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45] 번뇌를 없애지도,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 주관과 객관은 항상 같이 출현한다

Buddhastudy 2024. 10. 10. 19:17

 

 

본질이 스스로를 주객으로 나누어서

지금 주객이 항상 같이 출현하는 거 아시겠어요?

 

이 세상에 나 없는 세상 없어요.

또 세상 없는 나도 없어요.

항상 이것이 같이 출연해서

같이 출연해야만 경험이 되니까.

 

그래서 이 관계를 부처님은 연기라고

주관과 객관이 연기해서, 서로 의지해서

같이 출연하고, 같이 사라져요.

 

우리가 본질을 깨달을 때도

나중에 본질을 완벽하게 깨달을 때는

의식을 완벽하게 깨달을 때는

주관하고 객관이 같이 사라질 때

완벽하게 깨달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처음 견성할 때는

그냥 현상 안에서 의식이

, 지금 깨어서 보고 듣고 하는 이거구나하고 알아채지만

이 깨달음이 완성될 때는

현상이 둘 다 사라지면서

의식만 정말 탁 남는, 그런 체험이 왔을 때

완벽한 깨달음이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들은 의식이라고 하는 진리를

한 번 의식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의식이라고 하는 진리를 잡아요.

 

진짜 의식은 현상에 속하지 않잖아요.

근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의식을 잡아서

현상에서의 객관 상대로 취급을 해요, 습관적으로.

 

소위 말하는 이 의식이 진리를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본질인 의식을

현상계 안에 객관 대상으로 이걸 위치시켜서

그렇게 함으로써 주관이 존속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주관에 존속하는 방법이

이런 경계 현상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 알고

법을 끌어들여서

객관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법상이라고 해요.

 

에고의 특징은

주관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객관이 있어야 되잖아요.

연기에 의해서.

그러려면 이 현상 대신에

법을, 의식을, 법상으로 만들어서

이것이 의식이겠거니하고 만들어놓고

지도 살아남으려고,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에는 마지막 깨달음은

이 법상을 자각해야 돼요.

 

그래서 의식이니, 진리니, 뭐니, 법이니 하는 것을 늘어놓을 때

주관도 그때 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게 끈질기게 남아 있다가

이 주관이라는 것이 마지막 사라지는 것을

꼭지가 떨어진다고 표현해요, 선에서는.

 

의식을 알아채도

꼭지는 붙어 있어.

그리고 그 의식을 자기도 모르게 법이라고 해서

딱 이렇게 이게 법이다하고

어떤 그 의식에 대한 경험,

그리고 의식에 대한 알음알이

의식은 이런 것이다고 하는 개념

그러니까 의식을 개념화시키고

또 거기다가 체험을 덧붙여서 법상을 만들어서

딱 쥐면서 아상도 살아남아요.

 

그래서 마지막 깨달음으로 갈 때는

, 이거다하는 것을 버려야 돼.

자기도 모르게 이게 진리다 이게 의식이다.” 소위 말해서

하고 이렇게 만들어 둬요, 자기도 모르게.

 

그래서 그거를 알아채고 버릴 때, 법상을 놓을 때

아상도 같이 떨어져.

그게 꼭지가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히 의식이 돼버리는 거죠. 그때는.,

 

이런 과정이 앞으로 공부 과정에서 일어나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놓아라하는 거예요.

놓아라

진리조차도 놓아라.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놓아라.

진리조차도 놓아라.

그래야 손을 딱 떼야지

주관이라고 하는, 에고라는 것이 그때 사라져요.

 

이게 지금 쉽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은 의지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 주관의 습관이 의지하는 것이

뭐라도

그러니까 진리에 의지해.

 

부처를 죽여야 되고, 스승을 죽여야 되고,

어디라도 내가 이렇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쥐고 있고, 의지하고 있고, 기대고 있고 하는 그 심리

그게 에고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사라져야 에고가 사라지기 때문에

연기법, 상대법

또 대대법이라고도 해요. 줄여서 대법이라고도 해요.

항상 이것이 같이 사라질 때가 온다.

 

근데 그렇게 되려면 좀 담대해야 돼요.

정말로 내가 진짜 자유롭고 싶을 때

정말 무엇이라도 쥐지 않을 때

에고도 같이 떨어져 나가고,

완전히 의식으로서 자유가

그때 완전한 자유가 그때 온다.

 

처음에는 이게 의식이구나하고 알아차려야 돼.

이걸 견성이라고 해요.

근데 알아차린 이후에는 그 의식이 계속 깨어 있어야지.

그래서 낯선 의식이 자꾸 익숙해진다.

 

그래서 이게 의식이라는 걸 발견한 뒤에

의식으로 깨어 있는 힘이 길러져서

아주 예리하게 합리화된 집착, 이해됐어요?

그런 것까지 보게 되어서 놓을 때.

세간에도 집착하지 않고, 출세간에도 집착하지 않고

번뇌라고 해서 없애지도 않고, 도라고 해서 구하지도 않고

이렇게 되었을 때 양쪽을 같이 놓아버린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가 되는.

 

둘 다 놓았을 때를 동그라미

이런 상이라고 해요.

둘 다 놓았을 때를.

 

그러니까 그런 체험이 쭉 공부 과정에서 일어나니까

이게 의식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는

그 의식을 계속 각성의 힘을 길러가는 것.

그러다가 마지막 자기 허물

나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는

나중에는 법에 집착하는, 그것까지도 놓는다.

 

법에 집착하는 그 상태를 벽척간두

또 현애, 절벽에서 돌뿌리를 붙잡고 있는 것,

그거를 놓는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한다.

현애를 살수한다. 놓을 살, 손 수.

