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49] 생각이라는 윤회를 벗어날 때 | 불이법(不二法)이 기준이다

Buddhastudy 2024. 10. 24. 19:41

 

 

마음 자를

서양인들은 의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본질은 의식이라고 하고

본질은 consciousness, awareness

이런 의식이라는 말로 본질을 나타내고

 

현상으로서의 마음은 변덕스러운 마음이거든요.

엿장수 마음 같은 거.

근데 그거의 정확한 말은 [분별심]이죠.

현상으로서의 생각

[생각][감정]을 나타내는 이 분별심은

이제 몽키 마인드라고 해서 마인드라고 해요.

 

그러니까 서양에서는 마음 자 하나를

현상과 본질로 딱 갈라서 사용하고 있어서

우리도 공부할 때 분명하게

견성한다 할 때 성은 본질 성자고

이건 의식을 말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견성이 의식을 발견한다.

 

그러면 견성을 할 때

육조스님이 강조하는 견성은

지금 우리가 육조단경을 공부하니까

육조단경 공부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여러분 중요해요.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방법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목표가 견성이 되면 안 돼요.

육조단경은 견성하고 공부를 해야 돼.

그래야 육조단경의 육조혜능의 말이 아니라

내 말이 돼요.

 

이거는 나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있구나하고

완전히 이심전심으로 이걸 다 납득이 되는, 소화가 되는.

그런데 문제는

견성이 어렵다면 이런 말이 좀 허황되게 느껴지겠지만

견성이 어렵지 않아요.

견성은 누구나 본래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지금 관점의 차이예요.

 

육조스님의 관점은

견성은 누구나 본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고 한번 돌아보면 돼.

자기가 견성 상태라는 것을 돌아보면 되는 거예요.

 

돌아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게

지금 몸이 있습니까?”

여러분, 몸이 있나요?”

몸이 있다는 걸 아는 것도 있죠.

 

몸은 물질이니까

물질인 몸이

물질이 물질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아니죠.

 

지금 죽비가 물질인데

죽비가 자기 스스로 죽비가 있다는 걸 죽비는 알 수 없지요. 그죠?

그러면 죽비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아는가?

나의, 우리 각자의 의식을 통해서 지금 죽비가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죠?

 

그러면 죽비처럼 우리 몸도 여기 있어요. 그죠?

그러면 몸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당장 증명하고 있어요.

뭘 증명하느냐?

나의 의식을 증명하고 있어요. 맞나요?

 

그래서 어려운 게 아니고

이런 말 들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알아들으면 돼.

이게 이걸 말귀 통한다 그러잖아요.

 

지금 엠블런스가 고맙게도 울려주고 있죠.

앰블란스 왱왱하는 걸 듣는 거

뭐가 들어요?

의식이 듣잖아요.

 

큰스님들 결제할 때,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 들어서

한번 자세하게, 자상하게 혹시 안 보일까 봐

저 구석에 있는 사람한테까지도 이렇게 눈 다 맞추면서

이렇게 보여주는 것

우리 흔히 보죠.

이게 뭐겠어요?

여러분한테 이렇게 보여주는 게

이걸 보는 의식을 자각하라” “한번 확인하라이 말이죠.

다시 말하면 견성하라이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죽비를 들어서 한번 이렇게 보여주는 것은

견성하라는 뜻이에요.

견성은

_ 자기 본질, 본질은 마음 말고 의식

변하는 생각 감정 말고 의식, 깨어 있죠?

그래서 이 의식이 모든 것의 근거예요.

모든 존재의 근거예요.

맞습니까?

 

여러분 의식 없으면

이 죽비가 이렇게 인식되지 않겠죠?

 

죽비가 인식되지 않는다.”

이 말 속에 한번 보세요.

여러분의 의식에 의해서 죽비가 인식되죠.

그럼, 이 죽비의 정체는

죽비는 죽비가 아니라 이름이 죽비일 뿐이고

실제 죽비의 정체는

여러분의 의식이

이것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죽비는 식이에요, .

 

유식무경 唯識無境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의 결론이거든요.

유식_ 오직 식이 있지

무경_ 경계는 없다.

죽비가 하나의 경계거든요.

경계는 대상, 객관 대상.

