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뭐 하자는 거냐?
“오직 견성 뿐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여튼 우리 공부의 처음 시작은 고통이에요.
[인생의 고통]
부처님께서도 불교의 모든 성재, 성스러운 진리의 1번이
고통이라고 했어요.
고성재, 고통이 성스러운 진리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입문해요.
이 마음공부의 세계로
고통을 통해서 입문한다.
그래서 고통인데 고통의 핵심은
생로병사
근데 그 생로병사가 결국은
우리한테는 번뇌라고 하는
생로병사가 번뇌라고 하는 고통을 일으킨다.
그러면 그 번뇌가 왜 생기는가?
이걸 추적하는 게 불교적인 입장이에요.
왜냐하면 부처님이 그러셨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닫고
계속 이 문제를 숙고해서 불교 체계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고통의 원인이 번뇌구나.
번뇌가 왜 생기는가?
사랑하고 미워하니까 생기는구나.
그리고 왜 사랑하고 미워하느냐?
이게 나라고 하는 데 대한 착각이
그것 때문에 사랑하고 미워하게 되는구나.
나라고 하는 착각이 보통 사람은
현상에서의 나를 나라고 해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본질의 나를 깨달았어요.
부처님이 뭘 깨달았는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뭐냐?
본질의 나를 깨달았다 이거예요.
여기서 性이, ‘견성뿐’ 할 때 성이
정확히 말하면 본질의 나예요.
본질의 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추적해 봤더니
본질의 나를 모르고
현상의 나를 나라고 착각한 것이
그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구나.
첫 단추,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무명이라고 불렀는데
부처님은 무명, 밝지 않다
밝지 않다는 건 뭐냐?
착각이다.
진짜 나는 본질의 나인데
현상의 나를 나로 알아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구나.
생로병사는 현상의 나가 겪는 거예요.
깨닫고 나니까
본질에 나는 생로병사가 없어.
그래서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했어요.
불교는 생로병사라고 하는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깨달았더니
나는 현상의 나가 아니고 본질의 나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예요.
불심할 때, 부처가 곧 의식이다 이거예요.
의식이 본질의 나다, 이거예요.
부처는 곧 의식이고
의식이 성품, 본질의 나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본질의 나가 진짜 나인데
이 나가 본질로 의식으로만 있으면
의식은 크기가 없고요, 모양도 없고
그리고 이것은 생겼다가 사라지지도 않아요.
의식은, 의식 자체는.
그래서 그걸로 가만히 있으면
의식은 아무 문제가 없어, 한마디로 말해서.
근데 왜 이 현상계를 만들어서
그래서 의식을 본질이라고 해요.
근데 이 본질인 의식이
왜 이 현상계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현상계 안에 있는 우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하는 이 문제가
보면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의식이 의식으로만 있으면
이건 절대예요.
절대라는 말은
절대, 상대가 끊어졌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의식 하나밖에 없어.
의식이 절대예요.
그러면 절대로서의 의식이
그냥 자기 혼자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고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문제 없는 거예요.
본질인 의식이 절대인데
절대가 곧 전체고.
근데 이 의식이 자기만 가만히 있으면
너무너무 심심해서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체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자기를 체험하려면
반드시 둘이 되어야만, 상대가 되어야만 체험이 일어나요.
하나의 절대가 자기를 체험하려면
둘로 나누어야만 해.
이해돼요?
그래서 상대 세계를 만든 거예요.
상대 세계가
전체는 절대인데, 자기를 둘로 나누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나누는가?
체험하려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눈 거예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체험이 안 일어나.
그래서 이 상대세계를 만들면서
이 상대세계의 구조를
주관과 객관으로 만들었어요.
이 현상계의 법칙이
주관 객관이 있어야만이 현상계가 성립해요.
이해되나요?
절대인 의식이 자기를 체험하려면
자기를 나누어야만
상대적으로 체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를 나누는 방식이 주관과 객관이에요.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연기]라고 해요.
이 현상계의 법칙은 연기법인데
연기법이라는 말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긴다예요.
그러면 주관이 생기면 객관이 생기고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다.
상황 이해되죠?
그러니까 절대가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너무 심심해서
자기를 딱 나누어서 상대를 만들었어.
그럼 자기는 누구냐?
절대면서 상대예요.
두 면을 가지고 있어.
동전이 두 면이듯이
실체는 하나인데 두 면을 가지고 있듯이
이 절대가 절대면서 상대를 한쪽 면에다가 상대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의 면과 상대의 면이 있는데
하나의 의식이에요.
이 의식이 자기를 나누어서
주관을 만들고 객관을 만들었어.
지금 이 순간 보세요.
소리 들립니까?
죽비 보세요.
죽비를 보는 것이
여러분 죽비를 보는 것이 이게 뭘 뜻하느냐면
절대인 의식이
여러분이라고 하는 그 주관을 통해서
객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이 세계의 실상을 딱 떨어지게 말을 해본다면
절대적인 의식이
심심해서
자기를 나누었어, 자기를 경험하려고.
나누어서, 주관하고 객관으로 나누어 놓고
주관을 통해서 객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이해되셨나요?
그게 지금 우리 세계의 구조예요.
이 세계의 실상이에요.
/지금 모든 깨달은 사람이 밝혀낸 이 세계의 실상은
한 개 절대 의식이
지금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놓고
현상계를 만들고
현상계의 구성 요소를 주관과 객관으로 만들어 놓고
주관을 통해서 객관을 경험하고 있는 것/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이 순간 나를 통해서.
실제로 보는 것은 의식이 보는 거예요.
마치 꿈을 꿀 때
꿈이라고 하는 꿈 안에도 항상 주관이 있어요.
꿈속에 나 있는 거 기억하세요?
꿈속에 항상 나가 등장해요.