그 공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공부가 익어 들어가니까

하여튼 먼저 견성부터 해야 돼요.

일단 의식을 발견해야 돼요.

 

견성하고

그리고 법에 대한 집착조차도 놓을 때까지

그게 시간이 좀 걸려요.

그 시간을 잘 견디는 게 제일 중요해요.

 

봤다고 해서 끝이 아니고

그때부터 시작이고

그래서 세밀하게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 녹게 될 때까지, 푹 쉬게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게 공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신수 스님의 게송.

이게 있어야

나중에 육조 혜능의 게송이

이것을 비추어서 빛이 나요.

항상 그래요.

 

그래서 보겠습니다.

뭐라고 썼느냐?

오른쪽 한자를 보세요.

 

(신시 보리수)

마음은 시이다. 보리, 깨달음의 수 나무다.

몸은 신, 몸은 보리의 나무다. 깨달음의 나무다. 보리수다.

심여, 마음은 같다.

명경 밝은 거울 대는 경대하죠.

어머니도 경대 썼잖아요. 거울에 대가 있잖아요.

그래서 명경대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다 할 때

이때 마음은 생멸심이죠.

 

몸은 보리수, 마음은 명경대할 때

몸과 마음은 둘 다 현상에서의 몸과 마음이에요.

이 몸과 마음을 합쳐서

주관, 즉 에고, 즉 아상이 형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현상에서의 나

몸과 마음

이거를 (시시)때때로

(), 부지런히

(불식), 털고 닦자, 이 말이에요.

 

여러분, 지금 보세요.

법칙이

본질인 의식은 텅 비어 있어요.

그래서 이걸 공이라고 해요.

불교에서 []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인 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본질인 의식은 텅 비어 있어서

이것은 때가 묻지 않아요.

근데 이것이 현상으로 나타나면

현상에서의 주관은...

 

여러분, 현상에서의 ,객관이 있잖아요.

중요한 것

본질인 의식은 스스로는 경험되지 않아요.

이해되세요?

텅 비어 있고, 또 자기밖에 없어서

자기가 자기를 경험할 수가 없어.

자기 밖에 없기 때문에.

 

근데 자기가 경험하고 싶어서 현상계를 만들었죠.

자기를 쪼개서, 자기를 주관, 객관으로 나누어서 현상계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경험하려면

경험의 법칙은

[연기]라고 하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이에요.

[의식]은 본질인 의식은 [절대]지만

지금 이 [현상][상대]예요.

상대의 법칙은 높다 낮다, 크다 작다, 남자다 여자다, 잘 났다 못 났다.

온갖 이런 상대가 이 현상계의 법칙이에요.

그래야 경험하지.

 

여러분 의식 입장에서는

놀라운 게

나쁜 놈이 있어야지 좋은 놈도 있지.

나쁜 놈 없이 좋은 놈만 있으면

그 좋은 놈이 좋은 놈이 아니에요.

이해되세요?

 

항상 좋은 걸 경험하고 싶을 때는

좋은 것만큼 나쁜 것을 만들어.

그래서 이 세상은 상대세계이고

이 절대인 의식이 경험할 때는

반드시 빛과 어둠을 같이 만들어서

이걸 같이 경험해야 만 이게 재미있어.

 

그러니까 캐릭터는 죽을 노릇이지.

근데 캐릭터가 자기가 캐릭터인 줄 알면

죽을 노릇이 아니지.

근데 자기가 자기인 줄 알면 그거는 힘들죠.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현상계는 어차피 상대계예요.

그래서 상대계 안에는 좋다 나쁘다가 같이 있어.

이게 하나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현상계 안에서 좋다 나쁘다를

나쁘다를 없애서 좋은 것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현상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거예요.

 

그러면 현상계에서의 주관도

좋다 나쁘다가 같이 있을까요? 좋은 것만 있을까요?

같이 있겠죠.

이게 현상계의 법칙이에요.

 

주관도 좋다 나쁘다 같이 있고

객관도 좋다 나쁘다가 같이 있어.

 

여러분 게임이

주인공만큼 강한

빌런이, 빌런은 악당이에요.

게임에 주인공만큼 강한 빌런이 나와야 재미있어.

근데 주인공은 강한데

상대방이 어린아이 같으면

게임 하나도 재미없는 거예요.

이게 레벨이 안 올라가, 게임 레벨이.

이해되세요?

 

게임 레벨이 올라가려면

막강한 적이 나타나야 돼.

현상계의 상대성을

어둠을 없애고, 빛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부처님 6년 고행이

현상계의 정화를 위해서 정말 철저하게 했죠.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었는데

마음을 정화하려고 선정삼매를 닦았고

그래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야.

안 될 수밖에 없는 법칙이

그리고 몸을 정화하려고 고행을 했어요.

 

근데 둘 다 실패했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현상계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포기했어.

 

뜻밖에도 현상계는 본래 그런 거야.

근데 본질은 그냥 청정해.

본질은 본래 청정해.

근데 나는 현상이에요? 본질이에요?

 

진짜 나는 본질이 나잖아요.

의식이 나잖아요.

의식은 더럽혀지지 않아요, 이 현상계에.

 

그러니까 나는 나를 정화하려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려고

죽을동 살동했는데

부처님이 뱃가죽하고 등가죽이 붙을 정도로

정말 죽을동 살동했는데

이게 다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였구나.

이 범주 오류를 내가 범한

차원을 내가 오해한 거구나.

 

그래서 다 놓았을 때

자기가 의식인 본질을 깨달았을 때

뜻밖에도 완벽한 청정인 거예요, 본질은.

 

어느 정도 완벽하냐?

불생불사야.

본질로서의 나는 불생불사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