 

그러니까 객관 대상만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의 의식이 인식을 해줌으로써

이것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이 죽비의 정체는 말로 하자면

이게 입자로 돼 있잖아요.

분자, 원자, 뭐 어디까지 분석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입자죠.

그럼, 이 입자 상태로 보는 건 아니잖아요.

이걸 죽비로 보는 것은

벌써 우리의 의식이 이렇게 인식해 놓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인식된 상태를 보는 거지

입자를 보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죽비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 밖에 촉촉한 은행 나뭇잎

요즘 은행 나뭇잎도 요즘 참 이쁘죠, 그죠?

요즘 난리 났어요.

활엽수가 새로 돋우면 올리브그린색이고

그리고 이렇게 은행나무처럼 저거는 뭐라 그럴까? 레몬그린이고

그게 막 어우러지니까 실록이 참 기가 막히죠.

 

그러면 저런 것을 봐 내는 것이

쟤들이 저런 칼라라는 걸 보는 것이

쟤한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의식이 지금 저렇게 연출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유식_ 오직 식만 있고

경계_ 객관 대상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우리가 보는 거, 듣는 거, 냄새 맡는 거, 맛을 보는 거, 이런 촉감까지 다 포함해서

그리고 생각까지 포함해서

생각, 감정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식이지, 그게 어떤 객관 물질은 아니라는 거예요.

 

눈이 자꾸 매서워지면

큰 스님이 설법하실 때 주장자 들어서 보여주고

혹시 이것만 가지고 모자랄까 봐

한번 쳐주면 소리가 나잖아요.

그럼 소리도

소리 자체가 존재하려면

그 소리를 들어서

, 저게 죽비하고 책상이 만나는 소리구나하고

소리의 컬러까지 즉각 파악해 내죠.

제 목소리하고 이 소리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소리들도 그 미묘한 파동까지 컬러를 다 분석해 자동적으로 하는

자동적으로 하는 것이 부처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성은 불이다.

육조 스님의 사상은

자성불_ 자기 본질이 곧 부처다.

 

지금 이렇게 앉아 계시면

의식이 있나요? 의식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멈춰야 돼.

의식이 있다는 자각이 있잖아요.

거기서 멈춰야 돼요.

 

근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러면 이 의식이 어떻지?” 하고 확인하려고 하면

오리무중이에요.

 

왜냐하면 죽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객관 대상화로 파악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보조국사가 그토록 노파심에서

본질인 자기의식은

객관 대상으로 파악해서 알 수는 없다.

 

단지불회 但知不會

불회_ 객관 대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지_ 다만 안다면

시즉견성_ 그것이 견성이라는 거예요.

 

견성은

자기의식을 객관 대상으로 해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이런 말을 듣고

은하에 스스로 탁 알아채는 거예요.

말귀 열리는 거예요.

말귀 열린다, 이런 말 제가 처음 쓰네.

지금 들어옵니까?

 

여기서, 그런데 우리는 분별심이

습관적으로 여기에다가 토를 달아

뭐지?” 하든지,

화두도 그렇게 들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뭐지?” 하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지.

 

요즘은 새로운 시대가 열려서

금방금방 알아듣고

깨달음의 내용은 같아요.

 

황벽스님이 아주 강조한 대목이에요.

10, 20년 참구하다가 깨닫는 거나

만나자마자 탁 알아들어서 깨닫는 거나

깨달음의 내용은 같다.

 

근데 그 깨달음의 내용을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는 강도는

오랫동안 궁금해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몰라서 애달파 하다가 알면

이 가치를 아주 뼛속 깊이 새기기 때문에

법의 소중함을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을 쓴다.

 

근데 그렇지 않고

한 번 만나고 떠나는 인연한테는

그 사람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바로 그냥 일러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런 수업시간에

여러분 의식이 있어요?”

제가 수업시간에

여러분, 의식 있어요?” 하고 계속 물으면

의식이 확인되는 사람이 있고, 확인 안 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 자리에도.

 

확인되는 사람은 또 잊어버렸던 걸 또다시 확인 할 거고

확인 안 되는 사람한테는

여러분 의식이 있습니다하면

그 말이 화가 나, 보골이 나.