그것이 없으면 꿈이 성립이 안 돼.
꿈이라고 하는 현상도 똑같은 원리로
꿈속에 내가 반드시 나와요.
그리고 그 내가 객관을 상대하고 있어.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꿈속에 등장하는 그 나가 아니고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바로 판명 하는 게
꿈속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꿈을 깨면 꿈속에 나는 사라지는데
꿈속의 내용은 기억이 돼.
이 말은 의식이 기억한다는 소리예요.
꿈속에 나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꿈속에 나가 사라지면서 기억도 같이 사라져야 되잖아요.
근데 아니야.
기억을 해, 우리가.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꿈속에 나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을 기억한다, 이 말은
경험을 꿈속의 나가 꿈을 경험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을 경험하는 거다.
이거는 논리적이잖아요.
그러면 똑같다, 지금도
실상은 뭔가?
우리의 본질은 의식이에요.
이 의식이 몸하고, 감각기관이 달린 몸하고
그리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오온이라고 하는
색수상행식의 그 무더기들을 모아서 주관이 형성된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부처님이 깨닫고 난 뒤 하는 이야기니까
가장 신빙성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상대하는 이 객관세계.
그래서 주관과 객관, 요것으로 현상계가 벌어진다.
그러면 견성이 왜 중요하냐면
절대인 의식이
실제로는 이 현상, 자기를 나누어서
절대적인 의식이 자기를 나누어서
주관을 만들고 객관을 만들어서
주관을 통해서 이 객관을 경험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오케이입니까?
그러면 이것을 알게 되면
현상계는 꿈과 같아서
현상계 속에 등장하는 나가, 주관이
실제로는 주관이 사는 게 아니고
주관을 통해서 절대적인 의식이 사는 거예요.
의식이 지금 이 현상을
김 아무개를 통해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김 아무개가 사는 게 아니고
김 아무개는 꿈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 꿈을 형성시키는, 꿈을 만드는
하나의 캐릭터 같은 존재예요.
근데 그 캐릭터를 통해서
의식이 이 현상계를 경험하고 있어.
이게 지금 사실이에요.
근데 이 본질인 의식을 모르면
우리는 꼼짝없이 현상계 속에서
주관을, 캐릭터를 나라고 하고 살 수밖에 없다.
이게 지금 무명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실상은 무엇인가? 실제로는 무엇인가?
나는 본질인 의식이고
이 본질인 의식이 현상이라고 하는 게임을 하고 있어.
게임하려면 반드시 주관이라고 하는 캐릭터를 만들어야 돼.
그걸 통해서 이 객관 현상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점을 우리가 알아차린다면
모든 고통은
주관을 나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말 이해됩니까?
잘못 착각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이걸 바로잡으려면
나는 절대인 의식이고
이 의식이 주관이라고 하는 캐릭터를 통해서
객관을 지금 경험하고 있어서
뜻밖에도 이 현상계 속에 나타난 주관이라고 하는 캐릭터가 아니고
뜻밖에도 나는 의식이다, 이거예요.
의식은 현상계로부터 물들지 않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생로병사가 부처님의 화두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가?
생로병사하는 그것은 캐릭터구나.
이 현상계에 나타나는 캐릭터구나.
그러니까 부처님이 생로병사를 해결한 것은
“아, 나는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나는 캐릭터구나.
캐릭터는 당연히 죽어야지.
근데 실제로는 나는 캐릭터를 통하여
이 현상계를 경험하는
생기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의식 자체가 나구나” 하고 깨달은 거예요.
그 깨달음을 딱 깨달을 때는
샛별이 딱 떴는데
샛별이 이 의식 속에서 나는 다 현상이다, 이거예요.
저 샛별을 내가 체험하려고, 저걸 경험하려고
이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캐릭터를 통해서
지금 내가 저 샛별을 경험하고 있는 거구나.
이 모든 것이
의식인 나가
주관 객관으로 연기해서 이 세계를 펼치고 있구나.
이걸 깨달았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닫고 난 뒤 첫 마디가
부처님이 출가한 목적은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래서 깨닫고 나니까 첫마디가
“나는 불사를 얻었다.”
이때 나는, 부처님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아니고
의식으로서의 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식의 나는 불생불사다 이거예요.
그리고 깨닫고 보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똑같구나, 이것이.
그러면 그 2500년 전에 시타르타 태자한테서 그 수행자한테서 일어난 이 사건이
지금 우리들한테는 관계가 없는 거냐?
그 의식이, 그때는 싯다르타를 통해서 경험했고
지금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지금,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거예요.
지금 보는 것이, 의식이 보는 거예요.
여러분, 의식이 보는 거예요.
의식이 듣는 거예요.
여기 보세요.
부처님 포즈가 어때요?
오른손가락을 축지, 땅에다 대고 있어.
이게 뭐냐?
땅을 댈 때 느낌이 있어요? 없어요?
그 느끼는 것이 본질인 의식이다, 이거예요.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주체는
이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견성
내가 본질인 사실을 발견하는 것.
견은 발견할 견.
이때의 발견을 ‘깨닫는다’고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즉각적인 깨달음이지
이렇게 이해해서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일종의 초월이 있는 거야.
이때 초월은 뭐냐 하면
현상과 본질 사이의 차원이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본질을 깨달을 때는 언제나 초월이 일어나.
정말 형이상
형, 모양 이상의, 이 본질에 대해서
어떤 직관,
이 직관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 세계가
지금 그런 깨달음을
여러분, 부처님 이후에
가장 통쾌하게 깨달은 사람이 육조 혜능이에요.
나무꾼이고, 학력도 없고,
그러니까 글자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걸 깨달았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전 세계가 지금 육조를 배우고 있다.
육조 혜능을 지금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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