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법문 보겠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세간 사람에게는 생사의 일이 가장 크다.
너희들은/
5조가 법을 물려주기 위해서
지금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하는 소리에요.
/제자들아 너희들은 맨날 복전만 구하고/
복의 밭만 구하고
다시 말하면 현상계 내에서 복을 받는 일만 구하고
/생사고해를 벗어날 뜻은 내지 않는구나./
그러니까 복전만 구한다. 이 말은
지금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이 복을 받는 것을 구한다.
상황 이해되나요?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근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생사고해를 벗어날 뜻을 낸다.
생사고해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저도 제가 참선을 시작한, 이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존재 불만족이었어요.
뭘 해도 이 존재 자체가 불만족스러웠어.
존재 불만족이었어요.
그래서 존재 불만족을 불교에서는 고라고 해요.
그리고 존재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계를
고해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개고’라
일체가 고통이라 그랬어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의식이라는 걸 모르고, 몸을 나라고 하면
차원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의식이 나일 때는 대자유인데
의식은 크기가 없거든요.
의식이 나일 때는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데
몸을 나라고 하는 순간
뚝 떨어져요.
일단 크기가
무한대에서 160cm로 축소된다.
이해돼요?
무한대의 의식이 160cm의 몸으로
내가 좁혀지니까 답답한 거예요.
그리고 특히
저는 존재 불만족이 정말로
제가 존재 불만족을 느꼈는데
이유를 알게 된 거예요, 공부를 하니까.
존재 불만족의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분 존재 불만족의 이유는
이분법이에요.
사고방식이 이분법이었어요.
이분법이니까
나- 남을 나누고
또 좋다- 나쁘다를 나누고
남자- 여자를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누어서 파악하는
이분법의 사고방식으로 제가 살았더라고요.
나누면
나와 남이 나누고
또 남을 좋은 거 나쁜 거로 나누면
필연적으로 불만족이 생겨요.
왜냐하면
좋은 것은 가지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가져지지 않고
나쁜 것은 없애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없어지지 않아서
항상 불만족 상태에 살 수밖에 없더라.
그리고 놀라운 일은
[이분법]을 [선악과]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굉장히 뿌리 깊은 원재 같은 거다, 이 말이죠.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이분법을 자기도 모르게 철석같이 믿고 살아요, 이분법을.
그리고 이분법을 믿고 사는 한은
무얼 해도 만족스럽지 않아
보세요.
의식은 나누어질까요? 안 나누어질까요?
안 나누어지죠.
이해되죠?
의식은 나누어지지 않잖아요.
놀랍게도 그게 사실이에요.
이 세계는 한계의식이에요.
그래서 이 세계는 나누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이분법의 착각에 빠져서
나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이 세계에서 이 한계를 까먹고
요 몸덩이를 싹 이렇게 귀신같이 이렇게 싹 오려내서
나라고 하면서
이 몸뚱이 바깥을 남이라고
그래서 나와 남을 딱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살아왔어요.
언제부터 했는가?
우리 부모님들이 계속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돼버렸어.
되게 돌아보면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서너 살 때 그게 생긴대요.
그래서 아마 우리 한국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이
세 살 버릇의 핵심이 이분법을 말하는 거죠.
‘나’라고 하는 것이 그때 생겼어요.
이름을 붙여주고 계속 이름을 불렀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이 나인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이름은 이 몸에다가 붙인 이름이죠, 구분해서.
그래서 이 이분법을 극복하는 게 우리 공부라서.
그래서 지금 존재 불만족이 고통이다.
그 존재 불만족의 세계가 고해예요. 고해, 고통의 바다.
그러면 일반인들은 고통의 바닷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사고해를 벗어날 뜻은 내지 않는구나/
어떻게 하면 생사고해를 벗어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에요.
“나는 누구인가?”
기존의 나는, 이분법적인 나는
몸을 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근데 알고 보면, 보세요.
실제 나는 보는 게 나지
보여지는 것은 나가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뜻밖의 몸은 보여져요.
몸은 보여져서 나가 아니에요.
그럼 나는 누구인가?
몸을 보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 몸을 보는 것을 무엇하고 되게 착각하느냐 하면
생각하고 착각해요.
다시 말하면 의식하고 생각을 착각하고 있어요.
근데 달라요, 뭐냐 하면
생각은 보여지는 것이에요.
근데 생각을 보는 것이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이 관계에 철저하기.
처음에 공부하시는 분은
제가 처음에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생각은 현상이고
생각을 보는 의식이 본질이라고 하는 사실에 투철했었어야 해요.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의식을 혼동하고 있어요.
아까 질문도 그래서 나왔을 수 있어요.
생각하고 의식을 혼동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러분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지금 보세요.
바나나 한번 생각해 볼까요? 바나나.
눈앞에 여기 노란 게 이렇게 떠오르죠.
바나나.