 

아니 있다는데, 옆 사람들은 끄덕끄덕하는데

나는 지금 뭔가가 이 소화가 안 돼

말귀는 알아듣겠는데, 이게 시원해지지 않아.

그러면 이 수업 자체가 일종의 간화선 수행의 진행인 거예요.

궁금해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러니까 의식입니다할 때

그 의식을 확인한 사람은 이렇게 끄덕끄덕할 거고

확인 못 한 사람은

자꾸 뭔가가 데미지를 입어

이 말이 말 펀치가 돼서.

그냥 이겁니다.” 이러면

여러분 보골난다니까.

저 사람은 도대체 뭘 알고 있길래 이겁니다이러지?”

잘못하면 죽비가 뭔가가 있나 보다하고

처음에는 그런다고요. 영락없이 그래요.

근데 그런 기간을 거친다 이거예요.

근데 깨닫는 내용은

결국은 이걸 깨닫는 거다. 자기의식을 깨닫는 거다.

 

그래서 하여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여러분 보세요.

여기서 해보십시다

할 때마다 하여튼 두드려야 되니까.

 

자기의식이 자극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자기의식이 자극되는 사람하고

자기의식이 자극 안 되는 사람?

모든 사람이 자기의식을 자각하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보세요.

자기의식이 자각되는 사람은 손들었죠.

그러면 자기의식이 자각된다고 손든 그것이 의식이죠.

맞아요?

 

그리고 저는 지금 뭔가가 이 의식에 대한 감이 아직 부족해서

함부로 내가 의식이 된다고

좀 양심적인 분들은 말귀는 알아들어도

그래도 나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손을 들었다 이거야

나는 아직까지 의식의 자각이 안 됩니다하고 손을 들었다 이거예요.

그럼, 손을 들은 그거다, 이거예요.

 

의식입니다하는 것도 의식이고

의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하는 것도 그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100% 이거다 이거예요, 100%.

오직 견성이 중요한 것은

확인한 사람한테는 자기만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길 지나가는 사람도 모조리 다 의식으로...

그리고 웃고 울고 하잖아요.

그 웃는 거 보면

, 진짜 저 의식이 막 살아서 약동하네, 아름답네.”

 

그런데 또 노숙자가 푹 이러고 있으면

저거 저 같은 의식인데, 저 사람은 저걸 모르고

지금 자기가 천하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이러고 있네.”

 

하여튼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자기의식이라는 것이

여러분, 이 순간 자기의식이 자각됩니까?

그리고 자각 안 됩니까?

 

보세요.

자각하는 것도 의식이고

자각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의식이라서

의식이 없을 수가 없어요.

 

의식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어서

새로 얻을 수도 없고

그리고 이거를 잃어버릴 수도 없어요.

 

견성이 중요한 이유는

철저하게 견성하면

이 성품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 확인이 돼요.

 

알아차리시면

안다고 해도 아는 그거고

모른다고 해도 모르는 그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심하게 말하면

깨어 있을 때도 의식이 다 있죠. 그죠?

아니 지금 움직이는 거 하나, 이거야.

지금 시대가 변해서

제가 이렇게 말해도 막힐 사람은 또 막히더라고.

 

그러니까 막히세요.

끙끙대다가 이런 말을 듣고

수업 때마다 할 거니까, 앞으로도.

그래서 한 번 이렇게 탁 여러분이 정신 차려서

바로 알아채면 그놈이에요.

 

근데 깨닫고 나면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요.

지금 따라오시나요?

 

간화선에서 꽉 막히게 해서 궁금증을 일으키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터뜨려서 이걸 잊지 못하게 강하게 심어주는 방법이

왜 했는가도 이해가 된다고요.

 

너무 또 쉽게 알면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하면서 또 소홀히 해서

그러다가 돌아보면

그때는 분명했는데 왜 지금은 분명하지 않지?” 또 그런다고요.

 

여러분

지금은 분명하지 않지?” 하는 것도 의식이에요? 아니에요?

의식이잖아요.

근데 이 의식이

우리의 분별심의 습관은 강해요.

그래서 분별심이

의식을 대상으로 파악해서 소유하려고 해요.

이해돼요?

 

분별심이

의식을 대상화해서

파악을 해서

탁 잡으려고 해요.

