고

 

그러니까 조금 한 걸음 더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소리가 들리면 내가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이 말 이해되나요?

 

이거 속에서 이거 하나가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까 이거 하나를 불교적인 용어로 하면

법신불이라고 하고

나타나는 거는 화신불이라고 하고

기독교 용어로 하면 이거 하나를 성부라고 하고

그리고 나타나는 하나하나는 성자라고 하고

그리고 성령은 지금 이 둘 사이를

이렇게 지금 완전히 함께 자유롭게 지금 소통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삼위일체의 신비가

지금 그대로 내한테서

지금 이 순간 구현되고 있다.

 

불교로 말하면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삼신이 한 분으로서 지금 나한테 실현되고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기독교로 말하면

그러니까 성령이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거지.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괄호 속에 넣는다 이거예요.

그건 이론이고

여전히 나는 지금 이거를 소화 못 하는 그 나다, 이거예요.

 

근데 지금 그 나를 괄호에서 끄집어내야 돼.

그래서 자꾸자꾸 이런 문제를 자꾸 되새김질을 해보면

여기서 한번 탁,

기존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는 거예요.

그거를 자꾸자꾸 해야 돼.

상황 이해되시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방해하는

지금 이거를 소화하는 것을 방해꾼이 있어요. 방해꾼

중요한 문제네요.

이 진실을 내가 받아들이는 데 방해하는 거

그게 뭐냐 하면

분리감이에요.

이거를 받아들이는데 방해하는 게 뭐냐 하면

분리감이에요.

 

제가 여러분께 장담하는데

초심자는 분리감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무슨 소리냐면

아는데 나는 분리되어 있다는 감이 여전히 강해요.

 

그러니까 요 신체 경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 안에 분리된 존재로서의 나의 고정관념이

굉장히 똬리 틀고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 안에는.

 

그래서 이 [분리감]

분리감의 동의어가 이론적으로 하면 [분별심]이에요.

그리고 이 [분별심]

기독교적인 용어가 너무 좋아서

[선악과]라고 해요.

근데 선악과를 [원죄]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원죄야.

원죄라는 말은 오래된 죄의식이라는 뜻이잖아요.

 

우리가 선악과, 원죄, 분별심, 분리감

또 불교 용어로 하면 업장이라고 해요.

이거를 업의 장애, 습관의 장애.

 

그러니까 이게 우리한테는 굉장히 강력해요.

그래서 이런 말을 알아는 들어도

이 분리감을 극복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부가 이 문만 나서면 다 까먹어버리는 이유가

분리감 때문이에요.

이것이 강력하기 때문에 원죄라고까지 표현하는 그 분리감이 있다.

여러분, 있죠?

그래서 그 분리감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이것(분리감, 업장, 분별심, 선악과, 원죄)들이 존재 방식이 있어요.

 

우리한테는 분리감이 있다이 말 이해되세요?

자기도 모르게 이거를 나라고 하는 분리감이

이 세상에서 떼서

이거를 나라고 하는 분리감이 있다 이거예요.

 

그럼, 이 분리감이 존재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반드시 [생각]을 타고 [분리감][존재]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을까?

여러분, 그런 생각 없어요?

자기를 보면

아니 왜 이렇게 생각이 많지?”

통제 안 되는 생각이 왜 이렇게 많지?”

그런 느낌 없어요?

있죠.

 

왜 그렇게 생각이 많으냐?

분리감이 자기가 살려고

끊임없이 우리한테 이 생각을 일으키게 해요.

 

그러니까 공부는 [생각을 멈추는 게 공부다.]

이 말 이해되세요?

생각을 멈춘다.

생각을 멈추면 진실을 본다.

[지관]이라고 해요.

 

모든 수행은 딱 이거예요.

수행은 생각을 멈추면 진실을 본다.”

뒤집으면

생각을 멈추지 못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진실의 핵심은 뭐예요?

진실의 핵심은 나는 의식이다.”

나는 의식이다.

 

제가 의식이다할 때

여러분께서는

저는 여러분께 전달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나는 의식이라는 용어를 써요.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의식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고

그다음에 의식은 버려주셔야 돼요.

 

의식을 쥐고 있으면

의식이라는 말을 내가 잊어버리면 안 되겠구나하고

의식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의식이 진짜 의식일까요?

아니면

그러니까 의식은 전체잖아요.

근데 의식이라고 내가 기억하면

그 의식은 전체일까요? 부분일까요?

부분이죠.

 

전체가 부분이 되는 메카니즘은 뭐냐 하면

의식 대신에 전체라는 말을 써봅시다.

의식 대신에 전체라는 말을 써보면

나는 전체다이렇게 되잖아요.

맞아요?

 

근데 보세요.

나는 전체다라고 하는 문장 속에는

나하고 전체가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보세요.

전체라고 말을 하면

말로 된 전체는

나는 전체라고 내가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전체하고 나가 항상 분별되는 거예요.

분리되고 있어요.

분리, 분별.

 

전체라고 말을 하면 전체가 안 돼.

왜냐하면 전체라고 말하는 나가 생기기 때문에

이거 이해되나요?

 

이건 좀 깊은 공부예요.

공부가 좀 익어가면

마지막에는 이 메커니즘을 한번 자각하셔야 돼요.

 

내가 전체라고 하면

전체라고 말하는 나가 있어.

그럼 나하고 전체는 분리되어 있으니까

전체는 전체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부처다, 의식이다, 전체다, 성령이다 하는 순간

법상이 되고

법상은 즉시 아상을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여기 두 개가 같이 성립하기 때문에

아상은, 에고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전체를 잡게 하고

부처를 잡게 하고

성령을 잡게 하고

끊임없이 이거를 잡게 해서

자기 아상이 존재해요.

이 메커니즘은 굉장히 깊은 이야기예요.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아상도 떨어져요.

즉 원리가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야

스승에 의지하려고 하는 나가 거기서 떨어져.

 

이거는 아주 중요한

공부가 좀 익은 사람한테 하는 소리예요.

 

우리는 진리를 붙잡기 때문에

아상이 끝까지 거기 딱 붙어 있어.

진리라고 쫓았기 때문에 이게 붙어 있어.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진짜 선을 할 사람은

부처도 죽이고, 스승도 죽이고, 진리도 죽이고,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순간

관세음보살한테 비는 에고가 같이 있어.

무서운 이야기죠.

근데 이게 사실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초보자한테는 못해.

좀 깊은 사람한테.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면

진실이라고 하는 나가 생겨버려요.

나도 없고 진실도 없어야만이

그래야 진짜 하나가 되잖아요.

근데 내가 하나다하는 순간

하나하고 하고가 분리

분리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참 무서운 공부예요.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는 버려야 돼.

그걸 버리도록 하는 가르침이 금강경이에요.

 

육조 혜능이 금강경을 보고 깨달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어요.

금강경에 그런 말 나오잖아요.

부처님이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그러잖아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여기에 진리라는 말, 반야, 원각,

지금 우리가 쓰는 모든 말, 그 모든 말을

우리가 이거다라고 이해하고 있는 한은

이해하는 에고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어요.

진리가 분명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에고도 분명해.

제 말, 이거 무서운 말을 지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나중에는 그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그 절벽의 돌부리

그게 우리한테는 진리예요.

근데 그거를 놓아야

현애살수(縣崖撒手,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