그러면 차이가 뭐냐 하면
바나나라고 하는 생각이 이렇게 떠오르잖아요.
그러면 바나나라고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이 공간 자체, 이것은
바나나라고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전부터 있었다? 없었다?
그래서 바나나 대신에 제가 또 다른 말을 할 거예요.
그러면 지금 방금 바나나가 떠오른 공간이 있죠.
그러면 제가 “딴 생각을 해보세요” 하면
바나나는 사라지고 다른 게 떠오르겠죠.
근데 그 공간은 그대로 있겠죠.
맞아요?
그 공간이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공간은 항상 있고,
거기에 경우 따라서, 인연 따라서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가 떠올랐다가 사라져요.
그러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은 현상이고
항상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것은 본질이에요.
실제로 여러분이 보는 삼라만상이 어디서 나타나요?
의식에 지금 나타난 거예요.
그럼 여러분의 의식은
여러분의 몸속에 있지 않고
이 죽비가 지금 여러분의 의식에 이렇게 나타난 거예요.
죽비가 여러분의 의식인 거예요.
여러분의 의식이라고 하는 거에, 인화지에
죽비라고 하는 형상이 이렇게 나타난 거예요.
거울 같으면
거울의 이미지가 찍히잖아요.
그러면 그 이미지가 나타난 곳은 거울이잖아요.
그래서 그 이미지를 잡으면
실제로 가서 거울에 가서 이미지를 탁 잡으면
이미지가 잡혀요? 거울이 잡혀요?
여러분이 죽비를 지금 보고 계시는데
오셔서 딱 잡으면
실제로는 죽비를 잡는 게 아니고
거울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화지를 잡는 거예요.
인화지가 뭐냐?
지금 의식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이 공간이
의식이라는 인화지에요.
거기에 지금 상들이 다 맺혀서 이렇게 드러난 거예요.
부처님이 보니까 새벽별이 반짝이었다.
새벽별이 반짝인 자리가
바로 내 의식이더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삼라만상이 내 의식 속에서 나타나더라.
근데 내 의식이 문을 닫아버리면
삼라만상도 사라지는
나타날 곳이 없으니까
내가 의식을 거두어 버리면
삼라만상도 사라져 버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예요?
/삼라만상이 다 내 의식이다. 이거예요.
일체가 오직 의식이 만든 거다.
일체유심조다.
이게 지금 사실이다. 과학이다. 과학, 과학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보이는 모든 것이
인화지에 나타난 거예요.
그럼 인화지가 뭐냐?
의식이 인화지예요.
인화지 위에 지금 프린팅된 거야. 이게 다.
실제로 있는 거는 인화지, 의식밖에 없어요.
의식 위에 나타난 이미지들이에요.
그러니까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니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영화처럼.
지금 영화 스크린에 영화가 펼쳐지는 것처럼
의식이라고 하는 이 홀로그램 속에
이거는 평면 스크린이 아니고
홀로그램 스크린이에요, 의식은.
이 통으로 다. 360도 다.
이 의식의 홀로그램 스크린 속에
지금 이미지들이 찰라생, 찰라멸하고 있는 게 실상이다.
근데 그 일어나고 있는 그 이미지를
이 의식은 경험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첫 시간하고 연결시켜서 말한다면
이 순간에도 의식이
꿈을, 현상이라고 하는 이 꿈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이 진실에 따라오는 것이 여러분의 공부예요.
제가 평생 제 공부를 돌아보면
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내가 빨리 따라잡는 게 공부였어.
이해되나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은 상태는
질문이 자꾸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 질문을 소화해서 질문이 안 나오게
“저 선생님이 나하고 똑같은 말 하시네” 하고 따라잡고
놀랍게도요, 여러분이 저를 따라잡으시면
여러분 앞에 저보다 더 상위의 선생님이 나타나요.
저는 돌아보면 평생
따라잡으면 그다음 선생님이 탁 알아서 나타나.
그래서 또 따라잡으면 또 나타나
끊임없이 이렇게 발전해 온 게, 제 인생이에요. 희한해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빨리 저를 따라잡으시고
더 상위의 선생님을 만나서.
그러니까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청출, 청_ 푸른색은
어람, 남색에서 나온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제자는 선생에서 나오는데
더 프로, 선생보다
선생님도 프로지만 제자가 더 프로여야 돼요.
그러니까 진정한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어야 돼요.
그래야 발전을 하지.
이 순간, 지금 내 눈앞에, 의식이 꿈을 경험하고 있다.
어디서?
내 눈앞에서.
다시.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이
지금 나를 통해서 의식이
눈앞에 펼쳐지는 이 꿈을 경험하고 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각을 느끼고, 그리고 생각 감정을 하는
그게 전체가 다 의식이 꿈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꿈의 의식은 영향받지 않는다, 경험하고.
그래서 보세요.
이거를 한 번이라도 딱 정말 자기가
이 사실을 알아채면 어떻게 되는가?