그걸 잡아서 소유하려고 해요.

 

분별심은 에고잖아요.

왜 그러겠어요?

이것을 탁 해서

자기가 깨달은 에고가 되려고.

이해되나요?

우리 100% 다 그래요. 똑같아요.

 

우리 안에 있는 에고가

다시 이것을 이거다라고 대상화해서

대상화하는 방법이 열심히 필기하는 거야.

열심히 필기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초지종을

의식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자초지정을 딱 해서

그걸 또 대상화해서 소유하려고 해요.

그만큼 분별심은 강한 거야.

 

깨달아도

다시 분별심이 이것을 또 요리를 해.

그래서 법이라고 딱 만들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이라고 하는 것을

허공에다가 법이라고 하는 탑을 멋진 탑을 세워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퍼드가 돼가서 지키고 있어.

이게 법이다하고

나는 법을 소유하고 있다.”

너희들은 없지? 난 이렇게 멋있는 법이 있어하고 으르렁거려요.

시비를 해, 법을 가지고.

 

 

 

그러면 보세요.

이제 의식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다음은 뭐냐 하면

의식을 알아들었으면

이 본질을 자기도 모르게

뭐다라고 법상을 짓는 것이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해요.

 

의식을 알아들은 사람이

거기서 끝이 아니고

의식은 뭐다.

 

그래서 책을 보면

본래 있는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다

이런 말 책에 있잖아요.

그러면 또 개념으로 그런 식으로 해서

쥐고 안 놓치려고 해.

근데 잡았다 놓쳤다 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니 대부분이

알아채고 난 뒤에는 잡았다가 놓쳤다 게임을 또 시작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소를 친다고 해, 사실은.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 하면

[불이법]이라고 하는

불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에요.

[진리는 불이]라고 하는 게 하나의 원칙이에요.

 

그래서 의식을 알아챈 사람한테는

그다음에 약이 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불이不二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만약에 의식 그러면 제가 방금 의식이라는 말 썼잖아요.

그럼 여러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의식, 의식, 의식, 의식

이렇게 된다고요.

그리고 그 의식은 크기가 없고, 모양이 없고,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이런 걸 계속 되뇌면서

그 의식을 자기가 확보하려고 자꾸 애를 쓰게 돼요.

제 말 맞죠?

 

여러분, 육조단경에서 초지일관 말하는 게

자성이 부처다이 말이거든요.

맞아요?

그러면 자성불 사상해서

육조단경에 이거를 일목요연하게 쫙 해서 이걸 가지고 있는 거하고

그게 법이냐?” 하고

지금 그거를 보건 안 보건

지금 살아있는 이게 법이냐?” 할 때

자성불이 이거예요?

아니면 그 도표 속에 있는 체계화된 그 이론이에요?

어떤 게 진짜예요?

 

지금 이게 진짜잖아요.

근데 이게 진짜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분별 습관이 그렇게 해요.

자기도 모르게 이것이 법이다라고 쥐고 있어요.

 

제가 걱정하는 거는

제가 의식이라고 해놓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제 말에

의식이라는 말에 또 속을까?

 

의식을 대상화해서 이런 것이다라고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를 들면

실상염불 實相念佛 이러잖아요.

염불할 때도 실상염불을 해야 한다.

 

이때 실상염불은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할 때

나무아미타불을 정말 많은분들이 하시죠.

불자들이라면.

 

이때 부처님의 유훈대로

나무아미타불을 할 때 자귀의를 하면서.

자귀의, 법귀의 그러잖아요.

 

진정한 자기가 법이거든.

자기한테 귀의한다는 말은

법에 귀의하는 말인데

진정하게 법에 귀의하려면

자기한테 귀의해야만이 진짜다 이 말이죠.

부처님 말씀도.

 

그러면 아미타불이

나무_ 귀의한다는 뜻이에요.

아미타불에게 귀한다 이 말을

나무아미타불 할 때

아미타불을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내가 나무아미타불 하는 거 하고

그러면 이법이 된다는 거예요.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나가 있잖아요.

그러면 나하고 아미타불이

두 개가 있잖아요.

 

화두도 진짜 화두는

이 뭐꼬?”도 보세요.

