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다시 한 번
주관에서 객관을 상대하는 것에서
공부가 되면 어떻게 변하느냐 하면
지금 보는 것이, 본질이
객관은 물론이고 주관도 함께 보고 있어요.
다시
지금 빨리 이렇게 안목이 탁 트여야 돼요.
안목이 탁 트여야 된다.
지금 보는 게 뭐냐 할 때
이거를 지금까지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아무개가 이 대상을 본다고 살아요.
거의 대부분이, 99.9%의 인간들은
아무개가 지금 봄꽃을 봄에 꽃이 피는 걸 본다.
이러고 산다는 거예요.
근데 공부를 하게 되면 암묵이 바뀐다.
어떻게 바뀌는가?
아무개가 보는 게 아니고
아무개도 보이는 대상이다.
몸도 보이고, 생각도 보이고, 감정도 보이고
물론 객관 대상은 당연히 보이고.
그러니까 주관이 객관을 보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눈이 딱 뜨여지면
본질이 주관 객관을 통틀어서 현상을 본다.
세계관이
주관이 객관을 상대한다고 하는 세계관에서
본체가 작용, 작용
본질과 현상을 본체와 작용이라는 말을
이건 불교 용어예요.
주객에서 체용으로 눈이 바뀌는 거예요.
그리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금 보는 것이
이게 지금 본질이 보는 거다 이거예요.
이제 본질이 딴 게 아니라
바로 의식이니까
지금 의식이 이렇게 보는 거죠.
이거를 일반 종교 용어로 바꿔보면
내가 부처를 보는 게 아니라
부처가 나를 본다.
이 말 들어옵니까?
이런 게 소화가 돼야 돼.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당연하지” 하는 사람하고
“어? 이거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하는 사람하고 나뉘어요.
그래서 이런 말을 자꾸 들어서
이것이 어느 순간
이런 말을 하나 한 번 들어놓으면
길을 걷다가, 설거지하다가, 청소하다가
“진짜 그러네. 의식이 지금 이 현상세계를 경험하고 있네.”
그리고 의식 입장에서는 현상세계가 념념
념념, 생각 념자가 한 생각 일으키는 시간이라서 찰라거든요.
념념 간에, 찰라찰라 간에, 순간순간마다 돌아보면
실제로는 의식이 지금 이 세계를 본다.
그래서 이거를 잊어먹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께 옛분들이 이런 에피소드를 남겼죠.
당나귀 려, 볼 처, 우물 정
‘당나귀가 우물을 본다’ 하고 제자가 말을 하니까
조산본적 스님이
사실은 이게 아니라
정처려니라.
그러니까 지금 일반인은 공부 과정이
아무개로서 살다가 이런 공부를 만나서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아 정말로 그러네”
뭐냐 하면 “의식이라는 게 있네” 하고 한번
말끝에 한 번 탁 알아챈다 이거예요.
말끝에 한 번 알아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여튼 저는 여러 케이스를 봤네요.
사실 여러분 중에
청소하다가 알아챈 사람도 있고
길 가다가 알아챈 사람도 있고
일하시다가 알아챈 사람도 있고
또 버스 안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알아챈 사람이 여러 분 계시네요, 지금 보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이런 법문을 듣고 계속 궁금해한
“의식이 뭐지?
본질이 본질은 의식이라는데”
그래서 “의식이 뭐지?” 하고 계속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지금 이거, 이게 의식이네” 하고 알아챈다 이거예요.
그 상태를 려처정이라고 한다.
당나귀는 아무개예요.
아무개가 본질을 우물이라고 상징해서 본다.
아무개가 본질을 보았습니다.
대개 초견성이라고
처음으로 견성한, 성품을 보는
이것을 초견성을 려처정이라고 한다.
이걸 가지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을 때
조동종을 창시한, 조산하고 동산 합쳐서 조동종이라고 해요. 묵조선하는.
그 조동종의 조산본적 스님한테
제자가 “당나귀가 우물를 보았습니다, 제가 초결성을 했습니다” 했더니
“그다음 단계의 공부는 한 번 뒤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뒤바뀌는 겁니까?” 하니까
우물이 사실은
여러분 실상은
공부상인의 과정에서는 당나귀가 우물을 보는 거지만
아무개가 의식을 한번
“이게 의식이구나” 하고 알아채는 거지만
한 걸음 더 나가면 실상은
아무개라는 것은 보여지는 당나귀고
실제로는 본질인 의식이 이 순간에
객관 대상은 물론이고
주관조차도 의식이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 몸 보잖아요. 몸 보이죠?
생각도 보이죠?
생각하면 우리가 알잖아요. 생각 내용을.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도 대상으로 우리가 지각하죠?
그러니까 당나귀는 보이는 거다 이거예요.
실제로는 무엇이 보는가?
본질인 의식이 본다.