꿈을 즐기지, 꿈을 경험만 하지
이 꿈에 의해서 내가 콩딱콩딱 가슴이 막 뛰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육조혜능이 깨달은 내용이에요.
육조혜능이 깨달은 게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건 집착이거든요.
집착하는 바가 없이
이 현상계에 마땅히 집착하는 바가 없이
마음대로 그 의식을 써라, 일으켜라, 살아라.
현상계에 대한 집착 없이, 무
현상계에 대한 집착 없이 살아라.
이게 결론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결론은 [지족]이 나와요.
이 현상계에 내가 좋다 나쁘다 해서
막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이 현상계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살게 되면
거기에서 나는 완전히 지족, 만족할 줄 안다.
아까 제가 존재 불만족,
존재 불만족의 반대말이 지족, 만족할 줄 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게 이루어지는가?
나는 의식이고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은 꿈이라는 걸 알면
의식이 꿈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
나는 이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
자동적으로.
아니 꿈이라는 걸 알면
집착 안 한다니까요.
그러면 나는 마음껏 여기에 뛰어들어서 뒹굴며 살아가는데
고통은 없다.
그리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나는 만족하게 된다. 지족한다.
이게 지금 모든 공부의 끝이에요.
지금 결론이 이렇게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몸을 나라고 하다가
의식이 나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다시 결론
오늘 전체 주제
첫 번째) 본질이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이란
지금 이 순간에도
본질이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게 다다.
이게 유일한 실상이다.
두 번째) 말을 바꿔보면
이 순간 의식이 꿈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만 확실하면
꿈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껏 산다.
꿈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껏 산다.
이게 결론인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껏 살라’고 하는 거지
이게 꿈이니까 허무주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에요.
허무주의에 빠지면 혈거인이 돼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그게 아니에요.
불교의 가르침 그게 아니라
완전히 대자유인으로
이거를 마음껏.
그래서 이 세계는 선물
이 선물을 내가 즐기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 자성의 어두우면 /
자성은 자기의 본질이에요.
자성, 나의 본질
나의 본질은 뭐죠?
나의 본질은 의식이고
의식이 뭐냐?
지금 이 순간
지금 보세요.
몸이 있죠?
몸만 있어요.
몸이 있어요.
몸은 자기가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러면 몸이 있다, 이 말은
벌써 몸이 있다는 걸 아는 의식이 같이 있다.
자기의식을 못 알아채는 대부분의 원인은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에 빠져 있어서.
/만약 생각에 빠져서 자성에 어두우면
복으로, 이 몸이 받는 이 현상 속에서 받는 복으로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이때 구원은 생사의 해결
불교의 구원은 출생사라 그래요.
출생사, 생사로부터 나가는 것.
다른 말로는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말 나온 김에
[복덕]이라는 말이 있고
[공덕]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눈이 매섭다, 이 말은
현상과 본질을 잘 구분한다.
복덕은 현상에서 받는 거
공덕은 본질에서 받는 거예요.
공덕이 있는 사람은 복덕이 따라와요.
복은 인과거든요.
자성이 밝아지면 현상계의 법칙을 파악하게 돼
보여.
그러면 인과에 밝아져요.
그래서 좋은 일을 심으면 좋은 일이 생겨요.
이건 하나의 법칙이잖아요.
요게 밝아진다.
그러니까 공덕이 우선이고, 복덕은 따라온다.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공덕을 기르면 복덕이 따라온다.
어떤 게 공덕을 기르는 건가?
이 순간 의식을 깨달으면
의식을 [무진장]이라고 해요.
무진장이라고 하고
[화수분]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이게 저 화분, 화분이 있는데
거기서 끊임없이 이렇게 나오는 거.
이 세상 모든 것이 의식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냐 하면
여러분이 안 계시면
우주가 없다.
그러면 우주를 누가 만드는가?
여러분이 만들어요.
이때 여러분이 뭐예요?
여러분의 몸이 아니고 의식이에요.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게 여러분의 의식이에요.
당장 오늘 밤에 그 의식이 문을 닫아버리면
이 세계가 완전히 까맣게 사라져 버리죠.
여러분이 아침에 눈 뜨는 게
이 세상을 존재케 하는 거니까
여러분의 의식이
무한대의 공덕을 이 세계에 베풀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거를 [무연보시]라고 해
나하고 인연 있는 것만 나타나게 하는 게 아니라
아무 인연이 없는 것도 다 나타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이 [의식]은
무한대의 자비를 베풀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창조주]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케 하느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데
이 의식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여러분, 이 순간에도 이 세계를 내가 창조하고 있어요.
이때 나는 뭐예요?
몸이 아니라 의식이에요.
지금 당장 여러분 의식이 잠들어버리면
이 세계는 사라진다.
그러니까 참 어마어마한 존재에요.
그러니까 이런 자각이 우리를 키워요.
성숙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책임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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