이 뭐꼬?”

나하고

이것이 무엇인가?”잖아요. “이 뭐꼬?”.

 

제가 이것이 무엇인가?” 할 때

내가 있고 이것이 무엇인가?” 할 때 이것이 있으면

두 조각이 났잖아요.

진짜 화두도 이 뭐꼬?”할 때는

내가 이 뭐꼬?”하면

이미 두 조각이 난 상태라서

진짜 화두가 아닌 거지.

가화두 때 할 수 없이 모르니까,

그때 가화두다 이거야.

진화두는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뭐꼬?” 화두도

자기가 이에요.

그럼 자기가 이렇게 자각이 되잖아요.

 

다시

의식이 의식을, 본질이 본질을 의식하잖아요.

이게 이 뭐꼬?”라는

두 조각이 안 난다 이거예요.

 

근데 이 뭐꼬?”하고 떠올려서

이 뭐꼬?”라고 떠올린 그 한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이거는 이미 두 조각 난 상태에서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놈이

이미 벌어져 있잖아요.

그거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진짜 화두는

내가 화두를 들지 않아도

자기를 의식하는 거지

이거를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라고 하는 거지.

 

진짜 화두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쉬워야 돼.

그냥 있으면 자기가 자각된다 이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심정을 딴 데 안 팔면

스스로 자기가 있다는 것이 자각이 된다 이거예요.

그게 이 뭐꼬?” 상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행주좌와어묵동정 行住坐臥語默動靜의 화두를 들고 있다.

이걸 무슨 이 뭐꼬?”하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게 아니고

자각이 되고 있다.

 

그러면 염불도

행주좌와어묵동정에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진짜 아미타불이 자기니까

[둘 되지 않는 도리]가 지금 [불법의 정수]예요.

 

이것만이 윤회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왜냐하면 이 자기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을 때

이때 윤회가 끊어져요.

 

그렇지 않고 대상으로 있으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자체가 윤회야, 이해되세요?

그건 한 생각을 일으킨 거예요.

 

한 생각을 일으켜서 생각 따라가는 게 아니고

이쪽으로 돌려서

나무아미타불이 끊어져 버리는 게 진짜 나무아미타불이에요.

자귀의

그때는 윤회가 끊어지는 거지, 그렇지 않나요?

윤회는 한 생각이 윤회에요.

 

근데 이 이치를 알아들어야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것을 계속 놓치지 않는 게 수행이에요.

들어오시나요?

이게 진짜 화두라고요

 

뭘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안 하면 안 할수록

힘을 빼면 뺄수록 힘을 얻게 된다.

 

화두의 힘은

내가 화두를 안 해야지 화두의 힘을 얻는다

이런 모순을 알아들으시겠어요?

 

앞에서 내가

화두 들지 않는다.”이 말은

그 화두는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생각이다, 이거지.

 

지금 말귀 알아듣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아 다르고 어 달라, 진짜.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불이법에 근거해서 알아들어야 된다.

 

 

단용차심但用此心

모든 사람이 다만

차심_ 이 의식을

지금 의식 있나요?

의식 없다고 해도 그게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다만 모든 사람이 있다고 하건 없다고 하건

다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라서

단용차심일 뿐이라서

 

직료성불直了成佛

곧바로 성불해서 마쳤다는 거예요.

_이 뭐냐 하면 심이야

차심시불 이런 말 들어보셨죠?

즉심시불

이게 같은 말이에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라서

의식이 부처라서

이미 성불이죠?

그러니까 성불 대신에 의식을 넣어봅시다.

성의식

이미 의식을 이루고 있지 않나요?

없다 그러면 때려줄 거야.

 

아픈 게 뭐예요?

그러니까 누구나 이걸 쓰는 것일 뿐이라서

무얼 하건 365

그러니까 인생 100, 365, 하루 24시간, 매 순간순간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다.

이 말 이해돼요?

그래서 의식이 부처니까

모든 사람이 싫어도 부처야.

 

부처가 뭐냐?

딱 답이 있어요.

진짜 이 답은 제 말 아니에요.

모든 대승불교가 이 말 100프로 다 하고 있어요.

 

불이 뭐냐?

중생심衆生心

중생의 의식이라는 거예요.