이 의식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고
부처라고 하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돌아가셨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식은 돌아가시지 않아서
이 부처는 영생한다, 불생불멸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도 ‘자기 몸이 안 죽는다’가 아니고
‘나의 의식이, 나의 본질이 죽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불사를 얻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예요.
이걸 이제 기독교로 말하면
내가 신을 보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이 순간 신이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알던 한 목사님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믿는 거다.
이 말만 알아들어도 깨달음에 들어간다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내가 부처를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부처가 이 눈을 통해서
사실은 나를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말을 한 번 듣고
인식이 전환이 한 번 탁 뒤집어져야 돼.
그러니까 지금 어떤 의미로는
제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왜 반복하느냐?
여러분이 안 뒤집히니까
언제 뒤집힐지 모르니까
계속 반복해서.
그리고 살짝 바쁜 사람도
완전히 탁 뒤집어져야 되는데
오뚜기처럼 뒤집어질듯 하다가 또 도로 들어오더라고
지금 그렇다 이거예요.
이걸 한 번 완전히 딱 뒤집어지게 만들려고
제가 지금 같은 말을 계속
제가 입 아프겠죠.
그러니까 제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도 아시겠죠?
또 제가 알겠죠.
알아도 이렇게 입이 쓰도록
고구_ 쓴 입이 되도록 정녕하게
고구정녕하게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한다.
이치로 알아들었다가 실제로 눈이 바뀌어야 되니까
그래서 이거는 중요한 거예요.
려처정을 혜안이라고 하고, 지혜의 눈
그리고 정처려를 법안이라고 해서
사실은 굉장히 높은 경지예요.
혜안을 뜬 것을 아라한이라고 해요.
그리고 법안을 뜨는 것을 보살이라고 해요.
이게 지금 말은 쉽지만
이렇게 이해하는 거 하고
실제로 눈이 그렇게 바뀌는 거하고 그게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 본질인 의식을 다른 말로, 가장 가까운 말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다.
이거는 약간 조금 더 실감이 나지 않나요?
그래서 이 말 하나만
어느 순간 정말 실감을 딱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여러분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생명 의식이 살잖아요.
이해되세요?
의식은 생명은 크기도 뭐라고 할 수 없고
나한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이 삼라만상이 전체가 다
이 한 개 생명이 다양하게 드러난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생명 자체를 볼 때는
진여문, 진여_ 참되고 여여한 변함없는 문
생명 자체를 볼 때는
그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삼라만상으로 드러날 때는 생멸문.
그래서 항상 기초가 중요하니까
이 세계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한 개 의식이 두 가지 관점으로 보인다, 이 말이에요.
이때 문은 관점, 포인트 오브 뷰
두 개의 관점으로 보인다.
하나는 진여문이고
하나는 생멸문이다.
계속 반복해서, 계속 하여튼
여러분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지금 계속 지금 하고 있어.
이래도 안 깨달을 거냐 하고
그러니까 이치는 이미 대승불교의 초입에
지금 이 말은 벌써 일심이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용수보살 아시죠?
부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한 500년 정도 지나서
예수님하고 거의 시대가 비슷하겠네.
대승불교가 처음에 나올 때
그때 용수보살보다도 스승이에요.
마명보살
마명보살이 일심이문,
대승기신론_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큰 믿음
대승, 큰 수레에 대한
기신, 믿음을 일으키는
론, 부처님 말씀은 경이지만
조사들의 말은 론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딱 이 세 개를
일심이문
한 개 의식인데
한 개의 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두 가지다는 거예요.
이쪽에서 바라보면 가장 좋은 방법은
동전 있죠, 동전.
이런 비유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이런 비유를 안 쓰면
여러분이 본질하고 현상이 끝내 헷갈려요.
이거 뛰어넘기가 어려워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일심은 한 개 의식은 동전 자체.
근데 동전이 앞면하고 뒷면이 있죠.
하나는 숫자고 하나는 그림이잖아요.
그러면 한 개 동전인데 두 면이 있는 것처럼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여지는 것뿐이다 이거죠.
하난데
그럼 한 개의 의식인데
이쪽에서 보면 이게 하나의 생명이고
이쪽에서 보면 삼라만상의 생명이다, 이거예요.
그 한 개의 생명인데
이쪽에서 보면 하나로 보이고
이쪽에서 보면 삼라만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같은 거다 이거예요.
이렇게 되면
본질을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하고
현상을 색이라고 대표적으로 말을 하니까
색과 공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이거를 소화하기는 쉽지 않아요.
이해는 하는데
이 말을 실제로 내가 체감하기에는, 소화해서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때 도움이 되는 비유가
색과 공은
한 개의 의식을
이쪽에서 보면 텅 비어 있어서 공이라고 하고.
근데 그 의식이 이쪽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모든 것으로 나와 있어서
이것도 색이라고 한다, 이거예요.
근데 이게 지금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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