 

단지 이때 마음을

그냥 마음 하면 헷갈리니까

의식이라고 딱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버리면

부처가 뭐냐?

중생이 갖고 쓰는 의식

중생심이 불이다.

이 말 많이 들었죠.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_의식, _부처 + _중생, _+ 중생

시삼무차별

불이_ 부삼, 부처_ 중생, 의식

이 세 가지는 무차별적이다.

이꼴이다.

 

지금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 갖고 살고 있는 이 의식

그리고 부처

이것이 그냥 딱 하나

떨어지지 않는 것.

 

육조단경이 가지고 있는 어떤 진리를 설하고 있죠.

그 진리하고 내가 이걸 공부하잖아요.

그러면 그 진리하고 나하고 둘이 되면

불이법에 어긋난다.

 

그래서 결론은 뭐냐 하면

이런 식으로 제가 표현하는 것

제가 자주 표현하니까, 따라오세요.

 

나하고 지금 아미타불하고

두 사람이 있어요.

아니 아미타불은 그렇고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합시다.

그냥 깨놓고, 더 직접적으로.

나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어요.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에요?

아니면 나와 관계없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존재해요?

아니면 내가 있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존재해요?

어느 쪽이에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존재 근거가 나죠.

이때 나는 물질이 아니고 나의 의식이죠.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나 사이에

불이가 되려면

어느 쪽으로 통합이 돼야 될까요?

 

내가 없어질 수가 있어요?

아니 내가 없다는 게 그건데.

나는 아무 쓸모없어서 없어질래요하는 그놈이 의식이잖아요.

근데 그 의식이 없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존재할 수가 있나?

아미타 부처님이 존재할 수 있나요?

 

더 깨놓고 얘기합시다.

관세음보살이 존재할 수 있나요?

신이 존재할 수 있나요?

이게 여러분, 무서운 거예요, 지금.

 

내 의식이 있어야만이

여기서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가능해지죠.

근데 지금 방금 제가

석가모니 부처님, 관념이에요.

왜냐하면 실상이 되려면

여기 있어야 돼.

 

지금 이것만이 실상이잖아요.

여기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어요? 여기 있어요?

한 생각 일으키면 생각일 뿐이야.

 

아미타불 계세요? 여기?

내가 있다고 믿으면

그분의 그 생각일 뿐이라니까요.

 

그래서 불이법이 되려면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되려면

나로 통합이 되는 게 삼위일체야.

그렇지 않나요?

 

진짜 삼위일체가 되려면

실제로 있는 것은 나밖에 없잖아요.

이때 나는 몸이 아니고

지금 멀쩡한 이 의식.

의식 하나로 대동 통일되는 게 이게 일심사상이에요.

화쟁사상이에요.

 

그럼 이걸 나만 가지고 있느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보편적으로 다 가지고 있잖아요.

여기서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고요.

 

그래서 불이가 되려면

불이가 우리 공부의 최종적인 기준이에요.

불이가 되려면

반드시 나로 통일돼야 돼요.

그래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에요.

 

그래서 무엇이라도 속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선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왜냐?

이게 부처라서

내 의식이 부처에요.

 

한마디로 그냥

불이법으로 기준을 딱 세우면

뭐라고 해도 안 속아.

그래서 불취어상 不取於相

부처라고 하건, 아미타불이라고 하건, 진리라고 하건, 신이라고 하건

거기에 내가

불취_ 그 상을 내가 그 관념에 쥐지를 않아.

 

불취어상 여여부동

이게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의 핵심이에요.

부동심_ 무엇에도 속지 않는다.

그리고 따로 어디라고 하지 않는다.

공이라고도 하지 않고, 한 생각 일어나는 자리라고도 하지 않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그건 네 관념이고, 진짜로는 이거다 이거예요.

자기 기준이 생긴다. 이거야.

딱 선다.

 

항상 이 기준점을 딱 가지고 산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기준점을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것조차도 버린다.

그렇게 사는 게 지금 우리 공부예요.

 

오늘 첫 시간에 지금 자초지종을 다 말해버렸어.

더 이상 없어.

근데 기가 막히게 또 까먹어.

그러니까 또 반복하고.

이게 공부예요.

감사합니다.